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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뇌하던 재동의 젊은 그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2. 3. 00:03

     

    서울 종로구 재동의 유래는 1453년 계유정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계유정난 그날의 김종서'에서도 말했듯 수양대군의 쿠데타 계유정난은 한명회가 작성한 생살부(殺生簿)가 안평대군 측 인사의 생사를 갈랐다. 수양대군은 그곳의 살부(殺部)난에 적힌 대신들을 왕명(王命)으로 입궐시켜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조극관, 이양 등의 권신을 경복궁 건춘문 안에서 참살했다.
     
     

    경복궁 건춘문

     
    그리고 다시 자객을 보내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등의 문무대신을 살해했는데, 재동은 당시 살해된 자들이 흘린 피와 피비린내를 덮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재(灰)를 가지고 나와 뿌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 잿골, 즉 재동이 갑오개혁 이후 재동(齋洞)이라는 한자명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것을 보면 당시의 재동이 양반가(街)였음을 알 수 있으니, 단종 복위의 역(逆)쿠데타를 시도한 성삼문도 이곳에 살았다.  
     
     

    2023년 재동 거리 / 헌법재판소 앞에서 재동초등학교 쪽을 찍었다. 북촌 탐방에 나선 사람들로 거리가 붐빈다.
    정독도서관 입구의 장원서 터 표석과 성삼문 집터 표석

     
    지금 재동초등학교와 헌법재판소가 있는 그 재동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양반가였던 듯 당시 세도가이던 풍양 조씨들이 모여 살았다. 1763년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백성들의 구황(救荒)을 도왔던 문익공 조엄이 그곳에 살았고, 천주교 탄압으로 악명 높던 조만영과 조인영도 그 동네 인물이다. 두 사람은 모두 문익공의 손자로, 그중 조인영은 1817년 추사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비봉(碑峰)에 올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사람이기도 하다. 

     
     

    문익공 조엄(1719~1777)
    마침 집에 고구마가 있어 찍어 올린다. / 고구마는 1763년 조엄이 통신사로 갔을 때 가져왔는데, 그의 저서 『해사일기(海槎日記)』에 따르면 고구마의 명칭은 일본인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조인영(1782~1850)
    북한산 비봉 복제비 / 진흥왕순수비는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본래의 비문은 물론이요 '丁丑 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 同來 審定殘字 六十八字'(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 남은 글자 68자를 조사하여 정하다)라고 새긴 옆면 글자도 복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순수비의 옆면 글씨

     

    또 재동에는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가 살았다. 알려진 대로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의 손자이다. 그 박지원은 일찌기 "조선의 지독한 가난을 따지면 그 원인은 모두 관료들에게 있다"라고 일갈했다. 손자 박규수가 시대의 횃불이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터, 그는 평안감사로 있을 시절 무고한 양민을 해친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 호를 응징했지만, 천주교 탄압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자신이 다스리던 평안도에서는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았다. 아울러 조선 개화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니, 훗날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의 신사상(新思想)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채에서 나왔소. 나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내 백형(박영교)은 재동 환재 대감 집에 모이곤 했소. 우리는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에서 양반귀족들을 공격하는 연암의 글로부터 평등사상을 배웠소." (박영효씨를 만나다', 이광수 1931년 <동광>19호)
     
    그 재동 환재 대감(박규수) 집 담 하나 너머가 홍영식의 집이었다. (당시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근방의 홍현(紅峴)에는 김옥균과 서재필이 살았으며, 멀지 않은 안동별궁 부근에는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이들은 박영효의 할아버지이자 대표적 개국론자였던 박규수에게 사사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는데, 그들은 모두 반가의 자식들로서 같은 동네에 모여 살며 '개화'(開化)했다. 
     
     

    환재 박규수 (1807~1877)
    헌법재판소 안의 박규수 집터와 제중원 터 표석 / 가운데는 조각가 최의순의 '헌법의 수호자' 상
    박규수 집터 표석
    650년 된 헌법재판소 내 백송 / 박규수 집 사랑채 뒤뜰에 있었다는 바로 그 백송이다.
    제중원 터 표석 /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홍영식 일가는 이곳에서 동반 자살했다. 이후 폐허가 된 집을 고종이 의료선교사 알렌에게 하사하였고 서양의료병원 제중원으로 사용됐다.
    제중원으로 사용될 때의 홍영식 집 사랑
    멸문된 홍영식 일가 / 홍영식(오른쪽에 두번째)의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영의정이던 아버지 홍순목(중앙)은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살했다.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주역>의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나온 말로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를 궁구, 경영하여 일신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라고 한다. 재동의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개화파라고 부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은 조선을 구태(舊態)로부터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고, 그리하여 깜깜이 나라로부터 탈출하여 저 서구와 같은 근대국가로 나아가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평소 김옥균이 했던 다음 말로도 알 수 있다.  
     
    "일본이 영국을 배워 부강해져 지금은 동양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소. 지금 구라파(歐羅巴)에서 영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인즉 우리는 프랑스를 배워 부강해져야 하오."
     
    김옥균은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을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먼저 근대국가에 반열에 들어선 일본을 모델로 근대화를 이루려 하였던 바, 자신의 집 옆에 살던 18살 서재필을 일본 도야마(戶山)사관학교에 유학보냈다. (서재필은 김옥균보다 15세 연하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즈음해 청년들을 프로이센의 사관학교에 유학시켜 강병책(强兵策)을 배우게 하였지만 당대의 조선에서는 그럴 형편이 못됐던 터, 일본 육군의 도야먀 학교에 조선 생도 40명을 위탁교육시켰다. 서재필은 그들의 대표였다. 
     
     

    현 정독도서관 내의 김옥균 집터. 행랑채가 딸린 거택이었다.
    갑신정변을 논하던 집터(종로구 화동 260번지)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김옥균의 집 옆에는 서재필의 집이 있었다.
    서재필의 집 터로 추정되는 곳 / 김옥균 집의 위쪽에 있었다 하니....
    김옥균의 집에서 안동별궁으로 가는 길
    김옥균이 수없이 걸었을 길이다. / 고택 앞의 표석은 조선어학회 터 표석이다.
    안동별궁으로 가는 길에 안동교회가 있다. / 1909년에 안국동 김창제의 집에서 시작된 장로교회로, 구한말 외교관이던 박승봉이 기와집을 희사해 교회가 건립됐다.
    재현된 옛 안동교회
    안동교회 옆 덕성여중고 자리에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그 바로 아래가 안동별궁으로 서광범은 그곳에 불을 질러 갑신정변의 서막을 열고자 계획한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안동별궁 사진 /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정식 명칭은 '안국동 별궁(安國洞別宮)'이었으며, '동 별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서울공예박물관이 세워졌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훗날 돌아와 독립협회를 세웠지만 그동안 한국말을 다 잊어버려 내내 영어로 대화했다. 그리고 회고록이 대필된 말년에는 기억마저 희미해져 갑신정변 때의 정황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지만, 김옥균에 대해서 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내 외숙 중 벼슬이 판서에 이른 김성근이라는 자가 있었소. 김옥균은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위인 연장인데, 내 외숙과는 일가지간이라 가끔 놀러왔소. 나도 외손이지만, 외편으로 친척이니까 김옥균의 집에도 가끔 간 일이 있소. 그래서 알게 되었고, 또 내가 장원급제하였다고 치하도 해주고, 나를 끔직히 알아주었기 때문에 가까워진 것이오. 그로 인해 박영효도 알았소. 서광범은 나에게 아저씨뻘이 되오. (서광범은) 김옥균보다는 나이가 한참 아래지만 (김옥균과는) 매우 친한 친구로 지냈소. 아무튼 그때 내가 제일 어렸지만 늘 그들과 같이 다녔소."
     
    김옥균의 웅지에 담뿍 반한 서재필은 훗날의 '큰일'을 생각하며 김옥균이 권한 도야먀 학교 유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귀국 후 어영대장 한규직의 지휘 하에 설립될 조선 최초의 사관학교 교관이 되어 혁명에 참가할 생도들을 키우려는 생각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과 공유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측근이었던 한규직은 뭔가를 눈치챘는지 사관학교 설립 계획을 백지화했고, 오히려 박영효가 양성하던 신식군대를 고종의 친위대에 강제 편입시키고 박영효의 군권도 빼앗아 버렸다. (한규직은 갑신정변이 발발한 1884년 12월 4일 밤, 계동 경우궁 앞에서 서재필에 살해당한다)
     
    서재필은 이것이 자신과 도야마 학교 출신자들이 쿠데타에 가담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고, 김옥균이 거사를 앞당기는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 2편으로 이어짐 
     
     

    서대문 독립공원의 서재필 동상
    계동 경우궁 터 / 갑신정변 때 개화파가 왕과 왕비를 이처시킨 자리이다.
    경우궁 터 표석 앞에선 본 현대사옥 / 경우궁 자리는 이렇게 바뀌었다. 개화파들은 갑신년 12월 4일 밤 민영목, 한규직 등의 민씨 이파를 왕명으로 불러들여 이곳에서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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