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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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I - 세기의 이혼 소송을 벌인 이인용과 조중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8. 00:10
서울 낙산 아래의 이른바 동촌(東村)을 걷다 보면 과거와 근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동촌에 투어리스트가 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나, 지금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해 예전에는 환대했던 동촌 주민들도 더 이상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 북촌(北村)과 서촌(西村) 주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탐승객을 위한 배려였던 이화동 골목의 그림도 이제는 지워졌다. 위의 잉어 노는 물길 계단, 해바라기 꽃길 계단 등은 2006년경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지역 환경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68명의 화가들을 초빙해 그린 그림이었다. 이때 마을 곳곳에 벽화 70여 점이 그려졌고 유명한 '이화동 벽화 골목'이 되었다. 이후 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것을 계기로 끊임없이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더불어 골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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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 - 이화장·조양루·석양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6. 23:46
1575년(선조 8년) 동서 분당이 일어났다.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니,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소윤(小尹)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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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고려궁지 황성 옛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5. 00:06
고려가 황제국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앞서 '고려가 황제국임을 말해주는 하남 선법사 마애불'에 실은 여러 글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엄연한 황제국이었고 임금에 대해서는 너나 나나 모두 황제로 불렀다. 하지만 조선은 건국 때부터 사대의 예를 갖춰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는 고려가 황제를 칭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나쁘고 역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말한 바대로 국초(國初)의 정도전은 이를 '참의자사'(僭擬之事)라고 했다. 분수 넘치게 황제를 참칭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이것이 공통된 사고였을 터이지만, 혹간 백호 임제와 같은 이단아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풍류남아 임제는 39세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었는데, 임종에 앞서 가족들이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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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과 고려의 대원전쟁(對元戰爭) & 목화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3. 18:11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미합중국에서 벌어진 내전인 이른바 남북전쟁은 겉으로는 노예해방이라는 기치가 걸렸지만 실상인즉 남과 북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그 전쟁의 발단은 1787년 지금의 오하이오주와 그 일대의 지역이 노예제도를 폐지한 데서 비롯됐다. 이에 미국 북부 대다수의 지역이 동조한 반면, 남부의 전 지역은 노예제를 고수했고, 결국은 미합중국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861년 4월, 남부연합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부연합이 전쟁까지 일으킨 이유인즉, 남부는 농업이 주요 산업기반이라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저 광활한 카튼 필드(cotton field)의 목화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없으면 경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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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회암사 3대 화상(和尙)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3. 09:25
II편에서 말했듯 나옹선사는 회암사의 중창불사와 함께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실과(實菓)의 단맛을 누린 자는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옹의 제자 자초(自超, 1327~1405)였다. 흔히 아호를 좇아 무학대사로 불리는 사람이다. 자초는 조선왕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명된 왕사(王師)인 바, 국사(國師)라 불려도 이상하지는 않다. 또 당대에는 아호를 법명으로도 불렀으니 무학대사라 불러도 별 탈은 없으나 에서는 시종일관 자초로 (간혹 자초 무학대사로) 기록되어 있다. 예문을 하나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에게 물으니, 자초가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태조 2년 2월 11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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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나옹선사의 회한(悔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2. 21:40
앞서 I편에서 양주 회암사(檜巖寺)가 중창불사를 거쳐 동국제일의 대가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약술하자면, 고려를 방문했던 인도승려 지공(指空, śūnyā-diśya, 1300~1363)이 양주의 작은 절 회암사에 들렀다가 인도 나란타사와 비슷한 지형을 보고 "이 절을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로다"는 예언을 했고, 이에 나옹(懶翁, 1320~1376)이 3년간의 중창불사 끝에 대가람을 완성시켰다. (☞ '인도승려 지공의 승탑이 회암사에 있는 까닭') ※ 나옹선사, 혹은 나옹화상으로 불린 그 인물의 법명은 혜근(惠勤)이고 나옹은 아호다. 따라서 혜근선사나 혜근화상으로 불리는 것이 옳겠으나, 당대에는 호를 붙여 부르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다른 예로 나옹의 제자 무학대사를 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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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승려 지공의 승탑이 회암사에 있는 까닭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1. 21:44
인도의 지공스님(指空, śūnyā-diśya, 1300~1363)은 1326년 3월 고려를 국빈 방문했다. 인도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원나라 연경에 머물던 시절에 방문한 것인데 어찌 됐든 먼 길을 온 것만은 분명하다. 인도 마가다국 국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그는 여덟 살 때 라즈기르시(市) 북쪽에 있는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출가해 율현(律賢, vinaya-bhadra)에게 계를 받았으며, 이후 명문 불교대학인 나란타사 부설 나란다(Nālandā) 대학에 들어가 불법을 더 깊이 공부했다. 나란다 대학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학교로서, 과거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이곳을 방문해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한 것을 계기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굽타 왕조(Gupta Empire, 32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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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황제국임을 말해주는 하남 선법사 마애불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0. 22:46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비롯해 과거의 거의 모든 고려시대 사극에서 고려의 임금은 황제이다. 그래서 고려가 황제국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간헐적으로 논란이 재현된다.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하자면, '고려=황제국'이라는 것인데, 사실 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초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참의자사'(僭擬之事)라는 궤변으로써 마침표를 찍은 바 있다. 정도전은 국초에 를 저술하며 '참의지사'라는 말을 썼다. '참의지사'란 '실속도 없이 분수 넘치게 황제를 참칭한 일'이라는 뜻이니, 실속이 있었든 없었든, 분수에 맞든 맞지 않았든 간에 고려가 황제를 칭한 것은 사실인 것이다. 정도전의 이와 같은 단정적 사고는 흡사 지침(指針)처럼 내려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