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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대왕비, 사카오 탁본이 됐든 주운태 탁본이 됐든.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13. 00:27

     
    앞서 중국인 금석학자 잉씨(榮禧)가 광서 8년(1882) 임오년에 산동 사람 변단산(卞丹山)을 고용해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만족할만한 탁본을 얻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이때 얻은 탁본은 필시 석회가 덧입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떴을 것인즉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는 이것을 유명한 역사 매거진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소개하며 '정확한 것임'을 더불어 강조했다. 
     
    * 동경제국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는 독일 랑케 사학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엄격한 실증주의와 사료비판을 추구한 학자였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관적 편견이 우선 작용하였던 바, '조선반도' 북부에 거주하는 예맥족을 '만주민족'으로 인식하였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 역사에 편입시키기는 했으되 중국 이주민이 세운 국가로 해석했다. 그는 또 한사군에 대해 연구하며 그 위치를 한반도 내로 끌어들이고, 남쪽에는 임나, 즉 왜의 세력이 존재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잉씨의 것이 최초의 탁본은 아니니 금석학자 이홍예(李鴻裔)는 1880년의 탁본 두 벌을 얻어 1885년에 그중의 한 벌을 유명 금석학자인 반조음(潘祖蔭, 1830~1890)에게 선물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글자가 선명치 않은 게 많아 반조음은 탁본전문가 이대룡(李大龍)을 보내 새로 선명한 탁본을 얻었다고 말한다. (1996년 동국대 임기중 교수가 북경대 도서관에서 발견한 탁본은 이중 하나로 여겨진다) 
     
    1880년 산(産) 탁본은 또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구양보(歐陽輔)는 1921년의 저서 <집고구진(集古求眞): 오래전 진본을 모은 금석문에 관한 책)>에서 1880년 중국인들이 호태왕비에 관심을 갖기 앞서 어떤 뜻있는 조선인이 뜬 두 벌의 담묵(淡墨, 연한 먹으로) 정탁본(精拓本, 정성껏 두드려 얻은 탁본)이 존재한다고 했으며, 이것이 훗날 양수경(楊守敬) 소장 쌍구가묵본의 60여 자를 수정하는 데 일익을 했다고 한다. (북한학자 박시형의 주장)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는 집안 일대의 봉금지(封禁地)가 해제된 직후인 1880년(광서 6년, 메이지 13년) 현지 농민이 벌채 개간 작업 중에  발견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것은 곧 회인현(懷仁縣) 지현(知縣=知事)인 장월(章樾)에게 전해졌고 이에 장월은 관월산(關月山)이라는 부하를 보내 탁본을 떠 오게 하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낀 장태(蒼苔, 이끼)를 제거하기 힘들어 부분 부분 탁본하고 일부는 수기(手記)되었다고 전한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광개토대왕비를 컬러 처리한 사진

     
    여기까지가 1880년 초에 탁본된 비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이후 탁본이 돈이 된다고 생각한 현지인 초천부(初天富) 초균덕(初均德) 부자(父子)가 비문에 불을 질러 이끼를 제거한 일과 (이때 비문 위쪽 표면이 떨어지며 다수의 글자가 상실되었다고 한다) 초씨 부자가 굴곡이 심한 면과 불분명한 글자에 석회를 발라 비문을 뜬 일, 그리고 1883년 일본군 육군참모본부의 사카오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집안을 찾아 탁본을 떠 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직접 뜨지 않고 기존의 탁본을 수집해 갔다는 설도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맞을 것이다)  
     
     

    회가 처발라진 글자들이 확인되는 1918년 사진
    회칠 부분이 명확히 확인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디지털복원 광개토대왕비

     
    사카오 중위가 가져온 탁본을 토대로 육군참모본부는 쌍구가묵본의 이른바 '사카오 탁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을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이란 잡지에 게재하며(<회여록 5집> '고구려고비' 특집호) 광개토대왕비문의 유명한 '신묘년(辛卯年) 기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것이 곧 고대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명확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으로 여겨진다)
     
     

    '사카오 탁본'의 신묘년 기사

     

    신묘년(辛卯年) 기사 외에 일제의 변조 부분으로 지적되는 것이 병신년(丙辛年/영락 10년) 기사인 왜만왜궤(倭滿倭潰) 부분이다. '사카오 탁본'에서 '성에 왜가 가득하였고 그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해석되는 '왜만왜궤'가 1981년의 주운태(周雲台) 탁본에서는 '(고구려가)  왜구를 궤멸시켰다'라는 뜻의 '왜구대궤(倭寇大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또한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왜인이 신라의 성을 무너뜨려 점령했다'고 해석하기 위해 변조를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변조 되었다고 거론되어지는 부분 / 왼쪽이 사카오 탁본이고 오른쪽이 주운태 탁본이다.

     
    하지만 이 또한 둘 다 부질없는 주장이니, 한반도 남부에 본래부터 '왜'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변조 탁본이든 원석탁본이든 아무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왜는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고,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사실도 말한 바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남진(南進) 관련 부분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그와 같은 신라를 구원하고,(391년) 직접 수군을 몰고 내려와 왜국과 백제를 공격해 혼내준 사실(396년)을 적시해 기록한 내용인 것이다.
     
    현재까지 보고된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의 종류는 주요 탁본만도 무려 10여 종에 이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지털 복원으로 전시 중인 광개토대왕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명본(淸溟本/ 2023년 한학자 청명 임창순이 기증한 1889년 원석탁본)에 서울대학교 규장각본, 일본 국립역사박물관의 미즈다니본(水谷本)을 짬뽕해 비문을 복원한 내용을 전시했다고 하는데, 가서 보니 신묘년 기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왜' 관련 기사는 '사카오 탁본'의 내용을 따르고 있었다. 앞서 '왜국이 실재하는 <해동역사>와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그것이 맞다. 변조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복원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광개토대왕비
    디지털 복원된 광개토대왕비 탁본 과정
    광개토대왕비의 1·2면 탁본
    광개토대왕비의 3·4면 탁본
    디지털 복원된 광개토대왕비의 여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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