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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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영제국이 시작되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4. 21:49
영국은 비록 세계 경략에의 출발은 뒤졌지만 스페인의 무적 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한 후로부터는 그야말로 욱일승천하여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약 ¼에 해당하는 4억 5천 8백만 명의 인구와, 지구 육지 면적의 ¼에 해당하는 3천 5백만 km²의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게 된다.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그들의 영토에는 동 서 어디든 해가 떠 있으므로)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로서 본토 면적은 24만 km²로 22만 km²의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다.(남북한 포함) 그런데 그 나라 국민의 유전자는 뭐가 우수했는지 전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가 되었고,(지금은 미국과 호주를 비롯한 과거의 식민지들이 거의 독립하였지만 아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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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항해 시대의 개막)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 07:18
정복자 타리크가 바다를 건너 오기 전 이 해협은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이라 불려왔다. 그 옛날 이곳은 바다가 아니라 아프리카 아틀라스 산맥에 연결되어진 산이었는데, 그 산을 오르기 귀찮았던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괴력으로 산줄기를 끊어버렸다는 신화적 이야기에 근거를 둔 이름이었다. 신화에 따르자면 이에 산은 졸지에 갈라져 바닷물이 흘러들게 되었던 바, 그때 끊어진 산의 흔적이 앞에서 말한 타리크의 바위와 맞은 편 모로코 땅 끝에 위치한 몬테 아쵸(아쵸 산)라 불리는 바위다. 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그와 같은 전설보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아틸란티스 섬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이라는 책 중의 한 챕터인 '티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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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이름의 유래와 이슬람의 진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 07:55
지브로올터(Gibraltar) 해협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이어주는 좁은 관문으로 10Km라는 짧은 거리를 두고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마주한다. 지브로올터라는 지명은 아라비아어 '지바 울 타리크'에서 비롯되었으니 곧 타리크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타리크는 아프리카로부터 이 해헙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위치한 지역)를 점령한 사라센 제국의 장수로서, 필시 배 위에서 아래의 바위를 본 이슬람 사람들이 그 이름을 갖다 붙였으리라. 지브로올터 해협의 사진과 위치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예들이 세운 이슬람 공동체(일명 사라센 제국)에 대해서는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에서 언급된 바 있다. 고구려의 유장(遺將)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아랍 땅으로 진출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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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IV)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2. 29. 07:22
이상 설명했다시피 드라큘라 백작은 평생을 바쳐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막은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이미지는 이와는 전혀 무관하니 모두들 다음의 것들만 기억한다. 중세의 고성에 살며 낮에는 관 속에서 잠을 자다 밤에만 나타나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인간의 피는 드라큘라 백작의 식량인데, 꼴에 자기도 남자라고 특히 여자의 피를 좋아한다..... 그 뱀파이어는 십자가와 마늘과 햇빛에는 쥐약이지만 그 외는 불로장생 천하무적의 흡혈귀로 중세 때의 인물임에도 여지껏 살아 있다..... 게다가 그는 점점 강해져 옛날에는 촛대를 크로스시켜 십자가 문양만 만들어도 죽었지만 지금은 인간의 목에 걸린 십자가 쯤은 가볍게 떼어 내팽개친다. 이때 그저 손바닥에 화상만 조금 입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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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2. 4. 21:56
1084년, 로마에 입성한 하인리히 4세는 성대한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어찌보면 차라리 다행이랄까, 산탄젤로 성에 농성 중인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하인리히 4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보지 못하였다. 그 대관식에서 황제의 관을 씌워준 사람은 하인리히 4세가 옹립한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였던 바,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속이 터져 죽었거나, 눈이 뒤집혀 죽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 하인리히 4세는 이미 어릴 적에 독일 아헨 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치렀지만, 이날 다시 대관식을 가진 것은 이제는 자신이 온 천하의 왕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그 소문을 들어지만, 의외로 덤덤했다고 한다. 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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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41
'카놋사의 굴욕'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그 내용인즉슨 아래의 그림과 같다. 이를 좀 더 보완하자면, '당시 유럽 최강의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자 임명 권한을 두고 싸우다 파문당하고, 결국 카놋사 성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3일간 자신의 죄를 빌어 겨우 파문의 철회시킨 사건으로, 중세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누르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사건' 쯤이 우리가 기억하는 카놋사의 스토리다. 그래서 그 사건인즉 언필칭 '굴욕'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은 올바른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틀린 내용은 아닌 바, 사건이 일어난 1075년부터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죽은 1085년까지 적어도 10년은 그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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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I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39
문헌상의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방을 떠날 때 학자나 예술가도 동반했을 것임은 그 상상이 어렵지 않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적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사사했던 바, 그 역시 상당한 학문과 심미안을 갖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경지는 자신이 이룩해 낸 헬레니즘 문명으로 표출되었던 바, 비록 그의 치세는 짧았으나 그 영향력은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듯싶다. 그는 실제로 살아생전에도 동서 문화의 융합인 헬레니즘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박트리아에 이르러서는 그곳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페르시아 수사에서는 그리스 · 마케도니아 장병 1만 명과 페르시아 여자의 합동결혼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앞서 거론된 디아도코이 니카토르 1세도 알렉산드로스의 권유로 박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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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1. 01:53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3번 째 대전(大戰)은 가우가멜라 전투였다. 가우가멜라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벌판으로 페르시아어로 '낙타의 집'을 의미한다. 옛날 페르시아의 어떤 왕이 적에게 쫓길 때 자신의 낙타가 매우 빨리 달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에 낙타에게 그때의 땅을 봉토로 주었던 까닭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지명으로 설명하면 가우가멜라는 이라크 모술 동쪽 27km에 위치한 벌판으로서, 이 일대는 지난 3년간 금세기 최악의 테러집단 IS에게 점령당했다 올해 7월 10일 국제연합군에 수복된 지역이기도 하다. 전투는 BC 331년 10월 1일에 벌어졌다. 플루타르쿠스는 월식이 있던 날로부터 12일 째 되는 날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하였던 바, 날짜는 이를 역산하여 산출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