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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월사 혜거국사탑의 전설과 진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0. 28. 21:50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절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사적(寺跡)을 살펴보자면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 해호(海浩)선사가 왕실의 융성을 바라 '월성(月城)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절을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그가 머물던 도봉산 동대 (東臺)의 별칭이 망월성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찌 됐던 망월사는 경주와 멀리 위치함에도 신라 왕성인 월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후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가 머물렀다는 구전이 전부인데, 마의 태자가 왜 먼 이곳을 들러 금강산으로 갔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긴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꽂은 지팡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니 도봉산 망월사에 들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망월사의 고려시대 흔적은 뚜렷하니 봉선사 사적 기인 <봉선사본말지(奉先寺本末誌)>에는 1066년(고려 문종 20) 혜거(慧炬)국사가 재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절은 산속 깊숙이 위치해서인지 조선시대에도 억불책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고 다만 세월을 따라 쇠락해진 것을 1691년(숙종 17)과 1827년(순조 27)에 중창했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한국전쟁의 병화(兵禍)로부터는 무사하지 못했으니 목조건물은 전부 소실되었다. 지금의 당우들은 1969년 주지 춘성스님과 1972년에는 주지 도관스님, 1986년 주지 능엄스님의 중창을 거치면서 세워진 것들이다.  따라서 당우 가운데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없으나 망월사 혜거국사탑을 비롯하여 망월사 목조불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망월사 목조불삼존상, 망월사 괘불도, 망월사 건륭오십삼년명 동종, 망월사 간행 진언집 책판 관련 목판 등은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영산전에서 바라본 만장봉과 자운봉
    영산전에서 바라본 도봉산
    영산전 아래의 천봉당태흘탑 / 1793년에 세운 태흘선사의 승탑이다.
    도봉산 연봉과 영산전 / 영산전은 1882년 완송스님이 중건했다.
    영산전 오르는 계단에서 본 산사
    영산전에서 내려 본 속세
    망월사 낙가보전 / 1972년 낙가암 자리에 세워졌다.
    낙가보전 오르는 길


    이 가운데서 혜거국사의 승탑은 단연 최고의 유물이다. 혜거국사는 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실린 역사적 인물로서 고려 정종(재위 923~949) 때 왕사, 광종(재위 949~975) 때 고려 최초의 국사를 역임했다. 혜거는 북송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년) 황명으로 편찬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일대기와 선문답이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한 선승(禪僧)으로 의상, 원효와 함께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혜거는 10세기 중국 오월 지역으로 유학을 가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에게 사사하고 그가 창시한 법안종을 들여왔다. 광종은 법안종을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통합과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삼기도 했는데, <경덕전등록>에는 국왕이 유학 중인 혜거 스님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사(王師)의 예로 맞았다는 기록과 함께 그가 위봉루에서 설법한 행적이 전해진다.

     

    혜거국사가 주석한 절이 도봉산 영국사(寧國寺)이나 그간 절의 존재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12년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도봉서원의 자리가 본래 영국사 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도봉서원은 조선시대의 거유(巨儒)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으로 서울 인근의 최대 서원이었다가 19세기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진 곳인데, 근래 도봉서원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행하던 중 뜻밖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도봉서원이 있던 곳이자 영국사가 있던 곳
    영국사지의 발굴로 도봉서원 복원은 중단되었고 현재 그 터는 철책이 둘러처져 있다.
    부근의 산정약수 각자 바위 / 바위 밑 샘물은 고갈되었다.
    등산로 초입의 도봉동문 각자 바위 /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각자한 것이다.

     

    도봉서원 터에서는 고려시대 금동금강저(金銅金剛杵), 금동금강령(金銅金剛鈴), 청동현향로(靑銅懸香爐), 청동향합(靑銅香盒) 등의 수준 높은 불교유물이 발견되었는데,(이상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이 혜거국사의 비석 조각이다. 혜거국사가 주석했다는 영국사가 도봉산에 있었음과 그 자리가 바로 도봉서원 터임이 바로 혜거국사탑비편을 통해 증명된 것이다.

     

    영국사지 출토 혜거국사탑비편과 비편의 탁본
    영국사지 출토 고려시대 금강령과 금강저

     

    그렇게 볼 때 망월사의 혜거국사탑도 의당 가치가 재발견되야 할 듯싶다. 혜거국사탑은 지금은 망월사에 있지만 그것이 오래전 영국사지에서 옮겨 온 것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혜거국사탑은 다른 고승들의 예(例)처럼 혜거국사탑비와 함께 제작되어 영국사에 있다가 영국사가 폐쇄되며 같은 도봉산 내에 있는 망월사로 옮겨 앉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현재  망월사에 있는 혜거국사탑의 건립시기는 치석 수법이나 양식 등이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 전기 석조물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하여 15세기에 건립된 유물로 간주되고 있다. 즉 본래의 혜거국사의 탑이었다면 필시 국보나 보물이 되었을 유물이 경기도문화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22호)

     

    아래 사진에서 보듯 망월사 혜거국사탑은 무척 미려하며 또한 드물게 상석을 갖추고 있다. 승탑 앞에 상석을 배치하는 예는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청룡사지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에서도 보인다.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고려 말의 고승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脩)의 부도로, 무학대사나 보각국사는 조선시대에 입적했지만 고려시대 사람들이다.

     

    까닭에 그들 승탑 앞의 상석은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는 게 옳을 터이다. 그리고 혜거국사탑처럼 상석에 승탑 주인의 이름을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은 방식이기도 하다. 충주 청룡사 터에 있는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석등, 상석, 승탑, 탑비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영국사에 있던 혜거국사승탑도 이 같은 형식으로 조영되었을 것이다.

     

    즉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이 혜거국사승탑과 같은 양식으로 (혹은 모방하여) 세웠졌을 것이라 짐작은 아래 지붕돌만 있는 석등, 상석, 승탑이 나란히 배열돼 있는 아래 망월사 혜거탑 사진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후기의 것이라 전기 때의 혜거국사승탑보다 화려해졌을 뿐이다.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최근 국보로 승격되었다. 

     

     

    망월사 혜거국사탑
    상석과 승탑
    성석에 새겨진 '혜거탑' 각자
    석등, 상석, 승탑, 탑비의 일렬 배치를 보여주는 사진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 우리문화신문
    석등, 상석, 승탑, 탑비의 일렬 배치를 보여주는 사진 / 우리문화신문
    고려말에는 탑비, 석등, 상석, 승탑의 순서가 일반화된다.
    탑비, 석등, 상석, 승탑의 순서를 보여주는 회암사 지공선사탑
    조선초까지도 이 형식은 충실히 지켜진다.
    형식에 맞게 꾸며진 회암사 무학대사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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