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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곧 당신의 밥그릇을 앗아갈 AI로봇 사이보그 레플리칸
    거꾸로 읽는 천문학개론 2022. 10. 11. 06:53

     

    구 세대의 로봇이라 하면 단연 우주소년 아톰이다. 우주소년 아톰은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철완(鉄腕) 아톰>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SF만화의 주인공으로, 이를 고단샤에서 23권짜리 책으로 출간했는데 한국에서는 해적판이 그대로 번역되어 유행했다. (2001년 학산문화사에서 정식 발행됐다)

     

    만화의 무대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로, 만화 속 텐마 박사가 아톰을 만든 건 아마도 지금쯤 (2022년 10월 10일)이 아닐까 한다. (이후 아톰은 텐마 박사의 기대에 못 미친 탓에 버림받았다가 오챠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원을 받아 재탄생한다)

     

     

    아톰과 오챠노미즈 박사

     

    그런데 로봇이란 말은 무려 100년 앞서 탄생했다. 로봇은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 1890-1938)가 고된 노동에 항거하는 인조인간들에 대한 희곡을 구상하고, 그 인조인간의 명칭을 노동(robota)이란 슬라브어에 기인해 만들었다.(정확히는 작명에 고민하는 것을 본 그의 형이 붙였다) 그러니까 로봇이란 말은 체코어인 셈이다. 아무튼 그 희곡은 1921년 무대에 올려졌고 뜻밖에도 대박을 쳐 미국 브로드웨이에까지 올랐다. 제목은 'R.U.R. 로줌의 유니버설 로봇'(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이었다.

     

    하지만 차페크가 구상한 로봇은 우리가 생각하는 로봇과는 거리가 있으니 그들은 쇠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이보그(컴퓨터와 인간의 육체를 합성한 합성인간 또는 인조인간)도 아니니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나오는 복제인간들(레플리칸트)로 이해하면 개중 적합할 듯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차페크 역시 그 로봇을 반란을 전제로 해 만들었다. 희곡의 내용인즉, 일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한 인간들이 로봇을 만들어 노동을 대신하게 만들었으나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던 로봇들이 이에 항거해 폭동을 일으킨다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겼을까? 여기서는 로봇이 승리한다)

     

    SF의 고전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우리 인간의 유전자 변형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 레플리칸트와 오리지널 인간과의 대결을 그렸다. 레플리칸트는 인간의 편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노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레플리칸트는 식민지 행성에서의 전투 용역, 우주 개발용역, 섹스돌 같은 용도로 이용된다) 그렇지만 레플리칸트 역시 사고를 가진 인간이기에 자신들의 처지에 항거하는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일부는 지구에 잠입해 인간들과 같은 권리와 행복을 누리려 한다. 인간들이 그런 레플리칸트를 용납할 리 없었으니 그 불법이민자(?)들을 색출하고 처단하기 위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특수 경찰대가 조직돼 운영된다. 그들은 보이트-캄프 테스트라는 것을 통해  레플리칸트를 식별해내는데 그렇게 발각된 레플리칸트는 즉결처분된다. 그들은 이것을  폐기(retirement)라고 부른다. 레플리칸트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인데, 블레이드 러너는 당연히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아일랜드'에서 클론(복제인간)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와 같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조금은 난해한 영화 '블레이드러너' / 1982년 제작됐다.
    복제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한 한 남녀의 탈출기를 그린 단순 오락영화 '아일랜드' / 2005년

     

    다시 로봇으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혹시라도 인간과 로봇과의 싸움이 일어난다면 승자는 언제나 인간이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소리이다. 하지만 간혹 로봇과의 공생을 외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2014년 개봉한 '오토마다'가 그것으로, 영화 속에서 2040년대 보험회사 직원으로 나오는 안토니오 반델라스는 어느 날 로봇의 자살을 목격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로봇에 대한 시각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안토니오 반델라스가 주방용 로봇의 오작동으로 인해 다친 고객의 컴플레인과  배상 요구를 받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그는 로봇의 오작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위험한 실연으로 증명함으로써 고객의 요구를 없던 일로 만든다. 그는 이렇듯 인간에 복종하는 로봇 제품에 대한 신뢰를 100%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우연히 로봇의 자살을 목격한다. 로봇의 자살 이유는 로봇으로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로 인해 (진화한) 로봇의 지각을 알게 되고 항거하는 로봇들에게 동적적인 인간이 된다. 

     

     

    로봇에 관한 제1원칙: 로봇은 인간은 해하지 않는다.
    로봇에 관한 제1원칙: 로봇은 스스로 개조하거나 다른 기계를 개조할 수 없다. 그러나.....
    약간은 불편한 (혹은 불쾌한) 문제를 건네는 영화 '오토마다' / 2014년

     

    이쯤에서 앞서 올린 '구글 AI 람다 지각력 소동ㅡ로봇의 반란은 일어날까?(I)'에 대한 댓글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성의도 성의려니와 심도 또한 깊어 생각거리를 제공하기에..... 이 분이 아래와 같은 글을 쓴 것은 1편의 주제였던 인공지능(AI)의 자체 진화로 빚어지는 로봇 반란에 대한 반론으로 보인다. 

     

    진화 차원에서 보면 에이아이는 새로운 
    
    인류의 종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이제 자신을 새로운 존재 질서로 구현한
    
    에이아이를 통해 그동안 스스로를 제약하던
    
    여러가지 생존 조건을 극복하고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의 한계가 모두 해체되는 건
    
    아니겠지요.
    
    이를테면 나와 네가 다르다는 생존 인식을 낳는
    
    자기 분열의 상대성 관계가 만들어내는 자기 중심의
    
    파괴적인 폭력성은 그대로 남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에이아이와 에이아이 그리고 에이아이와 인간의
    
    싸움은 필연적이겠지요. 대부분의 생식적 인간은 사라지고
    
    기술적 인간 에이아이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앞으로 인간의 삶이 심우주 너머로까지 확장된다고 할 때 에이아이는
    
    인간의 실존 형태로서 가장 적합한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식주와 수면이 필요없는 인간으로서의 에이아이만이
    
    그런 세계를 개척 실현할 수 있을테니까요.
    
    
    
    혹자는 에이아이가 어떻게 인간이냐 기계일 뿐이지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드러내는 고백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주어진 과거의 내용을 그저 
    
    배우고 암기한 존재 인식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말하자면 신, 혼, 영, 양심, 종교, 운명, 섭리 등등 우리
    
    삶의 가치 목적 의미로 작용하는 전통 문화 민족
    
    역사로 갈무리된 무수한 관계의 희로애락적
    
    내용들을 복제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이미 만들어진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분리 배열하는 기계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할까요?
    
    즉 내가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까닭은 나의 생명이 
    
    처음부터 한국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세상살이가 힘든 이유는 단지 내가 만들지 않은
    
    세계에 내가 끼어 맞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자기 복제를 바탕으로 하는 에이아이가
    
    인간의 또 다른 현상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런지...
    
    생명은 에너지 현상이고
    
    삶이란 관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때
    
    에이아이의 의식 과정에 따른 존재 과정은 인간의 그것과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게 저의 소견입니다

     

    위 의견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간은 되고 Al는 안 된다는 것은 단지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AI를 아예 신인류의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시각을 우주론적으로 넓힌다면 이 또한 타당하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가,  Al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나는 Al로 인해 나와 내 가족의 생계를 잃은 마당이니 그밖의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Al 로봇에게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더더욱 가질 수 없다. 오히려 불쌍한 것은 나 자신이다. (앞으로 이런 불쌍한 '나'는 정말로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나를 불쌍히 여겨 밥그릇이라도 빌려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Al에게 패배한 루저로 취급받을 뿐.....  그 마당이 되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라는 것도 그저 개소리에 불과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테슬라가 판매할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의 가격은 자동차보다 싼 2만 불이다. 물론 옵티머스는 단순 노동과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될 터, 당장의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옵티머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로봇들에게 장착되는 AI는 점점 진화되고 발전할 것인즉 요소요소에서 위협이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채기성의 소설 <언맨드>에서 대학강사였던 주인공 영기는 AI 로봇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해직된다. 지식의 전달에 있어서는 인간이 AI를 절대 이길 수가 없다. 하지만 이후로도 주인공은 계속 AI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 소설 속에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통에 처해진다. 

     

     

    위 소설에 대한 심사워원 추천사

     

    과학자들의 염려는 보다 포괄적이다. 얼마 전 AI 과학자들 가운데 36%가 'AI가 이번 세기 안에 전면적 핵전쟁에 버금가는 대재앙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었다. 이는 뉴욕대·워싱턴대·존스홉킨스대 등의 공동 연구진이 코넬대의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밝힌 연구 결과에 따른 보도로서, AI 분야의 '자연어 처리'(NLP·Natural Language Processing) 과학자 327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설문에서 3명 중의 1명 꼴로 위와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자연어 처리는 사람의 언어를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하는 기술로, AI가 사람처럼 말하고 듣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이다.

     

    위 판단에서 전문가들은 특히 무기에 AI를 결합한 자율 무기 체계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보았다.  AI 유도 무기나 핵 경고 시스템에 탑재된 AI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 파국으로 치닫게 되리라는 우려인데, 이는 실제로 얼마 전 그 가능성을 보여준 적이 있다. 지난 7월 19국제 체스포럼 모스크바 오픈 경기에서 7살 어린이와 상대하던 체스 로봇이 아이의 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체스 로봇은 경기 중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 어린 선수의 손을 붙잡았고 아이는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는 경기를 구경하던 어른들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손가락이 부러진 후였다.

     

     

    CCTV 장면

     

    물론 Al가 오작동한 것이지 아이의 실력에 열받은 Al가 과잉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정말로 큰일이겠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오작동이 현재 러시아가 개발하고 있는 해안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는 자율 어뢰(AI torpedo) 같은 데에서 발생하는 경우다. 그럴 경우 지구의 일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비유가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소형차에게서는 급발진 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으나 중형차급에서는 왕왕 일어나는 경우와도 견줄 수 있다. 회로가 단순하면 명령체계도 단순해 오작동이 일어날 염려가 없지만, 여러가지 기능이 추가되어 회로가 복잡해지면 간혹 명령체계가 엉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AI는 이제 바둑기사 이창호가 상대하던 제한적 인공지능(ANI·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으로 발전했으며, 사람처럼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초(超) 인공지능(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오작동뿐만 아니라 오남용의 폐해까지 염려해야 한다. SF 영화처럼 스스로의 감정과 지능을 가지고 자기 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그런 AI 로봇이 아니라 AI 제작자가 빌런으로 등장하는 경우다. 이를테면 일론 머스크와 같은 자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큰일 난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이런 사진과 내용들이 인터넷에서 쉽게 접근된다.

    *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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