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1. 07:48
* '기마민족의 후예들/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에 이어짐. 훈족의 로마 공격이 재개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통합적인 힘이 아니었던 바, 국지적인 약탈이 지속되었을 뿐 그것이 로마제국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전투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그 개별적인 부족의 공격에도 로마와 게르만족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활은 여전히 강해 삼각의 쇠 화살촉은 로마군의 가죽갑옷을 가볍게 꿰똟어 박혔고, 그간 이곳의 말들과 혼혈하며 개량된 저들의 조랑말은 더욱 힘차게 달렸다. 그런데 그즈음, 로마로서는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훗날 이 분열된 훈족을 통일시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아틸라가 탄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다행스럽다'는 표현은 그가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한 극악무도한 침입자가 아니었다는 데..
-
기마민족의 후예들(II)/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0. 05:25
흉노족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유럽인은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초원에 살던 유목민 알라니족이었다. 그들은 그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양의 흉노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기록에 남게 되었다. 374년, 발라미르를 대장으로 하는 흉노족의 일파는 볼가 강을 건너 자신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마을로 향해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흉노족이 첫 상대로 맞은 이 알라니족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던 바, 그들 역시 카프카즈령 로마제국과 파르티아를 상대로 노략질을 해 먹고 살던, 나름대로 분탕질과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나운 민족이었다.(파르티아에 대해서는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 참조) 볼가 강의 위치와 흉노족의 침공(←) 이에 볼가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땅은 100년 간 흉노족의 영토가 되었..
-
기마민족의 후예들 (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8. 07:47
부순희라는 여자 사격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불세출의 총잡이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바, 94년 세계선수권, 97년 밀라노 월드컵, 98년 뮌헨 월드컵, 99년 월드컵 파이널스 등에서 우승하며 10년 이상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아무튼 스포츠 권총과 공기 권총에서는 세계에서 그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부진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2000년 무렵 위암 판정을 받았고 2002년 4월에 수술을 했다. 가족들 중에서도 위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니 필시 가족력에서 기인한 병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 후 재기에 성공하였으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6년 만에 다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가히 인간승리로 불릴만한 드라마적인 인생 스토리였는데,..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5. 07:39
절경으로 이름 높은 괴산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들어서면 우선 만나보게 되는 것이 경천벽(擎天壁)과 운영담(雲影潭)이라 불리는 아래와 같은 기암괴석이다. 그리고 그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조선 중기 유학자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인근의 만동묘(萬東廟)를 마주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그의 손자이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들의 사당이 왜 이곳 화양동 산자수명한 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화양서원의 배향자인 송시열로부터 찾을 수 있다. 만동묘는 그의 유훈으로 세워진 것이고, 이 화양 9곡 절경들의 이름은 그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지은 것으로, 한 마디로 지독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몸부림..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1. 07:56
1388년 음력 4월, 고려의 최영 장군이 이끄는 5만 대군이 3차 요동 정벌에 나섰다.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의 1, 2차 원정에 이은 3번째의 요동 정벌이었다. 고려가 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 것이 언뜻 공격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요동 철령(鐵領) 이남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곳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으나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며 약 1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을 공민왕의 고토 회복 정책으로 겨우 되찾아왔는데,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이 중원의 패자(覇者)가 된 명나라 주원장이 이곳이 과거 원나라 땅이었다는 구실로 새로 철령위(鐵嶺衛)라는 군영을 설치해 일대의 땅을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1388년/우왕 14년) 고려로서는 이와 같은 명나라의 행위를 도저..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8. 09:08
우리의 사대주의의 인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쩐 기억이 있다. 필시 우리 조상님들이 신봉한 사대사상과 그로부터 비롯된 저들의 고약한 중화 우월주의가 만든 기억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을 서울 성동구에서 마포까지 통학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으며 통학시간도 1시간 반이나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당시 이른바 공동학군이라 불리던 고등학교 배정 범위의 동쪽 끝에 살던 내가 서쪽 끝의 학교에 배정됐기 때문인데, 까닭에 꼼짝없이 그 먼 거리를 3년 내내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인근에 한성 화교 학교가 있었다. 재한 중국인 학생들, 즉 화교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는데, 그 학생들과 3년 동안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니 막판에는 친해져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몇 번 술자리도 가지게 되..
-
백발 인물열전(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인가?)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6. 07:30
주흥사와 천자문 한글 전용화와 더불어(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어 간자체의 상용화와 더불어) 이제는 일견 사문화(死文化)된 느낌도 들지만, 불과 2~30년 전만하더라도 ‘천자문(千字文)’은 최고의 한문 독본(讀本) 교재였다. 그리고 그 독본의 유구함은 적어도 1500년 이상은 될 터, 405년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증명한다(왕인 박사의 기록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 속일본기 고사기 등 일본 사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한반도로부터의 한자 전래설을 신봉한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가타시에 있는 왕인 박사의 묘소와 입구의 백제문. 왕인 박사가 1600년 전 백제 아신왕 때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는 안내문 내용이 한글과 ..
-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2. 09:21
*앞서 올린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1편이 바이러스에 오염돼 삭제시키고,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라는 제목으로 다시 글을 썼습니다. 혹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2, 3편의 전편을 찾는 분이 계시면 이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를 말할 때 흔히들 부르는 알렉산더(Alexander)는 영어 이름이고 원래는 알렉산드로스(Alexsandros III, BC 356-323)이다. 본 블로그에서는 인명이든 지명이든 본래의 이름으로 적으려 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알렉산드로스를 택하겠다. 원어명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은 일반적인 일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워낙에 영어 번역본의 영향이 커 대부분의 명칭이 영어식이었다. 예를 들자면 로마 장군 줄리어스 시저는(Julius Caesar)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