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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동에 서 있는 삼한갑족 이회영의 초라한 흉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29. 14:16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금융 본사(옛 외환은행 본점) 앞에는 이곳에 옛 장악원(掌樂院) 자리였음을 말해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의례 등의 행사에 쓰이는 음악, 노래, 무용을 담당한 예조 관할의 관청으로 요즘의 국립음악원쯤에 해당한다. 별다른 표시는 없지만 그 외도 이곳에는 많은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1785년 이곳에서는 이른바 '을사 추초 적발사건'이 일어났다. 추조(秋曹)는 형조의 다른 명칭으로 형벌이 늦가을 서리처럼 매섭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85년 을사년 형조의 포졸들이 명례동 종현(鐘峴)에 위치한 역관 김범우의 집을 불시에 덮쳤다.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것이 혹 도박판이라도 벌어졌는가 의심한 것인데, 알고 보니 천주교인 모임이었다. 이에 이승훈, 김범우, 권철신 권일신 형제, 정약용 형제 등이 붙잡혀 갔던 바, 당시 천주교는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학행(學行)과 가문이 출중하다'하여(한마디로 양반이라 하여) 풀려났고, 이렇다 할 배경이 없던 김범우만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김범우는 이 땅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바, 1892년 그의 집터 부근에 명동성당이 세워지는 연유가 되었다. (박해 사건이 일어난 웬만한 장소에는 죄 안내판을 세우고 다니는 한국 천주교에서 이곳은 왜 그냥 놔두는지 모르겠다) 
     
    ㅡ 1908년 이곳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졌다. 흔히 '동척'(東拓, とうたく)이라 불렸던 이 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의 선진 농업을 전수한다는 미명으로 설립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조선의 토지수탈과 자원수탈의 첨병 역할을 한 기관으로, 특히 빼앗은 토지에 대해 50%가 넘는 과다한 소작료를 부과한 악행으로써 악명이 높았다. 
     
    ㅡ  1926년 이곳에서 나석주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던 나석주는 1926년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동척을 폭파하기 위해 잠입했다. 그는 또 다른 목표인 남대문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했고, 이어 동척에도 폭탄을 투척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재차 불발했다. (폭탄이 폭발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지 않으나 웨이하이웨이에서 배를 기다리며 지하실에서 머물 때 그곳의 습기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이어 나 의사는 제보를 받고 출동한 혼마찌(本町) 경찰서의 도시(士師), 요코타, 노구치, 아오키, 후루카와, 박용하 순사 등과 총격적을 벌이며 다수의 일경들을 사상시켰다. 하지만 황금정 2정목 삼성당 약국 앞에서 총을 맞고 붙잡혔는데, (현 동상 있는 곳의 맞은편) 이후 곧 총독부병원(현 서울대학병원 의학역사전시관)에서 절명했다.   
     
    ㅡ 1960년 이곳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선언문 낭독하고 국회의사당으로 가 농성을 했다. 이후 학생들은 의사당 농성을 풀고 내무부 앞을 지나다 경찰들의 총격을 받았다. 동척 건물은 해방 후에는 국방부 정훈국에서 사용하다 한국전쟁 후 내무부 건물이 들어섰는데, 건물을 지키던 경찰들이 해산을 강요하다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발포를 한 것이었다. 경찰의 총질로 다수의 고대생이 사상했고 이것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하나금융그룹 본사 건물

     

    여기서 바로 옆의 유안타증권 골목으로 들어가면 명동 YMCA 건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 건물의 주차장 앞에 작은 흉상과 표석이 서 있다. 흉상의 주인공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지는 우당 이회영(1867~1932)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고 함께 만주로 간 그 6형제들(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은 조선시대 영의정 6명과 대제학 2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선조 때의 명재상 백사 이항복이 그의 조상이다. 아버지 이유승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당시 그들 형제는 한성부 명례방 명례동, 즉 지금의 명동에 살았는데, 현  YMCA 일대의 땅이 모두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 살던 집의 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이 강제 합병당하자 명동과 남양주의 땅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많은 독립투사들을 길러낸 만주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이 주축이 돼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로서 1930년대까지 배출한 졸업생은 무려 3,500명이나 된다.
     
     

    우당 이회영 흉상과 그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

     
    이회영의 며느리 조계진은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외동딸이다. 이것만 봐도 그는 특권층으로서 한 평생을 편히 살 수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부와 특권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떠났다. 그들 형제는 급하게 재산을 처리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했는데도 약 40만 원을 모았는데, 당시 소 13,000마리 값이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으로, 제 값대로 받았다면  2조 원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 돈을 만주 한인촌 건설 및 신흥무관학교 건설과 유지비로 썼다.
     

     

    남양주 '리멤버 1910' 내의 6형제 초상 / 이회영의 바로 아래 동생 이시영(왼쪽에서 두번 째)은 조국 광복 후 이 땅에 돌아와 대한민국의 부통령이 되었으나 나머지 5형제는 모두 타국의 고혼(孤魂)이 되었다.
    명동의 이회영 형제의 집 / 현재 공시지가로 땅값만 몇 조원이었을 것이라 한다. (남산 이회영기념관 자료)

     

    언필칭 삼한갑족(우리나라 최고 가문)이라 불리던 이회영의 집안이었다. 게다가 그가 보유했던 부동산의 소재지가 명동이었던 바, 제 재산을 지키고자 들었다면 아마도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조국을 위해 모든 물욕을 버리고 전 재산을 바쳐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기원하며 64세까지 싸웠다. 64세는 이회영이 사망한 나이로, 그는 만주 침략의 선봉장인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1932년 11월 초, 중국 상하이에서 영국 선적 남창호에 올랐다가 체포됐다.
     
    이회영이 노구(老軀)에 만주행 배를 탄 것은 이 위험한 일을 청년 동지들에 맡겨 희생시키느니 자신이 직접 가서 거사를 결행하겠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을 떠나기 전 둘째 형 이석영을 찾아가 인사한 것이 화근이 됐다. 마침 그 집에 있던 연충렬과 이태공이라는 청년이 그 말을 듣고 일본 경찰에게 밀고한 것이었다. 이회영이 탄 남창호가 다롄을 향해 출발했을 때 갑자기 일본 경비선 두 척이 속도를 내며 달려와 배를 멈춰 세웠다.
     
    승선한 일본 경찰들은 곧장 배 밑바닥의 4등 선실로 내려가 중국인 복장을 한 노인을 체포했다. 이회영 체념한 듯 순순히 따랐고 곧바로 다롄수상서(大連水上署) 유치장에 구금됐다. 이후 곧 뤼순(旅順) 감옥으로 옮겨진 이회영은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니, 불에 달군 쇠로 온 몸이 지져졌고 몽둥이찜질에 허리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그는 자복하지 않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경찰은 용의자가 감옥 안에서 자결했다고 발표했다.  

     

     

    남양주 '리멤버 1910' 내에 재현된 뤼순 감옥

     

    그가 죽은 날은 1932년 11월 17일로 체포된지 12일 만이었다.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고문은 더욱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딸 규숙이 시신을 인도하러 갔을 때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타파오(大袍, 중국 의복)도 피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이회영을 고발한 연충렬과 이태공은 훗날 백정기와 엄형수에 의해 처단됐으나, 그렇다고 이회영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이역만리에서 옥사하거나 아사하거나 행방불명됐고, 오직 그의 동생 이시영만이 돌아와 부통령에 올랐다. 그 형제들이 받은 유일한 보상이었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중국에서 단벌 할머니라고 불렸는데, 귀국할 때도 가진 것이라곤 몸에 걸친 옷 한 벌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남편 흉상이 명동 금싸라기 땅에 서 있는 것이 뭔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또 이유 없는 울분도 느껴진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 우당 이회영
    이관식 저 <우당 이회영 선생 실기> / 남산 이회영기념관 전시자료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쓴 <서간도 시종기> 육필원고 /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 베이징 텐진 망명시절, 국내 잡입 활동, 이회영의 사망과 아들의 투옥에 관한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이회영기념관 전시자료)
    이회영기념관 전시실 입구
    이회영 며느리 조악이에게 주어진 혜택 (이회영기념관 자료)
    이시영의 귀국 / 홀로 귀국한 이시영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오른쪽) 가운데 김구 선생 앞의 소년이 전 국정원장 이종찬으로, 이회영의 손자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했던 모신 소총과 아리시카 88식 소총 (이회영기념관 전시자료)
    이회영기념관 입구에 재현된 신흥무관학교 이미지
    남산 이회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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