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소가야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고성의 왜(倭)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3. 00:35

     

    최근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의 내부 사진을 공개하며 이를 소가야 왕국의 것으로 설명하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면서 소가야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으로, <일본서기>에는 고차국(古差國)으로, <삼국사기>에는 고사포국(古史浦國), <삼국유사>에는 고자국(古自國)으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표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나라일 것이라는 한국 학계의 지배적 견해를 반영한 기사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튼 지금 이 지역은 소가야의 영역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런데 이 소가야의 무덤군이라는 송학동 고분은 다른 가야제국의 무덤과는 달리 왜(倭)의 양식이다.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고 천장에 붉은 칠을 한 무덤양식은 일본 규슈지역에서만 110여 기가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2000년 8월 동아대박물관이 송학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결과를 발표했을 때, 일본학자들이 앞다퉈 바다를 건너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단의 사진을 보면 위·아래의 것이 거의 다름이 없다. 위는 우리나라 고성의 것이고, 아래는 일본 규슈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의 것이다.

     

     

    1999년 동아대 발굴단이 조사한 고성 송학동고분 2호분 석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것

     

    사실 이 고성 송학동 고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발굴 조사된 적이 있다. 도리이가 이 무덤을 주목한 이유는 외형이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유사한 형태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부는 전방후원분의 일반적 내부와 달리 3기 무덤방이 연접해 축조된 것으로 밝혔는데, (<그림 1>) 그럼에도 도리이는 외형만으로써 송학동 1호분을 옛 임나일본부의 증거로 내밀었다.(<사진 1)> 

     

    해방 이후에도 한국측은 도리이의 주장에 대해 이렇다 할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내부는 구덩식 돌방무덤(수혈식 석실분),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분) 세 가지 형태를 보여 전방후원분과는 달랐지만, 외부는 분명 <사진 1>처럼 전방후원분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가지 묘안을 냈다. 안의  3기 무덤방을 근거로 봉분을 아예 3개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소가야 특유의 묘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사진 1 /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보이는 송학동 1호분
    그림 1 / 도리이 류조가 그린 내부
    전방후원분이 3개 봉우리를 가진 무덤으로 변신한 경남 고성 송학동 무덤
    고성 송학동 고분군 / 송학동 1호분은 직경 33m, 높이 4.5m에 이르는 대형분이 남북으로 3기가 길게 붙어 있다

     

    사실 이와 같은 3연봉의 형태는 근방의 창녕고분군을 비롯한 가야고분 어디에도 없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유래가 없는 고분 형태이다. 그럼에도 지금도 그것을 소가야 특유의 무덤 형태라고 우기고 있는데, (나아가 이로써 고성의 전방후원분 논쟁은 20여 년 만에 종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와중인 1999년 부산 동아대학교 발굴팀이 1호분 동쪽의 2호분을 발굴했고, 그 결과 맨 위의 사진과 같은 주칠(朱漆)한 무덤방이 발견되었던 바, 일본학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그 이듬해인 2001년 벽두, 전남 해남에서 고대 전방후원분 1기가 발굴됐다.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에서 발견된 그 무덤은 완전한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제껏 발견된 전남 지역 13여 기의 전방후원분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앞 방형분은 길이 38m, 폭 22m, 높이 8m, 뒤 후원분은 길이 44m, 높이 9m)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무덤 방의 형태와 크기였으니, 길이 너비는 각각 4m가 넘고 천장 높이가 2m에 달하는 큰 방에다 (참고로 무령왕릉 무덤방은 너비 2.4m, 길이 3.7m, 높이 3.1m) 체가 주칠이 되어 있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이 무덤방이 위의 송학동 2호분, 혹은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알 수 있다. 

     

     

    해남 방산리 고분 석실 내부
    석실 입구
    완전한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보이는 해남 방산리 고분

     

    이 무덤의 발견에 일본이 보인 반응은 뜨거웠다. 그 뜨거웠던 NHK의 취재 열기와 일본과 한국 측의 궁색한 주장을 앞서 '또 다시 발견된 한반도 왜왕의 무덤'에서 자세히 실은 바 있는데, 여기서 궁색하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전방후원분에 대한 한국 측의 설명이 너무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측의 주장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니 당시 열도(列島)에는 바다 건너 한반도를 침공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일본도 우기기는 매 한가지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4세기 일본을 통일한 야마토 정권이, 구체적으로는 진구(神功)황후가 군대를 이끌고 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였다가 562년 신라에게 멸망당했다는 설이다. 그 주장의 주된 근거가 <일본서기>인데, 거기에 광개토대왕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가 덧붙여진다. 유명한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누누히 설명했지만, 지금껏 광개토대왕비의 이 내용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돼 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의 주체가 되는 사람은 광개토대왕이지 '왜'가 아니다. 따라서 수군(水軍)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일 터, 그저 문장 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될 일이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고구려)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침공해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수 차례 걸쳐 말했지만, 본래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  <후한서> 동이전 

     

    <그림 1> / 중국사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그림 2> / 일본 사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5세기 확장된 영토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신묘년인 391년 이후의 상황은 광개토대왕비의 내용 그대로로서, 고구려가 한반도의 남부까지 지배했다. 하지만 그간 힘을 키운 '왜'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고 기해년(399년)에는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해 왔다. 이에 고구려의 신민이었던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했고, 광개토대왕은 경자년인 서기 400년, 5만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몰아냈던 바, 이에 관한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九年己亥百殘爲誓與倭和通王巡下平壤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다시)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며 노객(신라왕)으로 하여금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에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이 그 충성심을 긍휼히 여겨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鹽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고구려군이)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곧 항복하였던 바, 그 성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었고 성안 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安羅人戍兵新羅城□□其□□□□□言□□□□□□□□□□□□□□□□□□□□□辭□□□□□□□□□□□□□殘倭潰□以隨□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至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請□□□朝貢


    안라에 파수병과 주둔병을 두었다. 신라성(이하 비문이 지워져 알 수 없음) 남은 왜적들이 궤멸되어 달아났다. 옛적에는라 매금(임금)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였고 감히 부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와서 부탁을 하니 (태왕께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였고) 이에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 조공하였다.

     

    이렇듯 상황이 기울자 왜군은 신라 땅에서 철군을 하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일본서기> '응신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광개토대왕비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가라, 혹은 가라는 위의 소가야나 금관가야로 여겨진다.     

     

    十六年八月 遣平群木菟宿禰的戶田宿禰於可羅 仍授精兵詔之曰襲津彦久不還 必由新羅人 拒而滯之 汝等急往之擊新羅披其道路 於木菟宿稱等進精兵莅于新羅之境 新羅王愕之服其罪 乃率弓月之人夫與襲津彦共來

     

    401년 8월, 평군목토순니와 적호전숙니를 임나가라에 파견했다. 정병을 주어 이르기를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필시 신라가 길을 막아 지체되고 있을 것이니 그대들이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순니 등이 정병을 이끌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이르니 신라왕은 두려워 복종하였다.그리하여 구월군의 인부 백성들을 이끌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이상을 보더라도 '왜'는 수군으로 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니, 신라와 '왜'는 국경을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정말로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한다. 그리고 왜군이 수군으로 고구려의 남쪽 황해도를 공격하는 동기가 <일본서기> '응신기'와 <속 일본기>에 등장하니, 아지사주(阿知使主)가 이끄는 대방(황해도) 17개 현의 현민(縣民)이 '왜'에 귀부를 해온 까닭이다.(원문 생략) 

     

    이에 고무된 '왜'는 고구려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게 되나 404년과 407년의 전투에서 왕창 깨지고, 이 전투는 '왜'를 급격히 기울게 만든다.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和通殘兵□石城□連船□□□王窮率往討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

     

    영락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왜가 수군을 이끌고 석성을 공격하자 이에 (광개토)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王師四方合戰斬殺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 □城□城那□□□□□城

     

    영락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파견시켜 합전하였는데, (왜군의 본성을) 사방 포위하여 파하고,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시켰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그밖의 군수물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성, □성 등을 파하였다.

     

    다음 회에서는 고구려와 '왜'의 싸움을 좀 더 들여다 보려 하는데, 그 전에 지금의 고성이 왜국의 땅이 된 연유가 <삼국사기/거도전>에 에 나와 있는 바 이를 부기하고 맺기로 하겠다.  

     

    거도(居道)의 성(姓)과 출신은 알 수 없다. 탈해이사금(AD57~80) 때 벼슬을 하여 간(干)이 되었는데 이때 우시산국(于尸山國, 경남 고성 추정)과 거칠산국(居柒山國, 경남 김해 추정)이 이웃에 있으면서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의 관리로서 은근히 그 나라들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매년 한 차례씩 장토 뜰에 말떼를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타기 시합을 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를 말아저씨(馬叔)라고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도 이를 항상 보아왔으므로 신라인들의 연례 행사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도가 이를 이용해 두 나라를 일거에 점령하였으나 신라의 왕성으로 가지 않았으니 이곳이 왜인의 땅이 되었다. (AD79) 

     

     

     

     

    전쟁기념관의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디지털 복원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광개토대왕비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