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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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8. 23:40
이태원 경리단 길이 거짓말처럼 떴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느낌이다. 경리단 길이 유래된 경리단은 육군의 회계, 계약, 급여 등 재정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인데, 지금은 국군재정관리단에 흡수되며 도로명으로서 그 이름만 남게 되었다. 경리(經理)란 말은 회사의 재정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나 직책명으로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나 엄격히 말하자면 게리(けいり)에서 비롯된 왜색 짙은 단어다. 경리단은 상무(尙武)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전, 직업 운동선수들이 군복무를 대신하는 팀의 이름으도 쓰였으며, 까닭에 과거 경리단 야구팀은 언제나 실업리그를 휩쓸었다. 선수층이 두꺼우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리단이 있던 그 길은 언제부턴가 맛집과 멋집이 어우러진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미군부대와 외국 대사관의 영향으로 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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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땅 이태원 - 임진왜란과 잉태원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5. 23:59
임진왜란의 전범 가토 기요마사가 스쳐가기 전까지 이태원(梨泰院)은 그저 조용한 역원(驛院) 마을이었다. 배나무 꽃 아름다운 역참 동네 이태원은 오얏나무(자두나무) 이(李)의 이태원(李泰院)으로도 불렸던 바, 하얀 배꽃과 자두꽃이 어울려 흐드러진 풍치 있는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태원은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맑은 물이 산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고, 운종사 동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크고 깊은 골짜기에 가득하니 성안의 아녀자들이 피륙의 빨래와 표백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러한즉 본래부터 자연발생적인 마을이 있었겠으되,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가 영남지방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만든 역원 이태원으로부터였다. 원(院)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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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4. 00:35
숭례문이 대한민국의 국보 1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전에는 통칭 남대문이라 불려졌고 지금도 그와 같은 호칭이 일반적이나, 숭례문이라는 정식 이름을 되찾으려는 듯 지금은 도로표지판도 모두 바뀌었으며 인터넷 맵과 핸드폰 앱의 지명도 바뀌는 추세다.(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1934년 숭례문을 '남대문'의 명칭으로써 보물 1호에 지정함으로부터인데,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이후 숭례문으로 환원시켰다) 더불어 이 건축물이 대한민국 국보 1호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진행중이다. 숭례문이 남대문으로 불리운 건 알다시피 한양도성 4대문의 남문이기 때문이다.(유감스럽지만 그 명칭은 일제가 부여했다) 그리고 국보 1호가 된 건 한양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1398년에 지어진(14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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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노기(乃木) 신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2. 00:17
노기신사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라는 근대 일본군 장수를 기리는 신사이다. 우리는 대부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거니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노기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본인들에게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인들과는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대 타이완 총독을 지냈기 때문에 대만 사람들에게는 민감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조선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나 초대 총독 데라우찌 마사다케를 대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타이완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일본에 할양됐다) 그런데도 내가 그를 주목함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그의 신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가끔 이곳을 찾아오는 일본인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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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1. 23. 23:58
대한제국의 운명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침몰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해군에 박살나자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종전(終戰) 회담 알선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1년 여의 전쟁 기간 동안 15억8,400만 엔이나 되는 전비(戰費)를 사용했는데, 예상했던 돈의 4배에 이르는 금액이었다.[각주:1] 일본은 전비의 거의 전부를 영국과 미국에서 빌려온 차관으로 충당했으므로 더 이상의 전쟁이 지속되면 국가파산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의 입장을 적극 받아들여 뉴햄프셔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 양국의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은 당연히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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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과 독립협회 (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31. 00:11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천하의 매국노로 알려져 있지만 태생으로 따지자면 사실 그는 매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처지였다. 그 태생이 워낙에 미천한 탓이었다. 경기도 광주(지금의 분당)에서 똥지게 지고 거름 주던 이완용은 나이 열 살 때 32촌 쯤되는 이조판서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호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부잣집이었다. 하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었던 바,(서자 이윤용이 있었으나 서출인 탓에 대를 잇지 못함) 조선의 상속법에 따라 적자 문중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호준의 일가는 대부분 양자로서 대가 이어졌던 바, 주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자 계열을 찾다보니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 6대조에서 갈려 나온 32촌 되는 가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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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27. 06:58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인조 임금이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끌려와 항복의 예를 표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장소에 세운 청태종 홍타이지의 기념비로, 본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와 처음 이 비석을 보았을 때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세워진 이 비가 얼마나 높고 위압적으로 보이던지.....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2005년경, 이 비석을 찾아 석촌역까지 왔으나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은행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었지만 실패했다. 이후 한참을 서서 식자(識者)로 보이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찍어 물었는데, 기대에 걸맞게 그 신사 분은 주택가 골목 골목을 돌아 목적지까지 안내해주었다.(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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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와 홍영식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3. 23:57
앞에서 김옥균의 화려한 스팩을 말했지만 부마도위(駙馬都尉) 박영효(1861-1939)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우선 부마도위라는 위호(位號)를 주목해볼 만한데 이는 임금이 사위에게 내리는 호칭을 말한다. 즉 그는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가 되며 이로 인해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를 받아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는데, 그가 철종의 딸과 결혼하게 된 데는 그 할아버지 우의정 박규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아울러 내각 총리대신과 주미전권공사를 지낸 박정양 역시 그의 집안이니 한마디로 금수저 출신이다. 과거는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워낙에 집안이 빵빵하다 보니 굳이 볼 필요도 없었을 터, 1878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시작으로 판의금부사까지 한 걸음에 내닫는다. 이미 설명한 김옥균과 서광범,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