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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보로 보는 금호문 사건과 송학선 의사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8. 27. 05:45

     

    1920년 9월 2일, 당 65세의 강우규 의사는 조선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도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입구 광장에서 저격했다. 저격 수단은 영국제 폭탄으로,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만주에서 러시아 군인에게 직접 구입한 물건이었다. 그는 이날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향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힘껏 폭탄을 던졌으나 그 일행만을 살상시켰을 뿐 정작 사이토 총독을 죽이지는 못했다. 폭탄이 마차 뒷 부근에 떨어지는 바람에 혁대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선에서 끝나고 만 것이었다. (☞ '화보로 보는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의 의거')

     

    그로부터 5년 여가 지난 1926년 4월 28일, 이번에는 한 건장한 조선인 청년이 사이토를 노렸다. 장소는 서울 창덕궁 금호문 앞이었고 살상 무기는 잘 갈려진 영국제 나이프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 10분쯤 순종 황제의 영결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승용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중 가운데 앉은 사람을 찌르려 했으나 그때 왼쪽에 앉은 자가 칼을 쥔 청년의 오른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자 청년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재빨리 왼손으로 옮겨 쥐며 저지하는 자의 가슴과 배를 연달아 찔렀고, 다시 왼손의 칼을 오른손으로 넘겼다. 그리고는 처음에 노렸던 가운데 사람의 가슴 두 곳을 찍었다. 

     

     

    사건이 일어난 창덕궁 금호문 / 안쪽으로 금천교와 진선문이 보인다.
    금호문 앞 표석
    이 담을 돌아가면 정문인 돈화문이 나온다.
    돈화문 / 왼쪽 행인 방향이 금호문 가는 길이다.
    사건 후 현장검증 때의 사진
    차량은 영국산 다임러 리무진으로 보인다.

     

    순식간에 일어난 가히 전광석화와 같은 테러였다. 목적을 이룬 청년은 차에서 뛰어내려 재동 휘문고보 쪽으로 달아났다. 곧바로 추격전이 펼쳐졌고, 그 와중에도 청년은 자신을  추격하는 기마순사 후지하라(藤原德一)와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환필(吳煥弼)을 칼로 찔렀다. 하지만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으니 곧 휘문고보 정문 앞에서 20명 정도의 일경(日警)에게 둘러싸였다. (이때 후지하라는 중상을 입어 입원했고 오환필은 사망했다)

     

    청년은 일경들이 다가오자 들고 있던 칼을 사방으로 휘둘러댔다. 이에 일경들이 주춤하자 재빨리 돌을 집어 그들을 향해 던지며 탈출구를 찾았다. 그러자 일경들이 4발의 총을 쐈고 그중 한 발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이후오 스테로! (나이프를 버려라!)"

     

    경찰 하나가 명령했다.그럼에도 청년은 칼을 버리지 않고 두 팔을 벌린 채 멀치감치 둘러선 조선인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의 학생들 무리와 눈을 맞추며 외쳤다. 

     

    "내가 사이토 총독을 찔러 죽였다.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그 순간 경찰들이 청년을 덮쳤다.

     

    이 청년의 이름은 송학선. 인쇄소 식자공이 본업이었으며 일이 없을 때는 미장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조선 청년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승하를 기회 삼아 조선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기도했다. 사이토가 빈소 조문를 위해 창덕궁에 올 것이라 생각해 금호문 앞을 거사지로 택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순종황제는 한일합병 후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돼 창덕궁에 살다가 1926년 4월 25일 52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이튿날 비보를 접한 송학선은 일을 하던 도중에 급히 집으로 와 옷을 갈아입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피 울부짖고 있었다. 그 또한 망곡대열에 참여해 곡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바, 반드시 이곳으로 총독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린 것이었다. 물론 품 속에는 영국제 나이프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허사였고, 이에 그 이튿날인 27일 아침 다시 나갔는데, 전날과 달리 기마대를 비롯한 경찰들과 헌병까지 포진해 있어 경계가 사뭇 엄중했다. 일제는 순종이 붕어하자 3․1운동 때와 같은 거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많은 경찰들을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일제는 경찰병력의 증강을 위해 인천·파주·수원·개성 등지의 경찰은 물론 경찰 교습생까지 동원하고 새로 권총 1백정을 배부했다) 송학선은 이 같은 경계를 살피며 사이토 총독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 역시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소득은 있었으니 사이토는 아직 조문을 오지 않았으며, 고관들은 정오쯤에 정문이 아닌 측문 금호문으로 출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창덕궁의 구조상 자동차는 정문인 돈화문보다 금호문으로 들어가는 게 내전으로 향하기 편한 까닭이었다. 이에 그는 다음날인 4월 28일에는 오전 11시쯤 도착해 금호문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정오 무렵에 일본인 세 명이 탄 승용차 한 대가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승용차는 오후 1시 10분 경 다시 금호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그 순간 송학선이 번개 같이 차에 올라타 거사를 벌인 것이었다.

     

     

    . 송학선(宋學善, 1897.2.19 ~ 1927.5.19)
    송학선 의사 순국 추모제 사진 / 송의사는 후사 없이 죽어 송씨가문의 대표자가 제주가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총독 일행이 아니라 다카야마(高山孝行)·사토(佐藤虎次郞)·이케다(池田長次郞)라는 일본인이었다. 이중 경성부회(서울시 의회) 의원인 다카야마는 즉사했고, 송학선이 총독으로 오인했던 일본인민회(日本人民會) 경성지회장 사토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사전에 사이토 총독의 얼굴을 익혀두었으나 사토와 사이토가 닮은 구석이 있었고, 또 당시 군중들의 "사이토, 사이토다!"라고 하는 소리에 그로 오인해 차에 뛰어든 것이었다.

     

     

    도쿄 다마 공원묘지의 사토 도라지로의 무덤 / 그는 칼에 찔린 상처가 감염돼 2년 후 경성에서 사망했다.

     

    그해 7월 15일 경성재판소에서 열린 1차 공판에는 방청객 500여 명이 몰려들어 당시의 관심을 대변했다. 송 의사는 강압적인 일본 검사와 재판장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는 태도로서 묻는 질문에 또박또박 답했다. 주심은 미타무라(三田村) 판사였고 에토(江藤)와 와키(脇) 판사가  배석했다. 변호는 이인(李仁)과 한근조(韓根祖), 그리고 일본인 마츠모토(松本正覺) 변호사가 맡았다. 그는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평소 흠모해왔고, 이에 조선총독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당당히 답해 좌중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무기 구입 경로를 묻는 질문에는, "1926년 3월 경성사진관(京城寫眞館)에 미장일을 갔다가 그곳 부엌에 떨어져 있는 칼을 가져와 매일 같이 갈았다"고 했고, (일본인 변호사의 '우연히 주었다고만 하라'는 조언을 무시하고) 남의 물건을 왜 가져갔는가 하는 물음에는, "보기 드문 물건이라 하늘이 내린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재판관이 "그것이 아니라 강도질을 하려고 칼을 주워다 보관한 것이 아니냐" 물었는데, 이때는 목청을 높여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총독을 살해할 목적으로 가져 왔다 하지 않았소? 내가 밥을 굶소? 왜 강도질을 하겠소?" 


    일제는 처음에는 그의 의거를 강도질로 폄훼하려 했으나 송 의사의 당당한 태도에 이후로는 배후가 의심되는 테러로 몰고 갔다. 이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토미(里見) 검사는 그를  중국에서 온 독립단원이라 전제하고 심문했으나 결국은 부모도 몰랐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7월 23일 2차 공판에서는 송학선의 사상에 대해 재판장의 질문이 집중되었는데, 이때 그는 다시 다음과 같이 목청을 높였다.

     

    "나는 어떠한 주의(主義)자도 아니요, 사상가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총독을 죽이지 못한 일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송학선의 재판 광경과 금호문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증언하는 송 의사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그는 1926년 10월 11일 항소심 1차 공판과 11월 3일의 2차 공판을 거쳐 11월 10일 오전 10시 50분, 경성복심법원 제3호 법정에서 열린 3차 공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여전히 태연자약하였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 항소할 생각이 없었으나 극형을 피해보려는 가족의 간곡한 권유에 형식적인 한 항고였으니 태도의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이때 일본인 국선변호사 마츠모토 역시 사형만은 피하려, "순사들을 살상한 것은 정당방위로 볼 수 있고, 다카야마와 사토를 살상한 것은 상해치사 또는 상해로 볼 수 있다"고 변론하며 박열(朴烈) 의사를 예시 들어 무기 혹은 유기징역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박열은 의열단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해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1923년 10월에 예정됐던 일본 히로히토(裕仁) 태자의 결혼식 때 투척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같은 형은 받은 가네코 후미코는 이후 옥중 자살했고, 박열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 최장기간 수감 기록을 남기고 1945년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서는, "피고의 답변과 기타 여러 가지 태도를 보아 정신이 온전한 사람 같지 않으니 의사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함이 마땅하다"고도 주장했으나 송 의사가 이를 부인하고 자신의 처음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바, 수에히로(末廣) 재판장으로부터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5조에 의한 살인 및 살인미수죄'가 적용돼 극형이 선고되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다시금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상고심은 1927년 2월 3일 오전 11시 고등법원 대법정에서 열렸으나 오가와(小川) 재판장은 '이유 없다'고 기각하였다. 재판 결과에 어떠한 기대도 없던 송 의사는 재판정에 출두하지 않았다. 이에 형이 확정된 송 의사는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을 복역하다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경성복심법원 이하라(井原) 검사의 입회 하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송 의사의 형집행은 언론과 가족들 몰래 비밀리에 집행되었다. 송 의사는 교수대에 오를 때도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지를 받고 선생의 사형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시신은 후사가 없는 까닭에 화장되었다. 대현산 화장터에서 화장된 송 의사의 유골은 근방에 일시 매장되었다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전해지고,(유골이 확인된 바는 없다) 이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그가 살던 애오개(아현) 마루턱 오막살이 자리에는 현재 5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는데, 표석조차 없는 바, 잊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듯하다. 

     

    송학선의 가족 / 뒷줄 가운데가 송 의사
    애오개 송학선의 집 / 1926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아현동 가구거리 뒷길 5층 다주택 자리가 송학선의 집자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주소
    송학선 집자리 인근의 소공원
    그 공원의 이름은 우연찮게도 '굴레방. 함께 기억찾기 공원'이다. 이 작은 공원에라도 송 의사 관련 표석이 세워져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송학선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료
    송학선 사형집행을 보도한 중외일보의 기사 / 사진은 송학선의 모친으로, 병석의 모친은 아들이 죽은 지도 몰랐다고 써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료
    서대문형무소 감방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복원된 사형장 옆 시구문 / 송 의사의 시신도 이곳을 통해 가족들에게 인도됐을 것이다.

     

    * 최근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뜻밖에도 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석을 발견했다. 표석은 2015년까지는 돈화문에서 비변사 터 (현 소리박물관)로 가는 횡단보도 옆 길 쪽에 위치해 있었고, 이후 다시 옮겨져 돈화문 왼쪽 후미진 녹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뒤늦게나마 제 자리를 찾은 점,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타 사이토 총독과 순종 황제의 말년은 아래와 같다. 

     

    예전 의거 터 표석 자리에서 본 돈화문 / 예전에는 엉뚱하게 돈화문 왼쪽에 표석이 있었다.
    비변사 터에서 본 돈화문
    지금은 금호문 앞에 올바르게 자리한다.
    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석
    구 단성사 극장 앞 6.10독립만세운동 선창 터 / 송학선 의사의 의거는 민심을 경각시켜 6.10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 1858~1936) / 해군 장성 출신으로 두 차례의 조선총독을 지냈고 이후 일본총리가 되었으나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인 1936년 2.26사태 때 살해되었다.
    조선총독 시절의 사이토 부부
    베네틱토 수도원의 뮤텔 신부를 만나고 나오는 사이토 총독 부부 / 1911년 1월 고해성사를 통해 안명근(안중근 의사의 조카)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한 뮤텔 주교는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에게 이 사실을 밀고한다. 이에 안명근은 체포되고 우국 지사 105명이 체포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조선 가톨릭과 총독부는 밀접한 관계가 된다)
    베네틱토 수도원 사우어 주교 승임식에 참석한 사이토 총독 (1921.5.1) / 가운데 사이토 총독 왼쪽이 사우어 주교이고 오른쪽이 전 주교인 뮤텔 신부이다.
    사이토는 문화통치를 가장해 우리민족을 이간시키는 고도의 통치전술을 구사했으며 조선 기독교는 내내 일제에 협조적이었다.
    순종과 사이토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 1922년 황세자 이은 내외가 인질로 머물고 있던 도쿄로 떠나기에 앞서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찍은 것이다.
    1917년 6월 도쿄에서 일왕 다이쇼를 만난 순종 / 6월 1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네바에서의 사이또 ,이은 부부 / 영친왕 이은은 이미 이때는 일제에 가스라이팅된 상태였다.
    일본 30대 내각 총리 시절(1932. 5. 26 ~ 1934. 7. 8)
    순종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낙선재 상량전 / 왜? 당구대가 있어서. (참고로 순종의 당구 실력은 짠 80 정도였다고)
    순종 말년의 거처 희정당
    희정당 내부 / 하지만 당구를 치다 혈압으로 쓰러진 후 반신불수가 됐고 이후 희정당에서 여생을 보냈다.
    순종이 붕어한 창덕궁 대조전 (왼쪽 건물) / 그러다 1926년 4월 25일 대조전 침실에서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순종이 붕어한 대조전 침실
    순종의 빈전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 경찰들의 경계가 삼엄하다.
    순종 운구 광경
    살곶이 다리를 건너 홍유릉으로 가는 운구 행렬
    순종의 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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