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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5. 1. 00:01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아스카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6 세기 중엽, 한반도 남부지역(임나)을 정벌해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후 제후국(번국) 또는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 학계는 이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거짓으로 규정했다. 즉, 일제강점기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쓰다 소키치(津田左右佶),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일본서기>에 근거해 만들어낸 가짜 역사라는 것이다.  
     
    나아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일본서기>마저 위서(僞書)로 보았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럴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일본서기>가 위서라면 거기 쓰여 있는 내용을 깡그리 버려야 옳겠거늘, 일부는 취사선택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왕인박사의 <천자문> 일본 전래설을 들 수 있다. 백제의 왕인이 왜국(倭國)에 <천자문> 등의 책을 전해준 일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일본서기>에 나온다.
     
    그럼에도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아직기, 왕인 등의 이름이 우리의 역사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진짜 역사이고 불리한 것은 가짜 역사라는 선별적 역사인식은 결코 좋은 자세라 할 수 없다. 일견 비겁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니, 불리한 해석에 있어서는 일제가 석회를 발라 탁본해 비문 자체를 변조했다고 말한다. 이 비문변조론은 비문을 직접 조사한 중국학자 왕건군에 의해 부정되었음에도 한국학자들은 지금도 비문이 변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임나'가 216번이나 출현하는 <일본서기>

     
    이는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신묘년 기사에서 두드러지며 기타 대목에서도 주장되지만, 이는 내가 앞서 다른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즉 비문은 변조되지 않았으며, 신묘년 기사는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의 문장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백제)과 □□□[斤]羅(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존의 해석을 버리고,
     
    "신묘년(391년)에 왜가 신라 땅에 침공해 왔으므로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물론 전제는 "왜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라는 것이다. 신묘년 기사 등에서 변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404년 왜가 고구려의 본토인 대방지역을 공격한 일에 대해서는 변조설을 꺼내지 않는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내용에 대해서는 비문 변조다 뭐다 하며 펄쩍 뛰면서도 왜가 고구려를 공격한 영락 14년(404년)의 기사에 대해서는 말을 피하는 것도 다분히 이중적이다.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石城□連船□□□王窮率往討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영락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왜가 수군을 이끌고 석성을 공격하자 이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王師四方合戰斬殺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 □城□城那□□□□□城 
     
    영락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파견시켜 합전하였는데, (왜군의 진영을) 사방 포위하여 파하고,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시켰다. 노획한 갑옷이 1만 여 벌이고 그 밖의 군수물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성, □성 등을 파하였다.
     
    등의 기사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당시 비록 왜는 광개토대왕에게 패했지만 백제와 연합해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고구려의 대방지역(황해도)를 공격할 만큼의 공격력을 갖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서기/응신기>에는 왜가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아지사주(阿知使主)가 이끄는 대방(황해도) 17개 현의 현민(縣民)이 '왜'에 귀부를 해온 까닭이다.
     
    즉 대방지역 사람들은 고구려보다는 백제나 왜에 편입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인데,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자 고구려가 압박을 가했고 이에 왜와 백제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 싸움에 대해 고구려가 승리했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승리했다는 말이 없으나 아지사주(阿知使主)가 398년(응신천황 37) 중국 남부 오나라 지방에 베짜는 공녀(貢女)를 수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적어도 귀부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일본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근거로 하여 아래와 같은 책을 지어 한국을 공격한다.
     
    "알고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 역사, 임나일본부" 
     
     

    일본 극우단체에서 발간한 책

     
     
    사실 일본 내에서 임나일본부는 폐기된 학설이나 마찬가지이다. 당시 일본열도의 왜는 통일된 국가는커녕 부족국가의 형태마저도 갖추지 못한 미개한 상태였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반도 남부에서는 아래의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지만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4세기 금속제 갑옷이나 마구는 지금껏 단 한 점도 없다. 당시 일본열도 내의 어떤 집단도 제대로 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방증이다. 
     
     

    1995년 부산 복천동 38호분 출토 4세기 철제 갑옷과 투구
    김해 양동리 76호분 출토 4세기 갑옷과 투구
    고령 지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5세기 가야의 갑옷과 투구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 갑옷

     
    이와 같은 유물을 보아도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 분명한데, 지금도 극우단체를 비롯한 학계 일부에서는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거 임나일본부설에 동조했던 한국학자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과거 그들은 차마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제 나름대로 임나일본부를 해석했던 바,  
     
    이병도(1896~1989)는 임나일본부를 "후대의 왜관과 같은 것으로, 왜가 가야지방에 설치한 무역기관"이라고 했고, 천관우(1925~1991)는 <일본서기> 속 임나·가야 관계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해 왜 계통의 일부 용병을 거느린 백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북부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나름 진전된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인즉 '임나일본부는 곧 가야 지역에 파견된 백제군 사령부'였다.

    하지만 이것은 답으로써 부족하다. 그리고 저들의 주장에 지금껏 답이 궁하다.  
     
     

    일본서기에 의거해 주장되는 임나일본부

     
    진실을 말하자면,
     
    "고대 왜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이다. 
     
    그것이 (6세기경) 신라에 밀려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왜'가 된 것인데, 이는 훗날 금나라에 밀린 요나라가 서진(西進)해 서요(西遼)라는 나라를 세운 것과 같은 양상이다. 위의 지도에서 임나(任那)로 표기된 곳이 한반도 내에 있던 '왜' 였고 왜(倭)로 표기된 곳이 한반도의 왜가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야마토 왜'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왜가 무려 110차례나 신라를 공격했다고 쓰여 있다. 또 우리의 역사책에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근거로 "변한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어 한(韓) ⋅ 예(濊) ⋅ 왜(倭)가 모두 와서 사갔다. 여러 시장에서의 매매는 모두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았다. 또한 변진은 철을 두 군(郡: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철을 사갔다는 생각은 다분히 현대적 발상으로,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의 신라 공격이나 철 수입 등은 왜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인데, <후한서/ 동이전>의 내용은 '왜'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후한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앞서도 말했지만, 사서에서는 바다를 마주보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해월(海越) 등으로 설명한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왜가 신라를 침공할 때는'범경'(倭人犯境)했다고 쓰여 있다. '국경을 넘어 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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