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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고개 순교지와 부근의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의 흔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6. 22:25

     
    한국 천주교에서 조성한 서울 용산구 당고개 순교성지는 새남터 순교성지나 서소문 순교성지와 달리 천주교인의 순수한 순교성지라 할만하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기해박해의 막바지인 1839년 12월 27과 28일(음력)에 걸쳐 천주교도 10명이 이곳에서 처형된 것을 기려 성지로 꾸민 곳이다. 순교자들의 이름은 박종원, 홍병주·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최영이, 이문우이고, 나중에 이성례 마리아가 추가로 순교했다.
     
    원래는 위의 교인들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당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설 명절을 앞둔 때였고, 이에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명절 대목 장에 방해가 되니 형장을 바꿔 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바, 당고개 야산 언덕에서 형이 집행되었던 것이다. 내가 '순수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도 그 때문이니, 서소문 형장은 비단 천주교도뿐만이 아니라 사육신이나 홍경래 난의 무리들, 동학란의 무리들이 처형된 곳이기 때문이다.   
     
    새남터 형장 역시 남이 장군을 비롯한 국사범들이 처형된 전래의 형장이었다. 그런데 그간 천주교에서 이 장소들을 순교성지로 만들어 서소문 형장과 새남터는 특정종교의 성지가 되었고, 그 바람에 나머지 역사는 가려져버렸다. 게다가 새남터 형장에 지어진 순교성지 기념성당은 새남터 자리를 꽉 채워 지어진 까닭에 새남터의 흔적과  역사성을 덮어 가린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당고개 순교성지와 새남터 순교성지

     
    그런데 따지자면 당고개 형장에서도 위 천주교인만이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선조실록>에 기록된 한현의 아들 한의연이 끌려와 죽은 당고개(堂古介)가 바로 여기였을 것이다. 한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혁혁한 활약을 펼쳤으나 왕실의 서얼인 이몽학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실패해 충청도 면천에서 참살당하고, 그의 아들 한의연 외 33명은 당고개에서 처형당했다. 하지만 한의현 등은 듣보잡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문제가 안되었다.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새남터 형장?

     
    그러나 새남터와 서소문 형장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 측에서 전래의 새남터 형장을 주문모(1801년), 김대건 신부(1846년) 외 11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한 곳이라는 명목으로 장소를 독점하여 1987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을 준공시켰다. 서소문 형장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곳에 있던 고려 윤관 장군의 동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넓은 공원이 모두 천주교 순교성지가 됨으로써 역사의 현장 서소문 형장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성지화 작업에 천도교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아래의 사진은 압송되는 전봉준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사진가 무라카미 텐신이 1895년 1월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돼 근방의 시장에 효수된 동학란 지도자의 수급을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1895년 2월 8일자 일본 <메사미신문>의 삽화로 재구성되어 쓰였는데, 장소와 인물이 명시돼 있어 서소문 형장에서 동학교도에 대한 처형이 집행된 명백한 증거가 된다. 아래 첫 번째 사진이 텐신이 찍은 최재호와 안교선의 수급이고, 두 번째 사진은 1893년경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소문 형장에서 찍은 김개남으로 추정되는 수급이다. 
     
     

    안재선과 최재호의 효수사진 / 출처 에펨코리아
    김개남으로 추정되는 사진

     
    다만 앞서 말한 대로 2011년에 조성된  당고개 순교성지는 그 과정에 있어 별다른 시비가  없었다. 문제라면 2008년경 이곳 당고개 주위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옛 당고개를 비롯한 야산들이 모두 밀려 예전의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점이다. 그래서 지금은 옛 모습을 짐작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는데, 형장은 지금의 장소보다 용산전자상가 쪽이 더 유력해 보인다.  

     

    당고개 순교성지 입구
    당고개 순교성지 안내문
    순교성지 기념물

     
    이곳에는 심순화 작가에 의해 꾸며진 위 10명 순교자의 모자이크 상이 세워져 있다. 그중 9명은 성인 시성이 된 자들이지만 유독 이성례 마리아만은 그보다 격이 낮은 복자이다. 그래서 더욱 유심히 보게 되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성례 마리아 외 9인은 이미 1925년에 복자(福者)로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이성례는 제외되었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최양업의 어머니이기도 한데, 최양업의 동생인 어린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자식들의 고통에 배교하여 풀려난 과(過)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다시 잡혀가 순교하였음에도 일시 배교하였다 하여 복자 시복에서도, 성인 시성에서도 배제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 얘기를 듣고 천주교 측의 편협함에 혀를 찬 적이 있다. 그러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즈음해 뒤늦게 복녀로 시복되었지만 성인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남의 집의 일이긴 하지만 그 뒤끝이 못내 개운치 못하다. 
     
     

    이성례 마리아 상

     
    근방에는 이보다 오래된 천주교의 역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진영이 원효로 일대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영이 갈월동 부근에 있었던 것인데, 천주교 장수인 고니시의 진영에서는 웅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가 올려졌을 것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였던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도로 그의 부하들도 전부 천주교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니시는 군종신부로 스페인인 세스페데스 신부를 데려왔는데, 이에 고니시가 수축한 경남 웅천왜성 꼭대기 부근에는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안내팻말이 천주교 마산교구 성당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그 어처구니없는 팻말이 있나 모르겠다) 그런 미사가 원효로 고니시 유키나가 주둔지에서도 행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원효로 4가 용산문화원 뜰에 있는 ' 심원정 왜명강화지처'(心遠亭 倭明講和之處)의 비석은 구한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라는 일본인에 의해 조작된 거짓 역사이다. 과거 이곳이 고니시 부대의 주둔지였음은 분명하나, 이곳에서 일본군과 명나라 군 사이에서 강화회담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 비석은 조작된 유물임을 앞서 밝힌 바 있다. (☞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 임진난 왜군, 근대 일본군과 미군, 용산강 그 오욕의 강물을 넘어')
     
     

    용산문화원 뜰에 있는 '심원정 왜명강화지처' 비석

     
    가토 기요마사 주둔했던 곳 부근 당고개 언덕에는 일제강점기 때 가토 신사가 세워졌다. 일본인이 발행한 <경성신문>에 따르면 가토신사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뿐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포로가 된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합사되었다 한다.
     
    그래서 더욱 어처구니없고 기분 나쁘기 그지없으니, 그 왕자님들은 가히 살인이 취미인 자들로서 실제로 그들에게 타살된 백성들이 수십 명이었다. 그래서 함경도에서 반란인 일으킨 백성들이 그 왕자들을 붙잡아 꽁꽁 묶은 후 함경도에 진군한 왜장 가토에게 넘겼던 것이다. (☞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불패의 가등청정을 박살 낸 정문부 장군')
     
    그런 쓰레기들이 합사됐던 가토신사는 이후 용산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  와카노이케(和歌の池) 옆으로 옮겨졌다가 해방과 더불어 철거되었다. 도로명 주소로는 마포구 토정로 231로 지금은 교회가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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