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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선·악의 뿌리 조로아스터교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1. 9. 1. 00:15

     

    사건 1. 

     

    2020년 11월 포스팅한 "프레디 머큐리와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글이 얼마 전 '청소년 유해정보'라는 이유로 로그인 제한 조치를 받았다. 무슨 영문인가 해서 티스토리 측에 두 차례 이유를 물었다. 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글의 무엇이 문제인지 재차 문의 드립니다. 
    굳이 짐작을 하자면 조장(鳥葬)의 사진을 게재한 것인데, 본문에서도 말했거니와 이는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 풍장이나 조장은 조로아스터교나 티벳불교에서는 오히려 성스럽게 여기는 장례법입니다. 

    살아생전 조류 등 자연의 육류를 섭취한 인간이 죽을 때 그 육신을 자연에 돌려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진에서처럼 가족들이 망자의 시신을 새들이 먹기좋게 쪼개 놓기도 합니다.(종교적으로는 영혼이 새의 날개에 실려 승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말했거니와, 그에 비하면 죽어서도 그대로 육신을 가져가겠다는 우리 식 매장은 오히려 이기적인 셈입니다. 물론 이것도 문화적 차이겠지요. 아무튼 답이 없어 재차 문의를 드리니 회신 부탁드립니다.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1991년 11월에 사망한 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는 사실과 그의 부모가 장례를 조로아스터교 장법(葬法)으로 치르려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지금은 거의 생명력을 다한, 하지만 가장 오래된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및 기독교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앞서 내가 쓴 글이었다.

     

    ※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1800년 아프카니스탄 출신의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종교로, 훗날 페르시아 제국의 국교가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의 윤리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20세기 니체가 주장한 초인사상(超人, Übermensch 위버멘쉬)의 모델로서 부활하기도 하였던 바, 그의 유명한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알조 슈프라흐 차라투스트라)의 자라투스트라는 곧 조로아스터를 말함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엠블럼인 프라바하르(fravahar)
    프라바하르가 새겨진 페르세폴리스의 신전
     프라바하르 상은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마즈다를 상징한다.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유적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퀸'의 엘범 쟈켓. 아래 가운데가 프레디 머큐리

     

    며칠 후 회신이 왔다. 

     

      안녕하세요. kaka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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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말인즉, 내가 게재한 사진이 '타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불쾌감·혐오감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을 게시하는 행위'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한 조치가 취해지고) 정확히 일주일 후 제한 조치가 해제되었다는 답이 왔다. 차후 운영원칙에 위배되는 서비스 이용이 재확인될 경우, 아이디 사용이 영구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아무튼 그래서 다시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은 심한 무력감과 함께, 흔히 회자되는 비유 한 구절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이 떠날 수는 없지 않냐는..... 그랬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빌려쓰는 지면이니...... 어찌 되었든 쓰는 데까지는 한번 써보고, 그러다 제한되면 좋든 싫든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의욕의 상실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몇 줄은 쓰려 하니, '기독교의 근간인 선악사상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나로서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어딘가는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앞서의 글을 전부 옮길 생각은 없고,(전부 기억도 안 나지만 힘도 팽겨서) 요점만을 적으려 한다.

     

    참! 프레디 머큐리의 조장(鳥葬)은 치러지지 않았다. 그의 부모가 파르시(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인도인)임은 분명했고 까닭에 조장을 고집했으나 국적은 영국인이었던지라 조로아스터교 성직자가가 아베스타어(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의 문자인 이란 동부어)로 집전한 그들 식의 장례가 거행된 후 화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다가 2012년 10월 '파로크 불사라'라는 본명의 묘비명이 런던 교외의 공원묘지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집중되었지만 일주일 후 다시 사라져버렸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프레디 머큐리의 무덤. 극성 팬에 유해가 도굴될까 그의 부모에 의해 이장되었다는 후문이다. 

     

    사건 2. 

     

    지난 8월 4일, 2003년 이라크전 당시 혼란을 틈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출된 문화재 1만7000여점이 이라크로 반환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 유물 중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가 새겨진 3500년 전의 점토판이었다. 수메르 신화 속 영웅 길가메시 이야기를 다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 ‘길가메시 서사시' 기록이 그 내용처럼 긴 여행 끝에 귀향하게 된 것이었다. 

     

    워싱턴DC 성서박물관이 가지고 있던 이 유물은 지난주 미국을 공식 방문한 무스타파 알카드히미 총리와 함께 이라크로 돌아왔다. 성서박물관은 예술공예품 판매 기업 '하비로비' 소유 가족이 설립한 기독교박물관으로, 이라크전 당시 현지에서 약탈당한 유물들이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하비로비에게 넘어가 성서박물관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라크 정부의 끈질긴 요구로써 반환이 성사된 것이다. 

     

     

    당시 파괴된 국립모술박물관
    파괴된 앗시리아의 라마수 상 
     바그다드박물관의 약탈과 파괴의 현장
     바그다드박물관을 수리하던 사람이 시대의 야만에 새삼 절망하고 있다. 
     이번에 반환된 '길가메시 서사시' 토판(15x12㎝)

     

    성서박물관에 전시되있던 점토판 등의 유물은 하비로비 측이 취득 경위를 소명하지 못함으로써 2019년 미국 법무부에 압수됐다가 이번에 이라크로 돌아갔는데, 하비로비는 점토판 반환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지난달 초 결국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하비로비는 4년 전 5000개 유물을 취득하며 실사 작업을 벌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무부로부터 300만달러 상당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적이 있으며, 2014년 크리스티 경매소로부터는 점토판을 팔 때 출처를 속였다는 이유로 판매대금 167만4000불/약 20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이 제기된 상태인데, 이것이 반환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다) 

     

    하산 나딤 이라크 문화부 장관은 "이라크 역사상 최대규모 유물 반환"이라고 기뻐하였고, 그러면서 브리티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거론했다고 한다. 하지만 브리티시 박물관은 요지부동이다. 만일 제국시대의 약탈 유물들이 본국으로 반환된다면 대영박물관은 텅 비게 될 터, 아무것도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게 영국정부의 과거로부터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인류 문화사의 보고(寶庫)를 자처하는 브리티시 박물관이나 실상은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는 곳이랄까..... 

     

    하지만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제국주의 시절 이라크 니느웨(니네베) 등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해석해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학문 및 구약성서와의 연관성을 파헤친 것 역시 브리티시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848~1976년 A.H. 레이어드, H 래썸 등에 의해 니느웨 앗슈르바니팔 왕(BC 669-626)의 도서관에 발굴된 3만 점의 고대 기록 파편들은 한편으로는 유럽 사람들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이 성서의 이야기와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이었는데 토판 기록은 누가 봐도 성서의 기록에 앞선 것이었다.  

     

     

     노아 방주 스토리의 원전 '대홍수 타블릿'
     노아 방주 스토리의 원전 '대홍수 타블릿'/브리티시 박물관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 스토리의 원전 '창조에 관한 일곱 타블릿'/브리티시 박물관
      출애급기 모세의 탄생과 유사한 기록의 '사르곤 왕 타블릿'
       '사르곤 왕 타블릿' /브리티시 박물관 
    니느웨 출토 토판이 전시된 브리티시 박물관  

     

    브리티시 박물관의 사서 조지 스미스가 최초로 내용을 판독한 이후 이 점토판들은 구약성서가 메소포타미아의 설화를 모방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대내적으로는 이 사실을 성토하고 대외적으로는 모르쇠로 일관했는데,  20세기 후반들어 양심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 결국 메소포타미아 설화가 구약성서의 모전(母典)이란 사실이 표면화되었다.  

     

    나아가 양심적인 성서학자들은 이 원인을 유대인의 바빌론 포수에서 찾았다. 바빌론 포수(Babylonian Exile)는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일을 말하는데, 그들 유대인들은 이후 50년 간 바빌로니아 지방에 억류되었다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고레스) 왕에 의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성서학자들은 이때 유대인들이 가져온 이방의 설화들이 이스라엘 토속 전설과 믹스되어 훗날 구약성서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가져온 것은 비단 메소포타미아의 설화만이 아니었으니 당시 크게 유행한 조로아스터교 사상도 묻어왔다. 당시 조로아스터교는 신흥제국 페르시아의 국교였고, 유대인을 해방시킨 키루스 대왕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열렬한 신자였던 바,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그 고마운 종교가 각인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나는 자라투스트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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