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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영동의 검은 기억 II - 남영동 대공분실에 기생한 악마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8. 18:16

     
    남영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71길 37에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경찰청이 국가안보와  관련된 자를 조사하기 위해 만든 여러 대공분실(對共分室) 중의 하나로, 지금은 남영동 대공분실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그곳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이다.
     
     

    1976년 완공 무렵의 남영동 대공분실

     
    처음의 뜻은 대공분실, 즉 공산주의와 관련된 조사를 하기 위한 기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건물은 2005년까지 경찰청 안보관련 기관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학생과 투사들이 이곳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85년 김근태 고문 사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을 지냈던 김근태는 민청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며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구금됐다. 그곳에서 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당시 경감)을 비롯한 경찰관계자에 23일간 지속적인 고문을 당했는데, 훗날 김근태는 상대방의 이름은 모르지만 명석한 머리로써 고문 가해자의 인상착의를 하나하나 기억해 내 고발했다. 1987년 출간한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에서 그는 당시의 고문을 이렇게 회상했다.  
     
    소리를 지르면 지른다고 전류를 강하게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깨물면 혀를 빼라며 또 전류를 높인다. 그러면 이들의 목표인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한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통보다 두려운 것은 그 뒤에 몰려오는 공포로서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파고들어 와 아른거린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한 뜨거운 불인두가 지져져 피를 바싹 말려버리는 듯한데, 모든 핏줄을 뒤틀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끊어버린 것 같았다. 
     
     

    남영동 대공분실 보수공사 전 사진
    현재는 민주인권기념관 건립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는 또 머리가 뒤로 젖혀진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후 물을 따라 숨을 못 쉬게 만드는 물고문도 소개했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덮여씌웠던 수건에 밴 다이알 비누 냄새에 질려 다시는 그 비누를 쓰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며, (이 일화는 몹시 와닿으니 후각의 기억은 어떤 시청각적 기억보다 강하다) 충치 치료를 위해 치과의 치료용 의자에 앉았다가 드릴 돌아가는 소리에 그대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억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고스란히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크게 기사화했으며 세계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는 훗날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법정에 세우는 계기가 됐다. 이후로도 김근태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으로서 활동하다 1990년 또다시 구속됐다. 이처럼 계속된 고난은 결국 파킨슨씨 병을 유발했고 고문당할 때 얻은 뇌정맥혈전증이 악화돼 2011년  향년 64세로 사망했다.
     

    포승줄에 묶여서도 당당했던 김근태
    1988년 출소 직후의 김근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결국 이렇게 되어
    이후 징역 7년형을 받았으나
    프로필처럼 목사로 부활했다.

     
    이근안에게 당한 사람들은 모두 악마와의 첫 대면을 잊지 못한다. 그는 취조실에 들어서면 무표정한 얼굴로  가방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실었는데 그때부터 무지무지한 공포가 시작됐다고 했다.  운동화 착화는 곧 고문이 가해진다는 신호였다.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고발당한 후 수배되었고, 붙잡혀 7년 복역 후 만기 출소했다.
     
    이후 평소의 독실한 신앙심을 살려 목사로서 제2의 인생을 걸었는데, 그러면서 "고문도 예술이다", "나는 애국자"와 같은 발언을  통해 스스로 목회자의 탈을 쓴 악마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김근태 사망 이후 기독교계 시민 단체들이 목사안수 철회 서명운동을 벌였고 결국은 교단으로부터 목사임명이 취소되었다. 그 악마는 아직 생존해 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이라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체포한 것이다.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운이 어디 있느냐는 신문을 받다 극심한 물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담당경찰은 사건을 발표하며 "취조 도중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악마성 발언으로써 세인의 공분을 샀고, 부산시청 하급공무원이었던 박종철 군의 아버지는 "종철아.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는 이별사로써 또 한번 사람들을 울렸다. 그 오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종철 군의 아버지 박기정 씨는 지난 2018년 8월 별세했다. 
     
     

    화장된 유골이 뿌려진 강물에 뛰어들어 물속의 재를 움켜쥐며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하는 종철 군 아버지 / 영화 '1987'에서.
    "종철아.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그와 같은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가 경찰의 과거사 청산 사업으로 경찰청인권센터가 됐다. 이후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로 관리권을 위임받아 민주인권기념관으로의 전환을 발표했는데, 아직도 공사 중이다. 올해 2024년 정식개관할 예정이라는데 좀 지루한 감이 있다.  한편, 그 과정에서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이다.
     
    한국 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벽돌을 사용한 이 건물은 당시는 '국제해양연구소'로 위장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조사실은 5층에 있었는데, 밖에서 보면 유독 5층의 창문들만 좁고 길게 배치되어 있다. 고문에 시달리던 피해자들의 탈출이나 자해를 막기 위해 머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 여타 수사기관과 달리 지하실이 없고 조사실을 건물 5층에 배치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창문 / 붉은 점(●) 있는 곳 / 1983년 5층이던 건물을 7층으로 증축했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건물 뒤편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중간층을 거치지 않고 바로 5층 조사실로 올라갔는데, 반경이 채 1m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 곧바로 5층까지 돌아 올라가게끔 만든어진 통로는 붙잡혀온 피의자들에게 처음부터 극도의 공포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 독특한 계단 구조는 그와 같은 공포감과 더불어 1~4층에 드나드는 어떤 인물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하며, 5층  복도를 따라 마주보는 방들의 출입문은 서로 어긋나게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고문받은 사람이 나가면서 맞은편 방의 사람들에게 일체의 수신호를 전할 수 없게끔 설계됐던 것인데, 물론 건물의 악마들을 위한 배려였다. 까닭에 이 건물은 '천재가 악마를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도 불린다.
     
     

    유명한 대공분실 나선형계단

     
    김수근은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지만 김현옥 서울 시장 이래로 많은 관급공사를 맡아 설계를 했다. 그래서 독재정권과 친한 건축가라는 오명이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이는 획일주의적 건설을 비판하다 추방당한 김중업과 비견되어 본의 아닌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수근은 서울역  동쪽의 유선형 고층빌딩 '게이트웨이 타워' 설계를 마지막으로 1986년 55세로 영면했고, 1978년 11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김중업도 비슷한 시기인 1988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후면
    김수근이 설계한 동자동 게이트웨이 타워
    김중업이 설계한 안국동 안국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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