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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와 왜 연합군이 맞붙은 비사벌 대전
    잃어버린 왕국 '왜' 2022. 12. 25. 17:08

     

    6세기 중엽, 신라는 비사벌(比斯伐)을 침공했다. 비사벌은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는 경상남도 창녕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불사국(不斯國),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자발(比自㶱)국이 있던 곳이다. <일본서기>의 설명은 보다 구체적이니, 왜(倭)는 신공황후 49년(AD 369년) 비자발국을 비롯한 임나 7국을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망라하자면 비자발, 남가라(南加羅), 녹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이었다.

     

    이 일대는 우리고대사에서 흔히 가야라 불리고 있으며, 그중 비화가야(非火加耶)라고 불리기도 하는(〈삼국유사〉 5가야조 /〈삼국사기〉 지리지 화왕군조) 비자발국의 흔적이 창녕 고분군으로 남아 있다.

     

     

    창녕 고분군 전경 / 단일 국가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집단 무덤군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창녕 고분군 / 문화재청 사진
    2018~2019년 발굴된 도굴되지 않은 창녕 고분
    2019년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 장신구
    2019년 창녕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마구 무기류
    창녕 고분군에서 출토된 관모

     

    6세기 비사벌을 침공할 때의 신라는 과거 왜의 공격에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때의 신라가 아니었다. 6세기 중엽의 신라는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배했던 고구려를 이미 북쪽 멀리 밀어낸 상태였고, 백제와는 거의 비등한 국력이 되었으며, 김해평야를 두고 강국 왜와 일전을 벌일 정도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6세기 왜의 신라 침공은 무려 27차례나 기록될 정도로 빈번하였으나 6세기 중엽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 (※ 늘 말하지만 당시의 왜국은 한반도에 있었다) 

     

     

    포항 대련리의 고구려계 무덤 / 포항 냉수리에 이어 무려 10기나 되는 5세기 고구려계 굴식 돌방무덤이 2020년 포항-부산간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발견됐다. 고구려의 힘이 포항 일대까지 미쳤음을 말해준다. (사진출처: '분홍이의 Travel & Beauty')
    대련리 고분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금은 장신구
    중국 사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일본 사서에서 말하는 왜의 영역 / 5세기 확장된 영토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물론 이때는 왜가 일본열도로 쫓겨가기 전이다.

     

    6세기 초반까지도 왜는 한반도 남부에서 넓은 영토를 가지고 강력한 힘을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계체천왕 6년(AD 512년)에는 제 땅의 일부인 임나 4현을 오랜 동맹국인 백제에게 할양하는 통 큰 양보를 보이기도 하는데,(<일본서기>) 물론 이는 왜 측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백제의 압력에 의해 내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실제 기록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을 청했다. (백제 무령왕 시절) 그러자 다리국수 수적신압산(穂積臣押山)은 "이 4현은 백제와는 인접해있지만 일본과는 떨어져 있으며, (백제와는) 아침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백제에 할양하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계체 6년조 기사)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 4현은 상다리(上哆唎) · 하다리(下哆唎) · 사타(裟陀) · 모루(牟婁)의 4곳이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은 이곳이 영산강 지역이라고 주장하나(아래 그림)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세상에 자신들의 고향을 타인에게 내주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2007~2008년, 4세기 왜 전성기 때의 고분이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던 바, 왜가 이 지역을 4세기 후반까지 지배했음을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 세인들을 놀라게 한 이 유적들은 발굴 후 지금껏 아무런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전남 순천의 대가야계 고분군'이라고만 칭해지고 있다. 2008년 순천 운평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광주국립박물관과 순천대박물관에서 위의 설명을 달고 전시 중이다. ('한반도의 왜'를 인정하지 않고는 사실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4현
    발굴된 순천 운평리 고분
    운평리 고분군 전경
    운평리 고분 출토 금제 귀걸이
    운평리 고분 출토 토기
    운평리 고분 출토 그릇 받침대

     

    다시 돌아와 말하면, 6세기 신라는 부흥했다. 신라 22대 지증왕(재위 500∼514년)은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마립간의 호칭을 왕으로 했고,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새롭게 고쳤다. 그 뜻이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내적 정비를 마친 지증왕은 영역의 확대에 나섰으니 512년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복속시켰고 514년 아시촌(阿尸村, 위치 불명)을 점령했다.

     

    뒤를 이은 법흥왕(재위 514년∼540년)불교를 공인하고 법령을 제정·반포하였다. 아울러 독자적으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도 제정해 사용했다. 그만큼 힘이 붙었다는 뜻이었다. 이에 정복사업에 나섰으니 대가야와 연합해 백제를 견제하고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합병했다. 신라는 다음 진흥왕(재위 540~576년) 때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으니,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임진강 북쪽으로 밀어내고 백제 성왕과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백제에게 승리한 후에는 가야 지방을 공격하였으니 왜의 속국이었던 임나 10국, 즉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嗟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연합군은 562년의 비사벌 전투에서 패하며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때 왜는 대장군(大將軍) 기신 남마려숙미(紀臣 男麻呂宿禰, 일본에서는 '키노 오미 오마로노 스쿠네'로 읽는다), 부장군(副將軍) 하변신 경악(河邊臣 瓊缶, 카와베노 오미니에)이 병력을 이끌고 임나군을 지원했으나 임나 연합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 이때 신라의 지휘관은 병부령 이사부 장군과 사다함 장군이었으며, <일본서기>에는 왜군 장수가 백제 군영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는 바, 백제군 또한 왜+임나 연합군에 합류해서 신라군과 싸운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하고 불리한 것은 삭제하던 <일본서기>도 이 비사벌대전(<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내가 임의로 붙인 명칭임) 만큼은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패인 듯 여겨진다) 이 지역은 562~565년에 걸쳐 신라에 병합되었고 이후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흠명천황 23년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서 임나 10국이 멸망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가 562년으로 신라가 대가야를 완전 멸망시켰다고 기록된 <삼국사기>의 시기와 동일하다. 나는 이때 진흥왕이 창녕 지방을 공격해 왜+가야 소국 연합군을 대패시킨 비사벌대전이 벌어졌다고 보고 있는데, 그 전적비가 지금도 창녕 땅에 남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창녕비는 훗날 정복지를 둘러보고 세운 순수비가 아니라 562년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전승 기념비이며, 1978년 발견된 단양 적성비는 그곳까지 영토를 넓힌 것을 기념해 세운 척경비이다.

     

     

    창녕의 위치
    창녕비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으며, 건립연대는 562년(진흥왕 23)이다.
    단양 적성비 / 신라가 단양 일대를 정복했을 때 공을 세운 (김)이사부, 비치부, (김)무력 등의 장수 이름이 보인다.

     

    <일본서기>를 보면 즈음하여 각국의 외교전 또한 치열하게 전개되니, 흠명천황 2년(541년) 4월에는 왜와 임나 여러 나라(任那諸國)의 대표자들이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고, 흠명 4년(543년) 9월에는 백제 성왕이 진모귀문(眞牟貴文), 기주기루(己州己婁), 마기모(麻奇牟) 등을 왜에 보내 부남(扶南, 캄보디아)의 보물 등 진귀한 것을 바치며 왜와의 친선을 강화한다. (부남의 보물은 백제가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역사넷 해석)

     

    또 흠명 5년(544년) 3월에는 성왕이 사신을 보내 왜 조정의 실권 있는 신하 연나사(延那斯)와 좌노마도(佐魯麻都)를 친(親)신라파로 보고 흠명천황에게 추방하기를 요청하였으며, 흠명 5년 11월에도 신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임나 대표단의 회의가 열렸으나 성왕은 관산성에서, 가라국(대가야)을 비롯한 임나 10국은 비사벌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부산박물관 가야특별전에 전시된 임나 주요국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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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