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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의 마르지 않는 샘ㅡ복정·운룡천·성제정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10. 18. 17:38
서울 성북구 삼청동(三淸洞)은 산과 물과 주민 마음의 세 가지가 맑다고 해 삼청동이라 불렸다는 것이 통설이다. 굳이 한자로 풀이하자면 '산청'(山淸) '수청('水淸) '인청'(人淸)에서 비롯된 삼청(三淸)이라는 것이다. 과거 그 동네 사람들을 접한 적이 없으니 인청까지는 모르겠으나 산자수명한 동네임은 틀림없다.
도교의 3신인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시는 도교 전각 삼청전(三淸殿)에서 삼청동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것이 더 유력하다. 전자가 추상적인 반면 후자는 구체적인 까닭이니, 근방의 소격동이 소격서(昭格署)에서 유래된 것도 이와 같다. 소격서는 삼청전의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서울지명 사전>에 따르면 현 소격동 24번지 일대에 위치했다.
삼청로 삼청파출소 앞 소격서 터 표석 그 삼청전은 초석조차 남지 않아 어디에 있었는가 불분명하다. 용재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고 했지만 삼청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필설을 가하지 않았고, 손곡 이달은 삼청전에 관한 멋진 시를 읊었지만 역시 위치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 '삼청동 북창교와 삼청교육대') 그나마 정조 때의 학자 성해응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기록이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산 동쪽 맥(脈)에 세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아래 삼청전이 있는데 그 옛날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 산 동북쪽으로 물이 흐르고 그 앞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에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 있다."
'삼청동문'의 글자는 현재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삼청동 총리공관 맞은편 절벽에는 가로·세로 70㎝ 크기의 4글자가 아직 뚜렷하다.(전체 폭은 50m 정도임) 그래서 위치는 빼박이라 할 수 있는 바, 여기에 '삼청전은 백운봉 영월암 바위 아래 있었다'는 구전을 삽입하면 제법 정확한 위치가 추적된다. 지금 영월암(影月巖) 각자 바위는 군부대 안에 있어 직접적 확인이 불가하나 과거 테니스장을 확장하기 전까지는 길에 노출돼 있던 까닭에 위치가 쉽게 비정된다. 사진으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삼청동문' 과거 사진 / <동국명산기>에서는 숙종조의 명필 김경문의 글씨라고 말한다. '삼청동문' 각자가 있는 곳 (화살표) 총리공관에서 삼청공원 방면으로 가는 길 / 군부대 앞 11번 마을버스 종점 부근이 영월암 각자 바위가 있는 곳이다. 삼청전은 버스가 도열해 있는 그 바로 뒤에 있었을 것이다. 영월암 각자 /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설이 썼다. '삼청동문' 각자 바위 앞을 흐르던 삼청동천은 백악산에서 발원해 지금의 금융연수원과 국립현대미술관 앞을 지나 청계천(淸溪川)을 만드는 하천으로 청계천의 '청'자가 바로 삼청동천에서 비롯됐다. 현재 삼청동천은 전부 복개되었지만 상류에서는 약간의 푸른 물줄기를 볼 수 있는데, 중간중간 수원(水源)을 이루는 샘물은 지금도 맑은 물을 쏟아내 신비롭기 그지없다.
삼청동 주택가 사이를 흐르는 삼청동천 물론 지금은 식음이 불가한 물로 판정받아 샘물을 긷는 사람이 없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샘물들은 삼청동 주민들의 애용 식음료였다. 더 거슬로 올라가 조선시대에는 몇몇 샘물은 주민들은 먹지 못하고 삼청전이나 소격서 초제(醮祭, 일월성신에 올리는 제사)에서만 쓰거나 혹은 임금 전용의 어천(御泉)으로 사용되었던 바, 그만큼 물맛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샘물이 옛 코리아 사우나 곁에 있던 복정(福井)이다.
복정은 2011년, 종로구에서 남아있는 석축을 바탕으로 옛 모습 대로 조성했다는데 정말로 이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복정에는 지금도 물이 고인다. 복정 안내문 삼청로 4길12-1에 위치한 복정은 복정우물로도 불리는데, 안내문 내용 대로 조선에서는 궁중에서만 사용했고 백성들은 1년에 한 번 정월대보름에만 복정우물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이 물로 밥을 지으면 행운이 따른다는 항설에, 많은 백성들이 복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왕이 특별히 정월대보름에는 복정의 물을 길을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눈물 나는 역대 임금의 백성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샘솟는 물일지라도 무척이나 아까웠을 텐데 말이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말이다)
복정에서 삼청동천이 상류 쪽으로 오면 위에서 소개한 계류 옆으로 운룡천(雲龍泉) 샘이 있다. 부근에는 마당에 오백 살 넘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선 칠보사가 있으며, 과거에는 절 대신 운룡정(雲龍亭)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옥인동의 등룡정, 사직동의 대송정과 등과정, 누상동의 백호정과 더불어 '서촌 5사정(射亭)'의 하나였던 운룡정은 사라졌지만 그 위쪽으로 운룡대(雲龍臺)라고 쓴 각자 바위는 지금도 존재한다. 다만 개인집 안에 있어 볼 수는 없다.
운룡천 / 왼쪽으로 '운룡천' 각자가 보인다. 마모되기는 했어도 매우 잘 쓴 글씨이다. / 유감스럽게도 글쓴이를 알 수 없다. 운룡천 바로 옆에도 샘 하나가 있다. / 샘은 폐쇄되었지만 상시 솟아나는 물이 주변에 작은 소택지를 이룬다. 소택지 이끼를 멋모르고 밟았다가 발을 적셨다. 운룡천 위의 뮤지엄 한미 별관 알고나면 싱겁지만 운룡천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위 뮤지엄 한미 별관 건물 밑을 들여다 봐야 한다. 운룡대 각자 / 고종 때의 무신 채용신이 썼다. 칠보사는 만해(한용운)선사의 스승이었던 춘성스님이 1932년 창건한 절로서, 사적(寺跡)은 일천하나 큰법당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광주 청량산 법륜사에 있던 불상을 1960년대 법륜사 폐사 후 옮겨온 것으로 본래는 1622년(광해군 14) 능양군(훗날의 인조)의 처 조씨(훗날의 장렬왕후)가 왕실 원찰인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했던 불상 중의 하나라고 전해지며, 제작 시기를 뒷받침할 17세기 <묘법연화경>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
칠보사 풍경 백악산 칠보사는 그리 크지 않으나 보물을 소장한 가람이다. 가운데 목조여래좌상이 2018년 보물로 지정됐다. 칠보사에서 위쪽으로 걸음을 약간만 옮기면 삼청로 9길62 주택 아래 자리한 성제정(星祭井)을 만난다. 성제정은 발음이 전성돼 형제우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솟아오르는 샘물 역시 맛이 뛰어나 소격서 초제에 쓰였고 정조 임금의 수라상에도 올랐다고 한다. 이 물은 지금도 여전히 맑은 물이 차오르지만 10여 년 수질검사에서 탈락돼 이후 식음은 할 수 없다.
성제정에서 아래로 곧장 내려오면 순조의 장인이자 안동김문 60년 세도의 서막을 연 김조순의 집 옥호정의 터가 나온다. 옥호정은 전설상의 옥항아리 속 별천지에 지은 집이라는 의미로서, 옥호산방(玉壺山房)이라고도 불렸다. 옥호정은 '옥호산방' 편액이 걸린 사랑채 건물 외에 후원의 죽정(竹亭)과 산반루(山半樓) 및 별원(別園)의 첩운정(疊雲亭) 등에서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았다고 한다. 물론 그 대부분은 인사청탁을 하러 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장춘몽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흔적이라고는 대문의 초석 하나밖에 없다. 초석은 2019년도까지도 대문 좌우의 것이 모두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그나마 하나뿐이다. 그야말로 권력무상이랄까.... 옥호정 내 바위 벽에 있었다는 '옥호산방'의 각자를 누군가 근방의 고급음식점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그런 곳에 갈 처지가 못돼서인지 친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진짜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삼청동 성제정 맑은 물의 성제정 / 수면 표시를 위해 나뭇잎을 띄워 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옥호정도' / 백악산 아래 옥호정을 그렸다. 뛰어난 작품이나 작가는 미상이다. 암벽에 새겨진 '옥호동천'의 글자가 보인다. 이 돌이 옥호정의 유일한 흔적이다. 옥호정 터 표석 표석은 바깥쪽 대로변에 위치한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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