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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대왕, 후연(後燕) 및 왜(倭)와의 싸움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6. 00:49

     
    광개토대왕은 즉위년인 391년(영락 1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해 석현 등 10성을 빼앗고, 이어 10월에는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수군으로써 관미성(關彌城, 파주 오두산성)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켰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 <삼국사기>)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파주 오두산성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2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고, 393년(아신왕 2년)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395년 시마무렌 강 유역의 비려를 정벌한 광개토대왕은 396년(영락 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제를 토벌하였다.
     
     

    시마무렌 강의 위치(●)

     
    396년 광개토대왕의 수군 원정은 391년의 수군 원정과 달리 멀리 영산강에 상륙했다. 관미성 수군기지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은 영산강을 거슬로 올라와 왜잔국(倭殘國=왜)의 중심지를 공격했고 여러 성을 빼앗았다. 이어 북상하여 백잔(百殘=백제)을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먼저 왜잔국의 과구(소굴)에 이르러 18성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나아가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수□□, □□성, 개이야라성, 전성, □□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민성, 임성, □성, □□□□□□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성, □고로성, 구천성을 취하니 어느덧 백제의 국성(위례성)에 근접하였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倭殘國 軍至窠臼 攻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句牟城 古須耶羅城 莫□□城 □□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農賣城 豆奴城 沸城比利城 彌鄒城也 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 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 細城牟婁城 于婁城蘇灰城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城 □古盧城 仇天城 □□□□□其國
     
    백제왕(아신왕)은 정의(正義)에 대항하여 감히 모든 싸움에 나섰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서 진군하니 백제의 군대가 도성으로 도망가 지켰고 고구려군은 성을 에워싸 공격하였다. 결국 아신왕은 군인 1천 명과 가는 베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왕이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하였다.
     
    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歸穴就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초기 왜의 영역
    나주 반남리 왜왕 무덤 / 백제 국왕의 무덤보다 크다.
    서울 풍납동 풍납토성의 잔존구간
    한성백제의 도성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풍납토성

     

    이후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 되어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신라 땅에 침공해왔으므로 광개토대왕은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399년 백제는 앞서 한 광개토대왕과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교하였고, 이로써 뒤를 든든히 한 '왜'는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에 신라왕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에 복종을 맹세하고 원군을 청하였고, 광개토대왕은 밀계를 내려 신라 구원을 지시했다.(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니 신라성에 가득했던 왜인이 물러갔다. 고구려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왜적의 뒤를 추적해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었고 항복을 받아냈다. 이에 왜구가 궤멸되었고 성안 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이렇듯 상황이 기울자 왜군은 신라 땅에서 철군을 하고, 신라군의 포위에 고립돼 있던 왜장(倭將) 습진언(襲津彦)의 군대를 평군목토순니(平群木菟宿禰)와 적호전숙니(的戶田宿禰)를 보내 구원케 하여 성사시킨다.(十六年八月遣平群木菟宿禰的戶田宿禰於可羅 仍授精兵詔之曰襲津彦久不還 必由新羅人 拒而滯之 汝等急往之擊新羅披其道路 於木菟宿稱等進精兵 莅于新羅之境 新羅王愕之服其罪 乃率弓月之人夫與襲津彦共來 / <일본서기> '응신기')

     
    이에 '왜'는 거의 실지(失地) 없이 고구려 공격 이전의 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은 왜 이런 상황을 묵과했을까? 쉽게 말해 '제 코가 석 자'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401년(광개토왕 9) 2월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이 고구려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하여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습격해왔다. (400년 광개토대왕이 친교를 위해 후연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음에도)
     
    후연 왕 모용성은 표기대장군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시킨후 700여 리의 땅을 뺴앗아 연나라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켰다. 고구려군의 주력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도 가만있지 않았으니 군사를 파견해 숙군(宿君)과 광녕(廣寧=北鎭)을 공격하자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삼국사기>, <자치통감>)
     
    403년 11월 고구려는 다시 후연을 공격했고, 404년 1월에는 후연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을 공격해왔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렇듯 고구려가 후연과의 싸움에 매달리는 동안 이번에는 '왜'가 수군으로 대방(황해도) 지역을 침입하였다.(404년/영락 14년)
     
    왜군은 백제군과 연합하여 대방 석성을 공략하였다. 그러자 광개토대왕 역시 연선(連船)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대동강 어귀(추정)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적이 무수히 많았다.(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石城□連船□□□王窮率往討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광개토대왕은 407년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켜 왜를 공격하였다. 왕의 군대는 왜군의 본성에 대한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 □성, □□□□□□성을 격파하였다.(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王]師[四方]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이상 광개토대왕비의 내용과 여러 사서의 내용을 보더라도 '왜'는 한반도 내에 있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전쟁기념관의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만주 집안 광개토대왕릉
    고구려 안악3호분 대행렬도
    양주 대모산성 동문지 (성문 바깥쪽)
    동문지 (성문 안쪽)
    안내문
    북문지
    안내문
    대모산성에서 보이는 불곡산 / 불곡산에서는 보구려의 보루를 볼 수 있다. 불곡산의 고구려군이 백제 혹은 신라군이 주둔했던 대모산성을 빼앗아 점령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모산성 서문지 앞 석축
    대모산성 1차 성벽
    대모산성 2차 성벽 / 이중의 성벽을 설치했다.
    서문지 부근 양주산성 표석
    성 위에서 본 산성말(산성마을)
    산성말 대모산성 표지판
    디지털 복원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광개토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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