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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지어준 국호 이스라엘성서와 UFO 2017. 12. 1. 22:22
1896년 겨울,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략이 극에 달한 시기에 이집트의 고도(古都) 테베에서 오래된 석비 하나가 발견되었다. 영국 정부(당시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던)가 파견한 고고학자 플랜더스 페트리(W. F. Petrie)에 의해 발굴된 높이 3.2m, 너비 1.6m의 검은 화강암 비석으로, 고대 이집트 19왕조의 왕인 메르넵타(Merenptah)의 공적비였다. 이 석비는 '왕가(王家)의 계곡' 근방의 제사장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완전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발견 당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당대는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과 더불어 무분별한 대규모 발굴 또한 극에 이른 시기였다. 따라서 고대의 이집트 유적과 유물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듯 발굴되고 발견되던 시절이었던 바, 투탕카맨 왕릉 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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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41
'카놋사의 굴욕'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그 내용인즉슨 아래의 그림과 같다. 이를 좀 더 보완하자면, '당시 유럽 최강의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자 임명 권한을 두고 싸우다 파문당하고, 결국 카놋사 성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3일간 자신의 죄를 빌어 겨우 파문의 철회시킨 사건으로, 중세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누르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사건' 쯤이 우리가 기억하는 카놋사의 스토리다. 그래서 그 사건인즉 언필칭 '굴욕'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은 올바른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틀린 내용은 아닌 바, 사건이 일어난 1075년부터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죽은 1085년까지 적어도 10년은 그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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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I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39
문헌상의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방을 떠날 때 학자나 예술가도 동반했을 것임은 그 상상이 어렵지 않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적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사사했던 바, 그 역시 상당한 학문과 심미안을 갖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경지는 자신이 이룩해 낸 헬레니즘 문명으로 표출되었던 바, 비록 그의 치세는 짧았으나 그 영향력은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듯싶다. 그는 실제로 살아생전에도 동서 문화의 융합인 헬레니즘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박트리아에 이르러서는 그곳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페르시아 수사에서는 그리스 · 마케도니아 장병 1만 명과 페르시아 여자의 합동결혼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앞서 거론된 디아도코이 니카토르 1세도 알렉산드로스의 권유로 박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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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1. 01:53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3번 째 대전(大戰)은 가우가멜라 전투였다. 가우가멜라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벌판으로 페르시아어로 '낙타의 집'을 의미한다. 옛날 페르시아의 어떤 왕이 적에게 쫓길 때 자신의 낙타가 매우 빨리 달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에 낙타에게 그때의 땅을 봉토로 주었던 까닭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지명으로 설명하면 가우가멜라는 이라크 모술 동쪽 27km에 위치한 벌판으로서, 이 일대는 지난 3년간 금세기 최악의 테러집단 IS에게 점령당했다 올해 7월 10일 국제연합군에 수복된 지역이기도 하다. 전투는 BC 331년 10월 1일에 벌어졌다. 플루타르쿠스는 월식이 있던 날로부터 12일 째 되는 날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하였던 바, 날짜는 이를 역산하여 산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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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17. 10. 26. 00:46
종이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환관 채륜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한서” ‘채륜전’에는 ‘105년, 채륜이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황제에게 종이를 바쳤다. 황제는 그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고 앞으로는 채륜의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도록 명했다. 이때 채륜이 만든 종이를 세인들은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중국의 종이는 이보다 200년 정도 앞서 발명됐고, 채륜은 기존의 종이를 보다 얇고 견고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채후지일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20세기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전한(前漢) 무제(기원전 140~84) 때의 고대 종이가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종이가 757년, 사라센 제국의 영토인 사마르칸트에서 재현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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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17. 10. 26. 00:41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라 한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 앞에 게시하고 그릇된 제도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의했다. 그것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었다. 그 500주년에 즈음한 오늘, 나는 그 거대한 개혁의 초석이 된 고구려 출신의 한 남자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 이름은 고선지이다.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의 유장(遺將) 고사계의 아들로, 20세 초반의 나이에 당(唐)나라 유격장군이 되어 당시 당나라의 가장 골칫거리였던 토번국(티벳)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당(大唐) 제국 전선(戰線)에의 화려한 데뷔였다. 이후 그는 740년, 달해부 전투에서 2천 기병을 이끌고 승리하여 중앙 무대에 이름을 올리고, 이후로도 서방 정벌전에 승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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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네안데르탈인의 슬픈 죽음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0. 24. 20:07
(I 편에서 연결됨) 그러던 중 2015년 4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원인을 두고 학계의 의견이 여전히 분분한 가운데, 이들이 현생 인류와 달리 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멸종의 화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고 라이브사이언스 등 과학전문매체의 22일자 보도했다. 약 3만 년 전까지 유럽에서 서아시아지역에 걸처 분포한 초기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에 등장한 뒤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보스턴대학교와 영국 배스대학교의 합동 연구진은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와 달리 불을 사용하지 않은 채 음식을 해 먹었고, 이것이 멸종의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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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네안데르탈인의 슬픈 죽음(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0. 23. 23:24
1856년 8월의 어느 더운 날, 독일 뒤셀도르프 근방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정체불명의 유골 화석이 수습되었다. 형태로 보아서는 분명 사람의 뼈인데, 그 모양새가 현대인과는 많이 달랐다. 대퇴골이 매우 굻고 휘어져 있었으며 해골의 이마는 낮았고, 무엇보다 툭 튀어나온 눈 주위 뼈가 눈길을 사로잡는 인골이었다. 해골은 정수리 부분에서 이마와 위 눈덩이까지만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인골을 네안데르탈인(人)이라 이름 붙였다. 인골이 발견된 채석장이 네안데르(neander) 계곡(thal)이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명명이 나름 의미 있다. 그 계곡이 네안데르라고 불린 이유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시인인 요하임 노이만(Joachim neumann)의 이름에서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