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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국이 실재하는 <해동역사>와 광개토대왕비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8. 00:11

     
    앞서 몇 차례에 걸쳐 강조했거니와 우리가 동북공정'과 같은 중국의 역사왜곡 작업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박할 만한 '우리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현실이니,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한민국 고대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한서(漢書)》<지리지>,《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을 위시한 중국 측 사서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 다시 말하려는 '임나일본부'설도 그러한즉 일본 학계가 그와 같은 학설을 주장하는 것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그와 같은 내용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저들의 주장에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지어낸 엉터리 이야기',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같은 비논리적인 대응뿐이다. 한마디로 <일본서기>는 위서(僞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백제인이 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실학자인 한치윤(1765~1814)은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저술하며 <일본서기>의 내용을 인용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며 누락시킨 가야사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가야사를 아예 빼버렸다. 그래서 책의 이름도 <삼국사>이다.( <삼국사>는 <삼국사기>의 본래 이름이다) 
     
     

    해동역사
    한옥션에 나온 해동역사
    삼국사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가야를 신라에 포함시켜 나라가 아닌 군소 부족 집단쯤으로 소개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고대사가 일그러져버렸는데, 반면 <해동역사>는 김해의 가락국 등의 가야국은 모두 '왜'(倭)에 속했다'고 정확히 기술했다. 다시 말하지만 '왜'는 한반도 남부에 200년 이상 강국으로 군림하며 가야 제국(諸國)을 지배했으나 고구려의 압박과 신라의 확장에 밀려 6세기 일본열도로 건너간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가 크게 거부감을 느끼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같은 것도 한반도에 존재하던 왜국의 신화로 해석하면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  
     
    * 다만 <일본서기>는 훗날 중국 사서를 모방한 가필이 이루어졌던 바, 본래의  <일본서기> 저작 당시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일본'이나 '부'(府)와 같은 명칭이 후대에 덧붙여졌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나마 우리의 부족한 역사서에 있어 <삼국사기>가 있음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삼국사기>의 편찬을 총지휘한 김부식은 다분히 사대주의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는 자이나, 옛 사서를 참고함에 있어서는 한국사를 우선시하는 자주성을 보였다. 즉 그는 <후한서>에 적힌 기록과 <해동고기(海東古記)>에 적힌 내용이 서로 상충될 때 <해동고기>의 기록이 옳다고 보고 그 기록을 옮겨 적었다.
     
    * <해동고기>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사료로서 기록된 역사서이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외 <삼국사기>는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본국고기(本國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등의 사서를 참고했다고 적고 있다.
     
    * 실은 우리나라에는 교과서에 실린 <유기(留記)>, <신집(新集)>, <서기(書記)>, <국사(國史)> 외에도 많은 사서가 존재했던 것인데, <해동고기>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실학자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도 인용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 남아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재난고

     

    다만 아쉽게도 김부식은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를 몰랐다. 당시는 영토 밖에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만주 집안이 한민족의 영토로 재진입한 이후로도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4면에 빼곡히 새겨 있는 문자(총 1775자)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설사 주목을 했다 해도 그것을 고구려의 비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으니 모두들 여진족의 것으로 여겼다. 

     

    몽골의 원나라가 들어서며 집안 일대는 다시 이민족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것을 공민왕이 수복했는데, 1370년(공민왕 19) 고려 장군 이성계는 원나라 잔존세력인 북원(北元)의 동녕부를 정벌하러 갈 때 집안을 지났다. 그러면서 이곳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도성이라 여겼고, 고려사 역시 '황성'(皇城)이라 표기했다. 일대는 여진족이 오랫동안 정착해 살던 땅이었으니 집안의 고구려 성과 유적들을 금나라의 것이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광개토대왕비도 당연히 금나라 황제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으니 1445년 <용비어천가> '압강(押江, 압록강) 주해(註解)'에서는'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140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옛 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고 나와 있고,

     

    1487년(성종 18) 평안감사 성현이 집안에 가서 읊은 시 '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에도 집안은 여전히 '황성'이었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까마득히 높다고 해 천척비(千尺碑)라고 불렀는데,(실제로는 6.39m) 주변에 강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일 그가 천척비에 가까이 갔다면 대번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후로도 심언광이 중종 25년(1530년) 부근을 찾았고 높이 10장(丈)의 거석을 보았으나 그 역시 여진족 황제의 비로 여겨 간과했다. 이후 청나라가 들어선 다음에는 일대가 청나라가 비롯된 땅이라 하여 봉금(封禁) 지역으로 묶였고, 누구든 출입이 제한되었다. 

     

    까닭에 금석학자 김정희 같은 사람도 근접할 수 없었다. (김정희는 그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 비(碑)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을 해제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으니, 한국인 최초 발견자가 바로 단재 신채호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역사를 연구하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 비문에 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일찌기 호태왕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렀을 때 여관에서 만주 소년 잉쯔핑(英子平)을 만났다. 그와 호태왕비에 대해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들판에 누워 있던 것을 잉씨(榮禧, 만주인 금석학자)가 세웠고 이후 사람들이 대량으로 탁본을 떠 팔았다고 했다. 실제로 가보니 비문은 떨어져 나간 글자가 왕왕 눈에 뜨였고 거기에 석회를 발라 탁본을 뜬 바람에 없던 문자가 생겨나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신채호도 들은 이야기이므로 잉씨가 광개토대왕비를 일으켜 세웠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정황을 보자면 사실은 아닐 듯하다) 다만 중국 금석학자 잉씨는 자신의 글 <난언(讕言)>에 "내가 광서 8년(1882) 임오년에 거듭 산동인 평민 변단산(卞丹山=方丹山)을 일시 고용하여 탁본을 뜨게 하니 완벽한 것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얻은 탁본은 필시 석회가 전혀 칠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떴을 것이다.  

     

    아래 1913년 광개토대왕비 사진의 모델이 된 사람은 망건에 상투, 저고리를 입은 모양새로 보아 만주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여겨진다. 그는 일찍이 농지를 찾아 간도로 이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913년은 신채호가 만주를 여행하기 1년 전이니 어쩌면 아래 조선인은 광개토대왕비를 본 최초 한국인일 수도 있겠는데, 농부인 그가 비문을 식별할 정도의 식견은 갖고 있지 않았을 듯하다. 그는 그저 사진기 주인인 일본인의 모델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1913년 사진

     

    아래 사진 속 건장한 체구의 사람도 상투를 튼 것으로 보아서 조선인임에 분명하고 사진은 역시 1913년의 것이다. 봉금이 해제된 이 무렵에는 적잖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집안을 찾아와 탁본을 떠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군 육군참모본부의 탁본 작업은 이보다 무려 30년을 앞선다. 1883년 (혹은 1884년) 일본군 육군참모본부의 사카오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집안을 찾아 탁본을 뜬 것인데, (혹은 기존의 것을 구해왔다는 것인데, 어느 쪽이 맞는지 정설은 없다) 이것이 1889년부터 이른바 '쌍구가묵본'으로 일반에 알려지게 된다.

     

    * '쌍구가묵'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글자 둘레에 테두리 선을 그린 다음(쌍구)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는 먹을 칠해 탁본처럼 만드는 것으로(가묵)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약 50여 종의 광개토태왕 비문 탁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쌍구가묵본이다.  

     

    사카오 중위의 탁본을 두고 1972년 10월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매우 놀랄 만한 주장을 했다. 이른바 광개토왕비 변조설이다. 이진희의 주장인즉, 1880년 이후 북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밀정 임무를 수행하던 사카오는 집안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목도한 후 이용 가치가 크다고 생각해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변조하여 유명한 '신묘년(辛卯年) 기사' 등 25자를 고쳤고, 이를 바탕으로 쌍구가묵본 131장을 만들어 육군참모본부에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과거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실증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이진희의 주장은 당대 큰 파문을 불러왔고 한·중·일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갖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는 이진희의 변조설이 괜히 그럴듯해 지지했으나, 이후 변조가 없었다는 중국학자 왕건군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 사실 그대로 '왜'가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전재하면 굳이 변조설을 들이댈 필요도 없이 비문이 자연스럽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 아울러, 학자도 아닌 시카오가 광개토대왕비를 읽고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내기 위해 석회를 발라 글자를 고쳤으며 이것을 근거로 쌍구가묵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도 사실 개연상이 무척 희박하다. 

     

     

    1913년 사진
    탁본을 뜨는 1918년 사진

    아래는 1981년 중국 기관에서 텃칠이 된 회를 털어내고 정밀한 탁본을 시도해 얻어낸 이른바 주운대(周雲台) 탁본과 기존의 쌍구가묵본을 비교한 것으로 붉은 테두리의 글자가 유명한 '신묘년 기사'이다. 이진희의 변조설이 등장하기 이전에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의 문장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백제)과 □□□[斤]羅(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됐다. 그런데 이진희는 신묘년 기사가 변조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海'자가 변조되었다고 주장했다.

     

    * 한국학자도 이에 동조해 신묘년 기사의 來渡海破는 來入貢于가 변형된 것이라는 주장과,(김병기) 不貢因破의 글자가 변형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이형구)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이니, 위 문장은 "신묘년(391년)에 왜가 신라 땅에 침공해 왔으므로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주운대 탁본
    쌍구가묵본

     
    광개토대왕이 즉위년인 391년(영락 1년)에 수군으로 백제를 공격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으로도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해,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내물마립간이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해 고구려가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5만으로 왜군을 물리친 사실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으로 확인된다. 이후 요하 북쪽의 비려국을 정벌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수군을 몰아 영산강(추정)에 상륙한 후 왜잔국(倭殘國=왜)과 백잔(百殘=백제)을 공격해 '왜'를 박살내고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 개선한 사실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온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首攻取壹八城.... (58성 나열) .... 而殘主因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이렇게 되면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분명 한반도 남부에 존재한 나라가 되는데, 사람들이 이를 간과함은 공교롭게도 비문에 광개토대왕이 공격한 나라가 國과 百殘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百殘은 당연히 백제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殘國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불분명히 처리하였던 바, 를 무시하고 그저 殘國이라 하거나 혹은 이잔국(利殘國)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그  이잔국을 온조의 형이 세운 비류백제라고 여기기도 했다. (ex: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 by 김성호
     
    그들이 이잔국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쌍구가묵본에서는 殘國이 殘國으로 돼 있기 때문인데,(1889년 이후의 쌍구가묵본에서 대부분) 오래된 탁본에서는 희미하게나마 利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는 바, 김성호와 같은 학자는 이것을 근거로 殘國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하여 또한 이잔국의 정체를 만들어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주운대 탁본에서는 倭자로 여겨지는 단어를 식별할 수 있으니 亻(사람인 변) 정도는 누구에게나 쉽게 보인다. 殘國이 곧 '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殘國= 倭殘國=倭 /그래서 지금은 거의가 '왜잔국'으로 표기된다)

     

    * 2편으로 이어짐.

     

     

    디지털 복원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광개토대왕비
    디지털 복원된 광개토대왕비의 겨울 풍경
    디지털 복원된 광개토대왕비의 봄 풍경

     

    ▼ 관련 글 

     

    광개토대왕비, 사카오 탁본이 됐든 주운태 탁본이 됐든.

    앞서 중국인 금석학자 잉씨(榮禧)가 광서 8년(1882) 임오년에 산동 사람 변단산(卞丹山)을 고용하여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만족할만한 탁본을 얻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이때 얻은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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