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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아름다운 사리탑이 있는 봉인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1. 23:02

     

    서울과 그 주변에 있는 고찰(古刹) 중에서는 봉(奉)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많아 헛갈리기 일쑤다. 예를 들자면 

     

    봉은사 :  

    봉은사 일주문 / 서울 삼성동에 있다.

    봉원사 :

    봉원사 대웅전과 대방 / 서울 신촌에 있다.

    봉선사 : 

    봉선사 큰법당 / 남양주시 진접읍 사능리에 있다.

    봉영사 :

    봉영사 무량수전 /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다.

     

    등인데, 위와 같은 유명 사찰은 아니지만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는 또 다른 '봉' 자 돌림자의 사찰 봉인사(奉印寺)가 있다. 봉인사는 대찰(大刹)이 아니고 대부분의 당우가 1979년 이후에 건립돼 아직 풋내가 풍긴다. 하지만 이 절에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승탑이라 여겨지는 조선시대 사리탑이 존재한다. 어디서 옮겨온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이 절에 있던 크고 아름다운 승탑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복잡한 사연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봉인사 입구의 지장전 / 가장 최근에 건립된 당우이다.
    봉인사 석가모니 진신사리탑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06 천마산 봉인사는 봉선사의 말사로 <봉선사본말사지>에도 건립 연도가 정확히 기재돼 있지 않다. 하지만 조선 초에도 존재했었다고 하며 실록 <광해군일기>에는 보은사(報恩寺)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광해군 11년(1619) 3월 11일자 기사에 나오는 보은사가 그것이다.

     

    축약하자면, 1616년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1619년 조선과의 친교를 목적으로 사신 웅유격(熊遊擊)을 보내 진귀한 물건들을 진상했다. 그가 올린 선물 가운데는 부처의 진신사리 1과도 있었는데, 이에 이듬해 5월 광해군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보은사에 부도암(浮圖庵) 및 석가법인탑(釋迦法印塔)이라는 이름의 석가사리탑을 세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은 불자도 아니면서 왜 이와 같은 불사를 벌였을까? 그 이유를 봉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묘(成墓)에서 찾을 수 있다. 성묘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무덤이다. 앞서 '광해군 · 임해군 묘와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에서 말한 대로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선조의 첫아들인 임해군과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낳았다.

     

    하지만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이에 광해군은 훗날 왕이 되자 무덤을 성릉(成陵)으로 승격시켰고,(1610년) 주변의 작은 절을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의 원찰 보은사로 키운 듯하다. 까닭에 후금에서 보내온 부처의 진신사리가 보은사로 보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진대 다만 보은사가 언제 보인사로 바뀌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의 성묘

     

    알려진 대로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나 보은사 사리탑은 왕명으로 세워진 까닭에 크고 화려하다.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연히 조선 최고의 석공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 탑을 영조 41년(1765) 승려 풍암(楓巖, 1695~1766)이 왕실의 시주를 받아 중수하였는데, 이때도 절의 이름은 보은사였다. 그런데 보은사는 고종 24년(1887) 실화로 대법당·응진전·시왕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사라졌고 이후 일제강점기 들어 폐사되었다.

     

    이 폐사지를 1979년 한길로라는 지사(志士)가 복원하였다. (이때 이름이 봉인사가 된 듯하다) 그리고 땅 속에 묻혔던 승려 풍암의 비석인 풍암취우대사비(楓岩取愚大師碑)가 이 무렵 발견되어 절 입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석가법인탑은 없었다. 폐사된 후 이 아름다운 탑이 온전할 리 없었으니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자취조차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얄궂게도 복원될 무렵에도 이 절에 석가법인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발견된 풍암취우대사비로부터 이 절에 석가법인탑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이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사리장엄구와 함께 1927년 일본 고베(神戶)로 실려 갔으며 이후 증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1987년 2월 이 사리탑이 사리장엄구 일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승탑의 소재지를 찾아내 반환을 요구한 결과가 아니라 이 사리탑사리장엄구의 선의 취득자인 변호사 이와다 센소(岩田仙宗)가 남긴 유언에 따른 일이었다. 이와다는 살아생전, 자신이 죽으면 사리탑을 비롯한 유물 일체를 한국에 반환하라는 유언을 며느리에게 남겼다고 한다.

     

    이 유물은 1972년 한국으로 돌아온 경주 영묘사 출토 인면 막새(신라인의 얼굴이 조형된 수막새)와 더불어 일본인이 기증한 가장 귀중한 유물이다. 신라시대에는 영묘사에서 사용된 수많은 막새기와 중의 하나였겠지만 지금은 1점밖에 기와로서, '천년의 미소'라고 이름 붙여진  이 7세기 인면 막새는 2018년 보물(제2010호)로 지정되었으며 LG그룹의 얼굴로 재탄생하였다. 

     

     

    '천년의 미소'
    '천년의 미소'와 LG그룹 로고

     

    반면 <봉선본말사지>에 의하자면 이 사리탑과 사리장엄구 세트(총 7개)를 팔아먹은 자는 남양주 견성암의 주지승 환송(喚松)과 전 영의정 이유원의 차남 이호영(李琥榮)이었다. 두 사람은 공모해 이 유물을 200원의 거금을 받고 일본인 골동상에 팔았으나 실은 말도 안 되는 헐값이었다. 

     

    아무튼 사리탑과 사리장엄구가 모두 돌아오게 되었지만 봉인사의 몫은 없었으니, 사리탑과 장엄구는 일습으로 보물 928호로 지정되어, 사리탑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경복궁 마당에 세워졌고, 사리장엄구은 중요 유물로써 박물관에 전시됐다. 하지만 보존을 이유로 2005년 박물관 이전과 함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가고 지금은 그저 봉인사의 복제품만을 감상해야 되는 처지가 됐다.

     

     

    경복궁 마당에 세워졌을 때의 봉인사 사리탑

     

    7개의 사리 장엄구 중 하나인 은제(銀製) 장엄구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쓰여 있다.

    "世子戊戌生 壽福無彊 聖子昌盛 萬歷 四十八年 庚申 五月"

    세자무술생(1598년) 수복무강 성자창성 만력 사십팔년 오월(1620년, 광해12년)

     

     

    봉인사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그 세자는 광해군의 아들 이지(李祬, 1598~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아버지 광해군과 함께 강화 교동도로 유배 보내졌다. 그는 아비와 격리돼 위리안치되었는데, 이후 가위와 인두로 꾸준히 땅굴을 파 탈출을 시도하였다. 쇼생크 탈출의 조선 버전이랄까? 그는 앤디처럼 땅굴을 통해 거소를 탈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영화와 달리 해피앤딩이 아니었으니 곧 붙잡혀 교살되었다. 남편이 달아날 때 나무 위에 올라가 망을 보던 세자빈은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메 자살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로 인생은 새옹지마다. 이틀 후면 한 가족은 대통령궁의 주인이 되겠지만 다른 가족은 비애를 곱씹게 될 것이다. 제멋대로 주위에 피해를 끼치면서 산 가족이 아닌, 부디 올바르게 살아왔던 가족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누구나의 인지상정이리라. 선거 후인 다음 주 주말에는 최근 확인된 광해군의 아들 이지의 무덤을 찾아가 볼까 한다. 그때는 과연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으려나?

     

     

    봉인사 사리탑 / 팔각원당형의 평면과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 길쭉한 상륜부, 날렵한 지붕돌 등, 전체적으로 원형에 충실한 모양새나 약간의 변형을 주었고, 난간석은 축약하거나 생략했다.
    사리탑과 주변 / 사리장엄구 속에 있던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근자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반환되어 탑 안에 모셔졌다.
    큰법당
    큰법당 앞 오래된 살구나무
    오백나한상 / 실제로는 1250개라 하는데 숫자의 근거는 잘 모르겠음. .
    나한은 아리한(阿羅漢)의 준말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뛰어난 수행자를 이른다. 신라말 선종(禪宗)의 유행으로 나한의 신통력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으나 전통적 보살에 밀린 듯.
    삼성각 / 공포와 초석이 삼성각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
    풍암대사비
    입구의 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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