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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미나리'와 오클라호마 털사 인종 학살 사건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1. 6. 12. 02:31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털사(Tulsa)라는 도시는 영화 '미나리'가 상영되기 전까지는, 정확히는 윤여정 씨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 전까지는 한국 사람에게는 생소한 도시였다. 윤여정 씨는 어눌한 목소리로, 그렇지만 거침없는 스피치로 수상 소감을 늘어놓다가 무대 옆으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브래드 피트를 보고 한 마디를 던졌다. "오! 브래드. 드디어 나타났군요.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어디 갔다가....."(Where were you when were firming in Tulsa?)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의 제작자였다. '미나리'의 흥행에 앞서 배급이 원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마도 그의 회사 플랜B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배급은 A24가 맡았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서는 내내 무심했는지 윤여정 씨가 농담조로 한마디 던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미국영화의 제작 환경에 익숙지 못한 한국식 조크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제작자가 촬영 현장에 나타나거나 디렉터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법이 좀처럼 없다. 

     

     

    '미나리'의 미국 포스터
    오스카 상을 받은 윤여정과 제작자 브래드 피드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배경이 되는 곳은 털사가 아니라 알켄사의 어느 시골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칸소로 발음하는 그곳으로, 빌 클리턴이 대통령 시절에 알켄사 주지사 경력을 자주 들먹여 우리에게는 조금 귀에 익은 곳이다.(그는 34살이라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주지사에 당선됐다. 알켄사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산업은 약간 낙후돼 있어 과거에는 면화가 주력산업이었고, 지금도 미시시피 강의 지류인 알칸사 리버에 의지한 농업이 성행한다.

     

    그래서 영화 속의 주인공인 한인 이민자 부부가 캘리포니아를 떠나 알켄사에 정착하려는 것도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찍은 곳은 털사 시티의 교외였던 모양인데, 털사는 알켄사 주가 아닌 오클라호마 주로, 한국에서 가려면 주도(Capital)인 오클라호마 시티를 경유하지 않고 달라스 공항을 거치는 편이 훨씬 편한다. 이렇듯 살짝 듣기도 뭔가 좀 불편한 느낌을 주는 고장이지만 도시 자체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오클라호마 주에서는 오클라호마 시티 다음으로 큰 도시다)

     

     

    털사 시의 위치  
    털사 시의 야경

     

    그 도시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아래처럼 폐허가 된 적이 있다.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도심에서 총성이 일었고 그로 인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얼까? 미국에서는 이 일을 털사 인종 학살(Tulsa race massacre) 혹은 털사 인종 폭동(Tulsa race riot)이라 부른다. 사건은 1921년 5월 31일에서 6월 1일까지 1박 2일 동안 벌어졌으며 주로 털사 시 그라운드 구(區)의, 이른바 '블랙 월스트리트'(Black Wall Street)라고 불리던 부자 동네의 흑인들이 죽었다.

     

    내막은 백인에 의한 흑인 증오범죄였다. 방화와 총격을 넘어 백인이 몰고 온 비행기까지 동원된ㅡ이때는 비행기가 발명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ㅡ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800명 이상이 병원에 실려갔고, 흑인 주민 6,000명 이상이 체포 또는 구금되었으며, 수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오클라호마 주 통계청은 공식 사망자 수를 36명으로 발표했지만 미국 적십자사는 사상자 추산을 포기했다)

     

    백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표면적 이유는 딕 로랜드라는 이름의 19세 흑인 남성이 17세 백인 소녀를 성폭행하려 했다는 것이었지만,ㅡ이 내용이 <털사 트리뷴>이라는 지역 신문에 실렸다ㅡ실제로는 '잘 사는 깜둥이'들에 대한 백인들의 질투와 증오가 원인으로, 백인 폭도들의 주축은 그 유명한 KKK단이었고, 교회 성직자들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 뒤를 흥분한 백인들이 따랐다.

     

    이렇듯 대참사의 발단이 된 소문임에도 그 사실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당사자는 무죄를 주장하였고 그를 보호하려 다른 수십 명의 흑인들이 재판장에 모여드는 동안, 교회에서 모의를 마친 KKK단이 쏟아져 나와 가게와 주택에 불을 지르고 재판장에 모인 흑인들과 주민들을 집단 린치하는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건은 규명되지 못했다. 당시 사태를 저지해야 할 경찰들은 백인 백여 명을 특별 대리인으로 선임해 총기를 제공했고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폭격으로  불타는 털사 시 
    폐허가 된  '블랙 월스트리트'
    흑인 교회도 불탔다. 백인들의 하나님과 흑인들의 하나님은 달랐다. 
    십자가와 성조기를 앞세운 KKK단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붙잡힌 흑인들. 한 백인 남자가 체포되어 가는 흑인의 뺨을 때리고 있다. 

     

    그런데 1920년 대에 어떻게 털사의 흑인은 부유했고 백인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했을까? 이 기이한 현상의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 오클라호마 주는 19세기 초 미연방 정부가 남부의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인디언 자치령(Indian Territory)으로 선언해 표면상의 자치를 허용해준 곳이었다. 그러자 이 땅은 자연히 백인들의 기피 장소가 되었고, 반대로 흑인들은 땅값 싸고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운 이곳으로 대거 이주해왔다. 먼저 와 기틀을 닦았으니 먼저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1907년 들어 오클라호마가 미국의 46번째 주로 편입되고 석유와 다이아몬드 광이 발견되자 뒤늦게 백인들의 러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이주는 늦어도 한참을 늦었던 바, 이미 면화산업 등을 바탕으로 한 흑인 경제가 자리를 잡아 털사의 다운타운에는 '블랙 월스트리트'가 형성돼 있는 지경이었다. '블랙 월스트리트'는 당시 미국 전체를 통틀어 흑인 부자들이 가장 많은 동네였고 심지어는 백만장자도 있었지만 백인들의 시각으로는 그저 어이없는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부자라고 떵떵대고 있는 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우리의 노예였던 자들이 아닌가?' 백인들은 눈에 불이 튈 수밖에 없었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모여 깜둥이들을 단시간에 털사 밖으로 몰아낼 궁리를 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흑인과 백인 간의 일자리 갈등이 아닌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백인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며 그것은 생명보다 귀중했다. 그들이 수단으로 삼은 폭력은 악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정의였으니, '집단에는 정의가 없다'는 말이 법칙처럼 통용되었다.  

     

    흑인들 수백 명이 희생되는 데는 만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고, 살아남은 흑인들이 털사를 떠나는 시간 또한 그리 오래주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털사는 흑인은 물론이요, 다른 유색인조차 드문 곳이 되었다. 2001년 결성된 진상 규명 위원회의 재조사 결과 당시의 사망자는 100명에서 300명 정도로 추산됐고, 미국 역사상의 가장 크고 참혹했던 인종차별 사건으로 규정됐으나 정확한 진상은 끝내 규명되지 못했다.

     

    털사에서 온 한국 소녀 알렉사의 '이즈 잇 온'으로 이어짐

     

    털사에서 온 한국 소녀 알렉사의 '이즈 잇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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