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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6. 22:23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은 본래 수도경비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 흥행 대박 중인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이태신 소장은 바로 이곳에서 집무하다 12.12반란을 맞는다. 그는 이곳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에서 전두광 신군부의 쿠데타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반란군에 가세한 수경사 부하들에 체포되고 마는데, 알다시피 이것은 실제 상황으로 당시 수경사령관이 2010년 타계한 참군인 장태완 장군이다.  
     
    이후 필동 수도경비사령부는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어 관악구 남태령으로 옮겨갔고, 수경사 자리에는 1988년 총 79,934m²(24,180평)의 부지에 남산골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으로서 서울의 유명 한옥 다섯 채가 옮겨져 세워졌다. 그런데 이중의 대부분은 친일파의 가옥이니 민영휘와 윤택영이 살던 집, 그리고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가옥이 버젓이 옮겨져 세워졌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집은 한말의 대표적 친일파이자 갑부였던 민영휘가 살던 집으로, 처음에는 철종의 사위인 부마도위 박영효의 집으로 소개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터에 조성된 남산골 한옥마을 / 본래는 조선헌병대 사령부 터가 있던 곳이다.


    물론 박영효도 한때 그 집에 살긴 했으니 아주 거짓말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옥마을 조성 초기 고의적으로 숨긴 정황이 뚜렷한데, 결국 2010년 이실직고한 후 '관훈동 민씨 가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긴 박영효도 갑신정변 이후로는 친일파가 되었으니 거기가 거기라고도 할 수 있는 노릇이다)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집도 처음에는 순종황제의 부인 순정효황후의 본가라고 소개했다가 지금은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두루뭉술하게 고쳐졌다.
     

     

    관훈동 민씨가옥 사랑채
    관훈동 민씨가옥 안채
    안채는 한때 종로 경인미술관으로 쓰였다.
    관훈동 민씨가옥 별채
    옥인동 윤씨가옥 / 실은 윤덕영의 첩 이씨가 살던 곳이다.

     

    민영휘 가옥은 본래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지금의 경인미술관과 인사동 문화거리가 겹치는 곳에 있었다. 정확한 면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천 평은 넘었을 것으로 여겨지니,(약 2천 평이라는 말도 있고, 1,622평이라는 말도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옮겨진 건물도 행랑채들은 빠지고 중요 건물만 옮겨간 것이다.(98평)

     

    민영휘의 땅에서는 1907년대 중반까지 민익두를 비롯한 후손들이 살았다. 지금도 부근에서는 당시 영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바 민영휘의 자손들이 소유하던 경운동 집 중의 하나가 경운동 66-7에 '민병옥 가옥'으로 남아 있다. 이 집은 원래 소유자의 이름을 따라 '민익두 가옥'으로 불렸는데, 2010년대 중반까지 '민가다헌'이라는 야외예식장을 겸한 전통음식점으로 쓰이다 2015년 서울시 안전검사에서 위험진단을 받고 문을 닫았다. (2016년 서울시에 의해 해체 보수된 후 일반개방이 되지 않고 있다/서울시 민속문화재 15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친일파이자 가렴주구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악질 관료였던 민영휘는 30세에 이미 첩을 다섯씩이나 두었다. 그런데 본처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나이 서른이 되던 해  다섯째 첩인 안유풍에게서 민대식(1882~1951)을 얻었다. 앞서 민영휘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친척인 민형식(1875~1947)을 데려와 일찌감치 양자로 삼았던 바, 이렇게 볼 때 민대식은 민영휘의 진정한 피붙이요, 실질적인 첫째 아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애지중지 키워졌을 것을 당연지사였을 터, 자라서는 아버지의 힘으로 그 무렵 창설된 근왕군인 호위대의 참위가 되었고, 참령으로 예편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와 192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취체역(이사)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동일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을 창설해 대표취체역(대표이사)을 맡았다. 그의 아버지 민영휘가 조선 최고의 갑부였던지라 은행 하나 세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대한천일은행과 동일은행 건물로 쓰였던 종로 광통관

     

    1935년 민영휘가 죽자 민영휘의 실질적인 첫째 아들인 민대식과 호적상의 맏아들인 민형식이 유산 1200만여 원의 상속을 놓고 싸움이 붙었다. 이는 어쩌면 수순을 밟은 것인데, 또 수순대로라면 비록 양자라 할지라도 호적상의 맏아들이 이기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민형식은 성격만 거칠 뿐 시대의 변화에 대한 대응은 젬병이었던 반면, 민대식은 치밀했고 또 아는 것도 많았던지라 전문 일본인 변호사들을 고용해 거의 완승을 거두었다.  

     
     

    북촌의 민영휘 아들 집 / 종로구 가회동 31번지에 있는 이준구 가옥(1991년 서울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될 때의 소유주)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살던 서양식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대지 500평에 건평이 약 180평이다. 1936년 조선인 건축가 박인준이 설계해 이듬해 완공됐다. / 서울한옥포털 사진
    내부 / 서울한옥포털 웹진 사진
    이준구 가옥 대문에서 본 북촌길 / 이 집은 북촌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당시 민영휘의 재산을 환산하면 무려 1조 원대였다. 이에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민대식은,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한일은행 상무로 있던 동생 규식에게 얼마를 나눠주고 나머지 돈으로 재계의 황제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는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책자에는 "재계의 동향을 살펴 실무를 통제하는 일은 그의 독무대"였으며 "재계에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나서서 조정역을 맡아 힘쓰지 않은 일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민대식은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과 경성전기사회 감사역을 지냈고, 조선양조주식회사와 주선견직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및 조선조선금융제도조사위원회 촉탁으로도 활동한 재개의 거물이었는데, 1930년에는 경기도 관선 평의회원으로서 정계에도 진출했다. 그는 돈이 넘쳐났음에도 돈 버는 일은 무엇이든 마다 않고 뛰어들었던 바, 종로2가의 유명한 '엔젤 클럽'은 그가 자신의 일본인 아내에게 차려준 대형 술집이었다. (술집 경영을 며느리가 했다는 말도 있다)
     
    '엔젤 클럽'은 탑골공원 앞에 위치했으며 1,2층은 댄스홀로 사용했고 3층에는 1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연회장이 있었다. '엔젤 클럽'은 동일은행 은행장 민대식의 부인이 운영하는 술집이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여종업원만 70~80명에 이르렀고, 그중 김봉자라고 하는 간호원 출신의 여급이 1933년 봄 이곳에서 만난 젊은 의사 노병운과의 불륜 끝에 한강에 함께 투신자살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 김봉자는 시골 출신의 갸름한 얼굴에 큰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남편 없이 친정어머니 및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다 유부남 의사 노병운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급기야 노병운의 아내가 김봉자를 간통으로 용산경찰서에 고발했다. 그 며칠 후 두 사람은 용산나루에서 하루 사이로 각각 몸을 던졌다. 
     

     

    경남 합천 영상테마파크에 재현된 경성 종로거리 / 왼쪽으로 엔젤 클럽이 보인다.
    반대 쪽 사진

     
    민대식과 민규식 형제는 주식에도 밝아서 1940년 기준 민대식의 주식배당 수입이 26,240원, 1944년 기준 민규식의 주식배당 수입이 36,914원 62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배당금만으로도 연 4억~6억 원을 벌어들인 셈이다. 이에 민대식은 한편으로는 질타의 대상이 됐고, 그 도피책으로 교육사업에 손을 댔다. 그는 제 아버지 민영휘가 휘문의숙(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을 세워 세간의 지탄을 피해 간 것처럼 자신 또한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워 이미지 쇄신을 노렸다.
     
    민대식은 1936년 안유풍이 죽자 '어머니의 유훈'이라며 학교 설립자금을 출연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설립에 들어가 1937년 조선왕실의 별궁인 안국동 안동별궁 4천여 평의 부지를 30만 원에 구입했다. 당시 안동별궁은 옛 황실 궁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들을 몰아내고 경성휘문소학교가 건립됐다. 건물을 따로 지은 것은 아니고 안동별궁의 전각을 활용했던지라 그의 진심이 의심되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교육자로의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경성휘문소학교는 안유풍의 ‘豊' 자와 휘문의숙의 '文' 자를 딴 풍문여학교로 개편되었다.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徽' 자와 '文' 자를 합성했다) 풍문여학교는 광복후 풍문여자중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로 나뉘었으나 풍문여중은 1992년 폐교되었고, 풍문여고는 2017년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한 뒤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변신한 풍문여고 교사
    안동별궁과 풍문여고가 같이 있을 때 사진 / 1965년 운동장 부지 확보와 건물신축을 위해 별궁 전각을 해체했다.

     

    풍문여고가 들어선 후 안동별궁에 있던 정화당, 현광루, 경연당, 정상루 등은 해체돼 다른 곳으로 팔려나갔는데, 정화당은 우이동으로 이축돼 요정 선운각의 부속건물로 쓰이다가 지금은 메리츠화재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현광루는 민대식의 아들 민병도가 운영하는 고양시 한양컨트리클럽 골프장 내로 옮겨졌다가 2009년 문화재청에 의해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로 이축됐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로 이전된 현풍루

     

    민영휘의 무덤은 1935년 강원도 춘천부 동면에 마련됐고 지금도 건재하다. 하지만 1937년 면민들의 강제 성금으로 세워진 민형식, 민대식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는 2008년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의 재산 중 257억 원이 국가로 환수되었고 2017년 민영휘의 후손이 제기한 1492(451)의 강남 세곡동 땅 반환 소송도 패소했다.

     

    그러나 민대식의 아들 민병도가 소유한 남이섬은 소송에서 이겨 살아남았는데, 그 남이섬 유원지 내에 꾸며진 남이장군 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앞서 밝힌 바 있다. (☞ '용산 남이장군 사당과 새남터') 그리고 남이섬 동쪽 끝에 있는 '정관루'라는 목조 건물이 '정상루'의 일부라는 설이 있는데, 조만간 확인해 볼 참이다. 사실로 확인된다면 환수됨이 마땅하다.

     
     

    민영휘의 무덤
    남이섬 가짜 남이장군 묘
    호텔정관루의 문으로 쓰이고 있는 옛 건물 / 트립닷컴 사진

     

    덧붙이고 싶은 말은 월계동 초안산길에 있는 각심재에 관한 것이다. 이 한옥건물은 본래 종로구 경운동 66-8에 있던 민대식의 아들 민병환의 집이다. 민대식은 1930년대에 두 아들인 민병옥과 민병환을 위해 유명 건축가 박길룡에 의뢰해 경운동에 각각 멋들어진 개량 한옥을 지어주었다.
     
    이 집은 경운동 민병옥 가옥과 함께 박길룡의 동일한 설계도로 지어진 집으로서, 현관, 화장실, 욕실 등을 서양식으로 안으로 들이고 안방과 사랑방을 접합시킨 52평의 H자형의 개량 한옥이다. 1970년대 종로 재개발 당시 민병옥 가옥은 천도교회관과 연계돼 살아남았지만 민병환의 집은 철거될 형편이 되었는데, 이를 예안 이씨 종중에서 사들여 선산의 재실이 되었다. 민대식과 박길용의 자취가 녹아 있는 집이다. 

     

     

    월계동 각심재
    경운동 민병옥 가옥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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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