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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미제국(新彌諸國)과 왜가 백제에게 양도한 임나4현
    잃어버린 왕국 '왜' 2023. 6. 9. 22:04

     

    1976년에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벽화고분은 남·북한과 중국·일본에 모두 뜨거운 감자였다. 무덤의 주인공인 진(鎭)이 본래 고구려 사람이냐,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냐 하는 논쟁에서 아무도 이렇다 할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내내 그러한 상태이다. 덕흥리 고분은 피장자와 축조연대(AD 408년, 광개토대왕 18년)가 모두 확실한 드문 무덤임에도 그렇듯 처리가 힘든 이유는 피장자 진이 다스렸던 치소(治所) 때문이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명에 따르면 그가 역임한 관직은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로서, 마지막 치소인 유주는 지금의 북경지방이다. 즉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일대까지 다스렸다는 것이니, 진에게 정무보고를 하는 유주 관할 군 태수 가운데는 우리에게 조금은 익숙한 어양태수(漁陽太守)와 북평태수(北平太守)도 있다.* (아래 그림)

     

    * 후한 초기 광무제 유수와 싸웠던 어양태수 팽총(彭寵), 후한 말기 동탁 토벌 18로 제후연합군에 속했던 북평태수 공손찬(公孫瓚)은 제법 알려진 인물로, 당시 무명의 유비 3형제는 공손찬 밑에서 종군해 성장한 케이스다.

     

     

    무덤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
    진에 대해서 쓴 묵서명
    13개 군 태수가 진에게 정무보고를 올리는 모습 / 13개 태수의 명칭은 인물 우측에 쓰여 있다. 1)연군(燕郡)태수 2)범양(范陽)내사 3)어양(漁陽)태수 4)상곡(上谷)태수 5)광령(廣寧)태수 6)대군(代郡)내사 7)북평(北平)태수 8)요서(遼西)태수 9)창려(昌黎)태수 10)요동(遼東)태수 11)현토(玄兎)태수 12)낙랑(樂浪)태수 13) 판독 불능
    유주 각 군의 위치 / 일본에서 제작한 위대(魏代)의 지도이다.
    덕흥리 고분의 외관
    2개의 무덤 방으로 이루어진 내부의 전체 모습은 이렇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주(幽州)는 이에 앞서 우리 역사와는 크게 2번의 연관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 지역을 설명하자면, 후한말 공손찬과 원소는 하북의 패권을 놓고 한판 붙었는데 공손찬이 자랑하던 백마진(白馬陳)이 기주전투에서 원소군에 깨지고 난공불락의 요새 역경루마저 함락되며 패배한다. 하지만 원소는 저 유명한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조조에게 패하며 유주일대는 위(魏)나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이 무렵 일어났다. 영토 확장을 노리던 고구려는 동천왕 16년 때인 242년 위나라의 요충 서안평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毋丘儉, ?~255)이 역공을 취해 고구려를 침공해 오고, 동천왕은 멀리 동쪽의 옥저 땅까지 도망가야 했다. 관구검은 자신의 공적을 기리는 기공비(紀功碑)를 세우고 유주 본영으로 철군했다. (이 지역은 미천왕 12년 때인 311년 마침내 고구려의 영역으로 병합되었다)

     

     

    관구검기공비 / 245년 관구검이 고구려 정벌을 기념해 세운 비석의 부분이다.(요녕성 박물관)
    고구려·위나라 전투 전황도
    서안평의 위치에 관한 다른 견해들

     

    이후 1905년 길림성 집안현 판석령 도로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관구검기공비에 대해서는 최근 진위 여부가 불거지기도 했는데, 이와는 별개로 2008년 일본 역사학자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가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를 발견하며, 서기 244~245년 고구려를 침공해 초토화시킨 사람은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毋丘儉)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비석은 '무구검' 손자인 '무구오'(毋丘奧)가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건립한 비석으로, 산시성 원시현(聞喜縣)의 구촌(邱村)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관구검기공비의 1905년 탁본 /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08년 발견된 '무구씨조상비'

     

    두 번째는 위나라가 사마씨가 세운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진나라가 오나라까지 멸망시킨 후 천하통일을 이룬 직후 일어났다. 이때의 주인공은 진나라의 재상이자 시인인 장화(張華, 232~300)이다. 당시 탁지상서(度支尙書)였던 장화는 오나라와의 지구전을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나라 토벌을 적극 밀어붙여 진 무제 사마염의 결심을 굳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자강을 도하해 수도 건업(建業)을 함락시키고 황제 손호를 사로잡아 천하통일 대업을 이루게 하나(AD 280)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진나라와 오나라가 대립하던 266년경의 지도

     

    《진서》에 따르면, 이때 장화의 직함은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持節 都督幽州 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이었다. 그런데 이때 장화는 비록 좌천당해 전출되었으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히 주변국을 위협하였는지, 같은 책에는 "東夷馬韓, 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라는 치적이 실려 있다. "바다를 띠삼아 의지하고 있는, 유주로부터 4000리나 떨어져 있는 동이마한(東夷馬韓)의 신미제국(新彌諸國, 신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20여 개 국이 지난 세월 동안 귀부해오지 아니하다가 나란히 사절을 보내서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  

     

    * 《진서》〈장화전〉은 이러한 외교적 성과의 이유로써 '옛 요서 세력들을 물갈이하지 않고 새로운 장수들과 함께 모두 받아들이는' 포용력 있는 정치력을 들고 있다. 그래서 그 먼 오랑캐들이 감복해서 조공하니 사방 경계의 근심이 없어지고 매년 세곡이 풍성히 쌓여 사마(士馬=진나라)가 강성해졌다는 것이다. (撫納新舊 戎夏懷之 東夷馬韓 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裡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於是遠夷賓服 四境無虞 頻歲豊稔 士馬强盛)  

     

     

    서진(西晉) 때 장화가 다스리던 지역

     

    우리에게 '동이 마한'은 익숙하지만 '신미국을 비롯한 20여 개 국'은 생소하다. 역사책에도 소개된 적이 없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소개하지 않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니 우리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고대국가는 진(晉) 나라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위지(魏志)'동이전'을 근간으로 한다. (진수는 장화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다) 《삼국지》는 〈위지가 30권, 〈촉지가 15권, 〈오지가 20권으로 되어 있는데, 〈위지'동이전'은 서(序)·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揖婁)·예(濊)·한(韓)·왜(倭)의 순서로 되어 있다. 

     

    〈위지는 총 30권에 기(紀)가 4권, 전(傳, 열전)이 26권인데, 동이전은 제일 마지막 권30의 오환(烏丸)·선비(鮮卑) 다음에 실려 있다. 그런데 〈위지에는 신미제국이 출현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서임에도 《진서》에 등장하는 '신미제국'이 《삼국지》에 실려 있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한(韓)이나 왜(倭)에 속한 소국(小國, 부용국)이기 때문일 터이다. 《삼국지》〈위지〉는 위나라의 동쪽에 속한 이른바 동이족의 나라 중 비교적 이름이 있는 나라만을 골랐다. 그래서 아래의 '독로국' 같은 나라는 타이틀만 소개될 뿐 따로 패러그라프를 만들지 않았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차제에 다시 강조하거니와 당시의 왜국(倭國)은 바다 너머 열도에 있지 않고, 한(韓=마한)의 남쪽에 접해 있었고, 또 독로국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역대 사서(史書)에서는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왜국은 바다 건너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한과 남쪽 경계를 이루는 땅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후한서》〈동이전에서도 설명이 같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왜국의 위치 / 사서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면 이와 같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진서》의 신미제국은 '마한과 왜의 국경지대에 산재했던 여러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신미제국이 정확히는 29개 국이었음이 《진서》〈제기(帝紀)〉를 통해 확인된다. 그 기록에 보면 태강 3년(282) 정월에 장화를 도독제군사로 삼았고, 9월에는 동이 29국이 견사조헌(遣使朝獻,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침)해온 사실이 명확히 쓰여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 계체 6년조의 기록에는 신미제국을 추정할 만한 기록이 있다. 먼저 단언하거니와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침미다례(忱彌多禮)’는 신미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일본서기》 9권 진구황후(신공왕후) 섭정 49년(249년)조에 나오는 내용을 일단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남만(南蠻) '침미다례'를 점령해 백제에게 주었다는 것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곳이 해남·강진이며 '침미다례국'이라고 하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일본서기에 여러 번 등장하는 침미다례에 관해서는 후일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오늘 내가 신미제국의 영토로 간주해 소개하려는곳은 앞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임나 4현'이다. 먼저 《일본서기》 계체 6년(512년)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裟陀), 모루(牟婁) 4현을 청하였다.(백제 무령왕 시절) 다리국수인 수적신압산(穂積臣押山)이 아뢰기를, "이 4현은 백제와는 인접해 있지만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정도이니 이제 백제에 주어 같은 나라로 합치게 한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몇 년도 제대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반금촌대련(大伴大連金村)도 이 말을 믿고 뜻을 같이하여 상주(上奏)하였다. 대련(大連)은 그 청에 따라서 사자를 바꾸어 칙을 알렸다. 하사품과 칙명의 뜻을 전하고, 상표에 따라 임나 4현을 주었다.

     

    冬十二月, 百濟遣使貢調. 別表請任那國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 四縣. 哆唎國守穗積臣押山奏曰, 此四縣, 近連百濟, 遠隔日本. 旦暮易通, 鷄犬難別. 今賜百濟, 合爲同國, 固存之策, 無以過此. 然縱賜合國, 後世猶危. 況爲異埸, 幾年能守. 大伴大連金村, 具得是言, 同謨而奏. 迺以物部大連麁鹿火, 宛宣勅使. 物部大連, 方欲發向難波館, 宣勅於百濟客. 其妻固要曰, 夫住吉大神, 初以海表金銀之國, 高麗百濟新羅任那等, 授記胎中譽田天皇. 故大后息長足姬尊, 與大臣武內宿禰, 每國初置官家, 爲海表之蕃屛, 其來尙矣. 抑有由焉. 縱削賜他, 違本區域. 綿世之刺, 詎離於口. 大連報曰, 敎示合理, 恐背天勅. 其妻切諫云, 稱疾莫宣. 大連依諌. 由是, 改使而宣勅. 付賜物幷制旨, 依表賜任那四縣.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 학계에서 임나 4현으로 주장하는 곳은 아래 영산강 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이 《진서》에 나오는 신미제국이라고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도 꽤 많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임나 4현은 백제와 왜가 '아침저녁으로 내왕할 정도'의 작은 지역으로 산야(山野)에 돌아다니는 '개와 닭을 어느 나라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했던 땅이다. (그런데 아래 주장을 보면 4현은 4군보다도 크다) 그래서 왜도 큰 고민 없이 백제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인데, 그 위치는 당연히 백제와 왜 사이의 국경에 접했던 땅일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 4현

     

    512년은 백제 무령왕 12년으로 무령왕이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해 '갱위강국'(更爲强國)의 발돋움을 할 때이다. 그래서 왜는 오랜 우방국인 백제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국경지대의 4현을 백제에게 할양한 것인데, 2015년 그곳에서 고대에 존재했던 신미국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개흙 속에 있었기에 오랜 세월을 버텨 우리와 마주할 수 있었던 귀중하고 살가운 유물들이다. 1800년 전의 이곳은 영산강 유역의 저습지로 일대의 사람들은 영산강을 통해 중국과도 교역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수레바퀴와 마차 부속품 (위) / 베틀 유물과 방추차 (아래)
    칼집과 빗 등의 목기
    신창동 출토 오수전 / 중국과의 교역의 증거이다.
    수레바퀴의 측면
    한반도 최초의 마직물
    문짝
    길이 90.7㎝의 현악기 칠궁
    빨래집게
    고깔 모자
    쌍따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경문 청동기'에서 보이는 쌍따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경문 청동기'
    가야금과 같은 형식의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기
    복원된 모습
    발굴 당시의 신창동 유구
    최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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