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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영부영했던 군대 어영청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5. 1. 00:37

     

    지난 토요일, 시인 기형도의 흔적을 찾아 옛 파고다 극장 자리에서 종묘공원까지 걷다 종묘공원 옆 길에서 우연히 어영청의 표석을 발견했다. 갑자기 '어영부영'이란 말이 생각났다. 어영부영이 어영청에서 기인된 말이라 하기에..... 어영부영을 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적극성 없이 아무렇게나 어물어물 세월을 보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어영청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후금(後金)의 공격을 두려워해 설치한 친위군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前) 왕인 광해군은 후금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정군은 다시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으로 돌아섰던 바, 겉으로는 명분을 회복한 듯 보였지만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1623년 반정세력 이귀(李貴)를 사령으로 하는 친위대를 조직하여 왕의 주변을 호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영청의 전신인 어영사(御營使)였다. 

     

     

    이귀(1577-1633)의 초상
    이귀의 후손들이 놀았다는 창회정(蒼檜亭)의 터 / 서빙고 옆 창회정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이귀 일가가 누린 권력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강세황의 창회정 그림

     

    어영사는 260명 전원이 총포수(銃砲手)로만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총포의 위력을 절감한 까닭이었다. 어영사는 이괄의 난을 맞아 인조가 공주로 몽진했을 때 왕을 호위했으며 환도 후에는 1천여 명으로 증원이 됐다. 그리하여 어영군은 훈련도감과 함께 중앙군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는데, 임금을 모시는 군대이니 만큼 끗발이 남달랐다. 어영사는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12월 그 수가 다시 5천 명으로 증원되었고, 본격적인 청(廳)이 되었다.

     

    어영청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한 후 더욱 힘이 커졌다. 북벌을 평생의 목표로써 매진했던 효종은 1652년 어영청의 군대를 2만 1천명으로 늘이고 명망 높던 이완(李浣)에게 어영대장의 직무를 맡겼다. 아울러 어영청에 지급되는 군포(軍布)도 기존의 1인 1포에서 1인 3포로 바꾸었다. 쉽게 말해 월급이 늘고 후생복지가 확대되었다는 뜻이니 어영청은 조선후기 중앙 부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 중의 최애 군대가 된 셈이었다. 

     

     

    종묘 근방 세운스퀘어 빌딩 앞의 어영청 터 표석

     

    하지만 효종이 죽고 북벌이 없었던 일이 되며 어영청은 이후 차츰 존재감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정조가 친위부대로 육성한 장용영이 들어선 이후로는 존폐의 기로에까지 들어섰다가 정조 사후에는 앞서 말한 안동김문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하여 60년간 안동 김씨의 대문을 지켰다. 이때 생겨난 말이 어영불영(御營不營), 혹은 어영비영(御營非營)이다. 어영청은 영(營, 군영)도 아닌 것이 그저 하릴없이 세월만 죽인다는 뜻이었다.

     

    그 말이 어영부영의 어원이다. 그래서 아들 고종을 세워 이씨 왕정(王政)을 회복한 흥선대원군은 어영부영하는 어영청을 버리고 훈련대감 위주로 군대를 정비했다. 그리하여 그가 양성한 삼수병(三手兵, 포수·사수·살수의 통칭)*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기대에 걸맞은 빛나는 활약을 보였으나, 1874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그 이듬해부터 훈련도감 삼수병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춥고 배고픈 삼수병 무너지는 것은 당연했을 터, 1876년 일본 전함 운요호의 공격에 임해서는 막강 강화도 군대가 무력하게 당했다.

     

    * 삼수병의 포수는 총을, 사수는 활을 쏘는 부대이며, 살수는 근접전에 투입되는 부대로서 창·검 외에도 편곤(쇠도리깨), 편봉 등을 연마했다.  

     

     

    신문로 금호 아트홀 앞의 훈련도감 터 표석
    일본의 함포 공격에 맥없이 무너진 초지진
    초지진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 이곳으로 일본 함선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영종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 일본군의 기록화로서 이때 영종진(永宗鎭)은 단 2시간에 함락되며 35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영종도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다 돌아갔는데 이때 일본군 측의 피해는 상륙하다 발이 삔 한 놈뿐이었다.
    복원된 영종진 태평루와 전몰영령추모비 / 2004년부터 운요호 사건으로 희생된 군인 35명의 위령제가 행해지고 있다. (영종도 에어스카이 호텔 제공사진)

     

    이에 결국 강제 개항이라는 굴욕을 맞이하게 되는 바,  앞서도 여러번 말했지만 조선의 멸망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에 앞서 1875년 9월 20일, 운요호를 비롯한 군함 5척이 강화도의 초입 요새인 초지진을 포격했을 때 총사령관인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드디어 조선을 포격하는구나'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일본 전쟁광들에게 면면히 이어지던 정한론(征韓論)의 실체를 드러낸 독백이었는데, 이후 이노우에는 강화도 회담의 부사(副使)로도 참석했다.

     

     

    생긴 것도 재수 없는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1845~1929)

    * 하지만 생긴 것을 떠나 과소평가할 인물은 아니었으니, 그는 사쓰마번(藩)의 하급 무사로 있을 때인 1863년 8월,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포대를 공격했을 때 허벅다리 관통상을 입은 바 있다. 그는 이때 약소국의 비애를 깨달았고 육군에서 해군으로 전환하여 영국식 군제를 들여와 응용하였다. 그리고 가고시마 포대가 포격당한 12년 뒤 자신들이 당한 그대로 강화도 포대를 공격하였다. 

     

    이노우에가 조정에 올린 '강화도 사건 보고서'
    조선 침공의 첨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 먼저 당한 바 있는 조슈번(藩)의 젊은이들은 1863년 아예 영국을 배우러 요코하마 항에 정박 중인 영국 화륜선에 올라탔다. 이른바 '죠수 5걸'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오 요조,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였다. 이들은 돌아와 일본의 근대화의 일등공신이 되었는데, 특히 우리에게 악명 높은 이토 히로부미의 활약이 빛났다.

     

    본 내에서 이또 히로부미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본 근대헌법(메이지 헌법) 초안 작성, 일본 국회의 양원제 도입, 을사늑약과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등은 모두 그가 영국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리고 강화도 포격과 명성황후 시해의 숨은 설계자임도 최근 밝혀졌다. 우리로서는 이래저래 죽일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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