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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근대사의 변곡점 신익희 후보 서거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8. 18. 22:58

     

    서울 강동구 강동역에는 구리빛 찬연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해공(海空)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무척 낯선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선생은 격동의 시기 189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해 갑오개혁과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있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해 신문물을 익힌 그는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요직을 거치며. 독립에 헌신했다. 

     

     

    신익희(申翼熙, 1894 ~1956) 동상과 사진

     

    그의 임정 활동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평화적인 방식을 표방하되 실질적으로는 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 각지를 돌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만들려 애썼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한중연합군 결성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에 있어서도 좌우를 넘나들며 뛰어난 활동력을 보였으며, 그중 가장 임팩트 있는 활약은 1946년 평양에서 벌어진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 암살을 기도한 일이었다.*

     

    *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大韓獨立促成國民會, 대한민국 초대 여당) 부회장이던 그는 통일의 저해가 되는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해 백창섭(白昌燮)을 파견했다. 당 30세의 백의사는 북조선 3.1절 기념식에서 평양역 광장 연단 위의 김일성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바로 터지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그것을 주워 던지려다가 손에서 폭발했고, 노비첸코는 한쪽 손이 달아나고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 백의사는 무사 귀환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이 연설하고 있다. 뒤에 걸린 대형 초상화는 스탈린과 김일성인데 그 가운데의 태극기가 이채롭다. 북한은 남한에 앞서 정식 정부를 출범시켰으나 인공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당시의 김일성

     

    신익희는 1955년 9월 18일, 현 민주당의 뿌리인 민주당을 창당하고 (발기인이 장면, 조병옥, 곽상훈, 김도연 등 쟁쟁하다) 1956년 3월 28일 차기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질 제3대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선거였다. 초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중임은 1회만 허용한다는 조항을 사사오입 개헌*으로 고쳐 현 대통령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후 치러지는 첫 선거이기 때문이었다.

     

    * 사사오입개헌은 대한민국의 제2차 헌법개정으로 대표적 위헌 개헌이다.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결정족수는 재적인원(203명)의 3분의 2(135.333…)보다 많은 136표가 되어야 하는데 135표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당 측에서도 처음에는 부결을 선포했으나 이틀 후 영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므로 사사오입(4 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은 반올림)한 135가 의결 정족수라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여론은 극히 나빠졌다. 기타 여러 가지로 불리했던 이승만은 1956년 3월 5일 자유당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돌연 불출마 연설을 했다. 자신은 나이도 많고 하니 박력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국토통일을 이룩해 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연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고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기 위한 생쑈였다. 그러자 자유당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 불출마선언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대대적인 관제데모를 연출했다.

     

    이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는 연일 데모대가 몰려들어 호소문을 외치거나 혈서를 쓰는 등 난리를 피웠는데,  결국 2주 후 이승만은 "민심에 양보하여 불출마를 번복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조선시대의 거짓 왕위 선양 같은 정치쇼이며 엄연한 사전선거운동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정권교체를 바라는 민심을 꺾기는 어려웠으니 대세는 민주당이 내건 선거 구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1956년 정·부통령선거 민주당 포스터
    지금도 회자되는 명구 "못 살겠다! 갈아보자!"

     

    자유당도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워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신익희의 유세장은 몰려든 군중들로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이다. (부산·대구 15만, 대전 2만, 인천 8만) 그리고 5월 3일 오후 2시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서울 집회에는 무려 30만 이상이 몰려들었다. (당시 마포, 여의도, 뚝섬, 광진, 일대의 한강변은 넓은 백사장으로 연결돼 있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60만이었고 유권자는 70만 4천 명이었다고 하니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몰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에 유세장이 설치된 이촌동 백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이크가 들리지 않는 한강 건너 흑석동과 한강 인도교에도 시민들이 가득 찼다. 당시 서울의 등록 승용차 수 1730대였고, 대중교통은 버스 637대, 전차 180대가 전부였다고 하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구의 이동이었다.

     

     

    그 유명한 한강백사장 유세현장

     

    이상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이틀 후 실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인 한강 백사장 유세를 마치고 5월 5일 지방유세를 위해 호남선열차를 타고 이리(익산)로 향하던 신익희 후보가 새벽 4시경 열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열차는  45분 뒤 이리역에 도착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향년 만 62세, 대선을 열흘 앞둔 시각으로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1956년 5월 5일, 가히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날이었다. 비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고 지지자들의 통곡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찌 됐든 5월 15일 대통령 선거는 치러졌고,(유권자수: 9,606,870명 투표율: 94.4%) 민주당은 후보가 없었으니 자유당 후보 이승만이 자연히 당선되었다. 

     

    하지만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504만 표로 약 70%를 득표했지만 제3후보였던 사회당의 조봉암 후보에게 216만 표가 몰렸고, 죽은 신익희 후보에게 던진 ‘추모표’가 무려 185만 표나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신익희 추모표가 28만 4,359표로 이승만의 20만 여 표를 압도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당연히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다. 신익희의 장례는 5월 23일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이후  '비 내리는 호남선'이란 대중가요가 전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3대 대통령 선거의 놀라운 득표 결과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을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이 노래가 유행하자 작곡가 박춘석과 작사자 손로원은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신익희 후보의 추모곡 아니냐는 것이었는데  신익희 사망 3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풀려났다. 우연히 박춘석에 작곡실에 들렸다가 노래를 받아 부르게 된 무명의 손목인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승만은 4년 후인 1960년 , 8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또 세 번씩이나 대통령을 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대통령에 출마했다. 부통령 이기붕은 연로한 대통령이 사망할 경우 자신이 바통을 잇는다는 생각에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감행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이 3월 15일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른바 3·15 부정선거) 4.19혁명이 일어나며 해당 선거는 무효가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가  5년 후 사망하고, 부정 선거의 원흉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몰사했다. (☞ '그밖에 장충단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들')

     

    4대 대통령 선거인 3·15 선거는 준비된 부정선거였다. 하지만 3대 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서의 부정이 획책되지 않았고 있더라도 초보적 수준이어서 신익희 후보가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 짐직된다. (이에 대한 이견을 가진 사람은 못봤다) 만일 이때 신익희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은 2대를 마치고 깨끗이 물러났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처럼 4년중임으로써 지금껏 무탈하게 치러졌을 것이다. 

     

    물론 3.15부정선거,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의 희생, 그리고 5.16쿠데타도 없었을 것이다. 10.26사건과 12.12쿠데타도 당연히 없었을 터..... 하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이때 또 한 번 급격히 꺾이며 급류를 타게 되었던 바, 내가 생각하는 우리 근대사의 가장 아쉬운 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천호동 강동역 앞에 있는 신익희 동상은 강동구가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에 속했기에 아마도 그 연고를 따라 세워졌음직하다. 실제로 광주군 초월면에는 신익희 생가가 보존돼 있다. 본래는 현 위치에서 200 미터 정도 아래 있었는데 1985년 을축대홍수 때 파손되어 1925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2002년에는 여기서 화재가 일어나 신익희의 손자가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강동역 신익희 동상
    동상 안내문
    초월면 신익희 생가의 바깥 사랑채
    신익희 생가의 안채
    생가 안내문
    서거 전까지 살던 종로구 효자동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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