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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II ㅡ 연지・효제동의 한족(漢族)과 서양 선교사들, 그리고 하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30. 06:34

     
    이번 III편에서는 분위기를 바꾸어 동촌에 살던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지금도 집이 남아 있기도 하거니와 구한말 종로구 효제동과 연지동 일대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몰려 살았고, 그 이전에는 명·청 교체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한족들이 살았다. 

    연지동은 문자 그대로 연지(蓮池)가 있던 데서 비롯됐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마련된 동・서・남쪽의 연못 중 동지(東池)에 해당하는 큰 연못으로서, 숭례문 남지(南池) 및 돈의문 밖의 서지(西池)에 비견된다. 하지만 남지나 서지와 달리 전하는 그림이나 사진이 없어 위치나 형태를 알 수 없고 그저 동네 이름만이 남아 있다. 
     
    효제동은 앞서 I편에서 말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에서 비롯되었으니 동촌에 조양루와 석양루를 나란히 짓고 살던 두 형제의 우애에 부왕(父王) 인조에 대한 효성까지 더해져 효제동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 '동촌에 살던 사람들 I - 이화장·조양루·석양루')
     
     

    1911년 흥인지문 문루에서 본 연지동과 효제동 / 길 오른쪽 동네다.
    2024년의 연지동과 효제동 거리
    서양식 이층 주택 7채가 나란히 서 있어 선교사의 언덕'으로 불리던 연지동 / 기와지붕 너머로 7개의 이질적 주택이 포착된다. 1910년대의 사진이다.
    연지동 선교사의 집 / 7채 중 1채만 남았다.
    경기감영도 속의 경기중군영괴 서지(오른쪽)
    서지의 연꽃과 천연정 / 왼쪽으로 경기중군영 건물이 보인다.

     

    연지동 일대에는 또 명인촌(明人村)이라는 지명도 전하는데, 명나라 멸망 후 망명해 온 황공(黃功), 풍삼사(馮三仕), 옥문상(玉文祥), 왕미승(王美丞), 양복길(楊福吉), 배삼생(裵三生), 유계산(柳溪山), 정선갑(鄭先甲) 등의 중국인이 살았다. 이들이 건너왔을 때는 효종 즉위 초로, 당시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효종은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우대하였으니 효종은 자신의 잠저인 어의궁(=조양루) 북쪽의 땅을 할양해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주었다.
     
    명나라 유민들은 이곳에 100여 호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말 원·명 교체기에 건너온 진리(陳理)나 명승(明昇) 등의 후손처럼 결혼을 하여 후손을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리는 양산진씨의 조상, 명승은 연안명씨의 조상이 되었다. 탤런트 명세빈이 후손이다) 이들 명나라 유민들은 주로 군인 등의 관직생활을 했으며 명나라 왕씨(王氏) 가문의 이주 생활 기록인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이 전해진다. 이들이 살던 곳은 명인촌(明人村) 혹은 황조인촌(皇朝人村)이라 불렸다. 
     

     

    왕이문의 후손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황조유민록'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 조선에 표류한 하멜 일행도 이곳에 살았다. 1653년 8월, 폭풍우로 인해 제주도 해안에 난파된 36명 하멜 일행은 이듬해 5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명인촌에서 살며 매일 고관대작들의 집을 방문해 그 집 식솔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다. 이는 임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그들을 처음 마주한 효종은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명색이 북벌을 주창한 효종임에도 그의 서양인 활용도는 고작 그 정도였다. <효종실록>을 보면 "그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었으므로 금려(禁旅, 화기도감)에 편입하였다"고 돼 있다. 그래서 예전 검인정 국사 교과서에는 효종이 북벌을 위해 하멜 일행을 화기도감에 배속시켜 업그레이드된 조총과 화포를  개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이다. 그들은 화기도감에 배속되었지만 한 일이라곤 코로 퉁소를 불고 춤을 추는 일뿐이었다. (<효종실록> 효종 4년 8월 6일 기사)
     
    <효종실록>의 "새로운 체제의 조총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하멜 일행에게 얻은 조총을 훈련도감에서 모방해 만든 것을 말함이다. 그렇게 광대로 살던 그들 하멜 일행은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8명이 탈출해 목적지인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표류한 지 13년째 되는 1666년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는데, 11명은 이미 죽었고 다른 곳에 배치된 일행들에게는 알릴 방도가 없어 나머지 8명만 탈출했다. 그중에 헨드릭 하멜이 있었다. 그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래의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하멜 표류기)를 썼다.
     

     

    하멜 표류기 초간본

     
    이후 230년 후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이 명인촌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조선에 선교를 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들로 원래는 정동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에 자리를 잡았으나 조선정부의 경운궁(덕수궁) 확장계획에 따라 부지를 대한제국에 매각하고 연지동 구릉지로 옮겼다. 그리고 일대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던 바, 1894년 연동교회를 시작으로 1895년 정신여학교, 1901년 경신학교가 지어졌다.
     
    경신학교(경신고등학교) 자리에는 지금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정신여학교(정신여고)도 송파로 옮겨가 지금은 없지만, 당시는 연지동 전체의 60.5%인 1만 8972평과 효제동 1430평에 대규모 선교단지가 조성되었고, 일대는 '선교사의 언덕' (missionary ridge)이라 불렸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정동의 제중원 사택에서 여의사 엘러스(Annie J. Ellers)가  한 명의 고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는데, 1895년 연지동으로 옮겨와 연동교회 옆에 교실과 기숙사 겸용의 'ㄱ'자 한옥을 마련했다.
     
    경신학교는 1886 호러스 언더우드가 정동에 고아들을 모아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897년 폐교되었다가 1901년 게일(J. S. Gale)이 연동교회 예배당 부속 가옥에서 신입생 6명으로 중등과정을 시작하며 재개교하였고, 1905년 고종으로부터 경신학교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경신학교는 이후 1941년 교사를 경기도 양주군 정릉리(현 성북구 정릉동)로 옮겼다가 1955년 종로구 혜화동 현 위치로 재이전했다.  
     
    연동교회는 1894년 선교사 무어(S. F. Moore)가 연지동의 작은 초가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정초(定礎)로, 1900년 게일(J. S. Gale)이 부임한 후 크게 성장했다. 특히 연동교회는 천민 출신 장로를 배출했으며, 교인들 또한 상인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는 혜공(신발 제조공)·양혜공(서양 신발 제조공) 등 천민으로 취급받던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연동교회는 종각의 숭동교회와 함께 천민 출신에게 문호를 개방한 첫 사례에 속한다.
     
    아울러 이곳 선교단지에 거주하던 북장로회 소속 딘(M. Lillian Dean), 하트니스 (Hartness E. Marion) 등의 선교사는 신의경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를 지원했고, 김마리아가 이끄는 애국부인회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제공했던 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했다. 이들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펼쳤으니, 지금 일대에 한국기독교회관, 여전도회관 등의 중요 개신교 관련 건물이 서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1960대 이후 지가 상승과 함께 일대의 땅이 무분별하게 매각된 점이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비슷한 연혁을 지닌 대구 청라언덕으로, 그곳 선교사의 집에 달라붙은 푸른 담쟁이(청라)는 '동무생각'이라는 가곡에도 등장하며 사시사철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지만, 서울 연지동 선교사의 언덕은 그저 황량하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옛 정신여고 본관 뒤에 자리한 오래된 회화나무가 그늘과 함께 인근 회사원들에게 아늑한 흡연장소를 제공하는 점이라 할까... 아무튼 이곳 회화나무 옆 끽연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연동교회
    옛 정신여고 본관
    본관 뒤 회화나무
    회화나무와 김마리아 흉상
    순국열사 김마리아 상
    김마리아가 영도한 애국부인회가 일본경찰의 수색을 받았을 때 이곳 회화나무 고목 구멍에 태극기와 비밀문서, 가르침이 금지됐던 국사교과서 등을 숨겼다.
    일대는 김마리아길로 명명됐다. / 이 표지판은 길에서도 보이는데 표지판 뒤쪽 사잇길로 오르면 위 회화나무와 선교사의 집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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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