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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인 강수(强首)도 왜국 사람이었을까?
    잃어버린 왕국 '왜' 2022. 8. 1. 23:53

     

    강수(强首)는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에 등장하는 인물로 흔히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불린다. 강수는 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는데, 이름이 본명 우두(牛頭)가 아닌 강수로 소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하 <삼국사기>)

     

    강수는 중원경(中原京, 충북 충주) 사량부 사람으로 아버지는 석체나마(昔諦奈麻)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았는데 아이가 정말로 머리 뒤쪽에 툭 불거진 뼈가 있었다. 석체가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라고 알려진 이에게 가서 물었다. (※황복사비편 등에 따르면 '나마'는 관직명이다)

     

    ​“이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는데,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나쁩니까?)"

     

    현자가 답했다. 

    "내가 듣기로 신농씨(神農氏)는 소의 머리 모양이었고, 고요(皐陶)는 입이 말과 같았다 합니다. 성현들은 이처럼 그 생김새 역시 범상치 않은 데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필시 비범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와 아내에게 일렀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닌 듯하오. 잘 길러서 장차 나라의 인재로 만들어야 할 것이오."

     

    강수는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문장의 뜻에 통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속내를 알고자 하여 물었다.

    "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학을 공부하겠느냐?"

     

    "제가 듣기로는 불도는 세속을 떠난 가르침이라 합니다.저는 인간세계에 사는 사람인데 어찌 불도를 공부하겠습니까? 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네 뜻대로 하거라.”

    그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다. 배운 것은 비록 얕았지만 깨달은 바는 한층 고상하고 원대하여  걸출한 인물로 성장했다.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관직을 두루 거치니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

    무열대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했는데, 그 가운데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그가 왕 앞에서 한번 보고 해석한 후 설명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데가 없었다. 왕이 놀랍고도 기뻐, 서로의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며 이름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며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왕이 말했다.

    "경의 두상을 보니 (그 단단한 모양새가) 강수(强首)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오."

    왕은 그에게 당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회답의 표를 짓게 하였다.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하였다.

     

     

    통일신라 때 세워진 충주 탑평리 7층석탑 / 이경훈 님 사진

     

    이상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ㅡ 충주 사량에  살던 석체나마의 아들은 머리 뒤에 큰  혹을 가진 일종의 기형아로 태어났다.

     

    ㅡ 그러자 부모가 이를 근심해 현자에게 물었는데, 현자는 옛 성현들도 생김새가 기형이었다며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했다.

     

    ㅡ 이에 부모는 되레 그 기형의 두상을 강조해 아이의 이름을 우두(소머리)라고 지었다. 

     

    ㅡ 훗날 그가 유학을 공부해 학식이 높아지자 그 명성을 들은 태종 무열왕이 불렀다. 당나라에서 보낸 국서에 해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였는데, 우두는 그것을 술술 해석하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왕이 놀라며 기뻐하며 그의 출신지와 이름을 물었는데, 우두라는 그의 이름과 특이한 두상에 즉석에서 강수(단단해 보이는 머리를 지닌) 선생이라는 호칭을 지어주었다.

     

    ㅡ 그리고 그가 훌륭한 답서(答書)를 지어주자 더욱 반해 (사람들이 함부로 '소머리'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왕 자신도  임생(任生, 임나가량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만 불렀다.

     

    이상에서 우리는 충주에 살던 강수는 본래부터 그곳 사람이 아니라 임나가량이 고향임을 알 수 있다. 임가가량은 지금의 김해지방(추정)으로, 광개토대왕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임나가량과 임나가라는 같은 곳이라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영락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을 곧 복속시키고 안라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 

     

     

    구리시 광개토광장의 복제비

     

     광개토대왕 재위 10년인 서기 400년, 왜국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태왕은 이에 응답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한다. 그리하여 남거성에 이어 수도 금성을 공격해 성안에 가득했던 왜군을 축출시키고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마저 함락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종발성은 임나가라, 즉 왜국의 중요 성으로 앞서 말한 진경대사비문에서도 임나와 함께 출현한다. 그래서 나는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는 그 조상이 임나의 왕족이며 그들이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에게 투항한 후 신김씨(新金氏, 김해김씨)를 하사받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 '진경대사탑비가 말해주는 임나일본부')  진경대사 김심희의 조상은 당시 임나라고도 불리던 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왜'는 한반도의 왜국이다 / 한반도의 왜가 열도로 넘어갔음은 앞서도 누누이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의 봉림사 진경대사탑
    봉림사가 있던 창원에 복제된 진경대사탑

     

    결론을 말하자면, 강수는 본래 임나가량에서 태어났으나 사민정책(徙民政策, 강제 이주정책) 혹은 공무원 부친의 지방 발령 등으로 중원경(충주)로 이주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씨가 석(昔)씨라는 사실로, 그 아비의 이름이 석체(昔諦)라는 것은 이미 서두에서 서술했다. 이것은 <월성(경주)석씨 대동보>에도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불천위의 진실이다. 

     

    <월성(경주)석씨 대동보>에는 석오원(昔五源)ㅡ(석)체(諦)ㅡ(석)강수(强首)ㅡ(석)우연(羽延)·(석)종철(宗喆) 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강수의 할아버지 석오원은 신라 11대왕 조분이사금의 3남인 석지(昔祉)의 후손으로서 강수는 월성석씨 시조 석탈해의 18세 손이 된다.

     

     

    여우비 오는 날의 첨성대
    분황사 / 월성석씨 족보에는 석오원이 첨성대와 분황사를 건립한 인물로 나온다.

     

    앞서 말했듯 지금의 김해지방으로 추정되는 임나가량(=임나가라=임나가야)은 왜의 땅이었다. 그렇다면 강수의 조상도 왜국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이것은 섣부른 판단으로, 강수의 고향 하나만을 가지고는 단정 지을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연재한 「잃어버린 왕국 '왜'」 시리즈에 따르면 지금의 울산 부근에서 경주로 와 정착한 왜인 호공 세력과, 왜국의 동북 1000리에 있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이주한 석탈해 집단(이상 <삼국사기>)과는 석탈해가 호공의 밥그릇을 뺏은 이래 내내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상 <삼국유사>) ☞ '왜인' 호공(匏公)에 대한 놀라운 해석

     

    그리고 앞서 '이서국(伊西國)의 침입을 물리친 신라의 수수께끼 군대 죽엽군(竹葉軍)'에서 말한 것처럼 왜인과 석씨 세력과의 갈등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신흥 이주세력 김씨와 힘을 합한 왜인 호공 세력에 의해 석씨 왕족은 와해되고 귀족 혹은 평민으로서 신라사회에 편입되는데, 아마도 그 대가로서 본래 왜의 땅이었던 임나가량 지방을 식읍으로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는 이미 '왜'가 열도로 쫓겨간 후이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왜의 전성기인 4세기 왜국의 영역은 아래와 같거나, 더 클 수 있는데, 이렇게 비정을 한 후 <일본서기>를 읽으면 마음도 편할뿐더러 우리 역사와의 놀라운 일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2006년 발굴된 후, 지금껏 아무런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전남 순천의 대가야계 고분군에 대해서도 답을 얻을 수 있다.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일본사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대가야계 유물이 다량 출토된 순천 서면 운평리 1호분
    대가야계 금귀걸이가 출토된 순천 운평리 3호분
    순천 운평리 2호분 봉토에서 발견된 11기 석곽묘 중 7·8·9호 석곽
    순천 덕암동 고분에서 발굴된 가야계 유물 / 국립광주박물관 (순천광장신문)
    순천 운평리 고분군 위치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4현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 입구
    해남 용두리 전방후원분 입구
    해남 방산리 전방후원분 입구
    순천 운평리 고분 출토 귀걸이(왼쪽)와 고령 지산동 고분 출토 귀걸이 / 전라남도 해안과 경상북도 산골에서 같은 4세기의 동일한 묘제와 유물이 발견될 수 있을까? 이처럼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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