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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1호 도선사 유항렬의 집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24. 21:39

     

    도선사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직업일 수 있다. 나 역시 그래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직업이 도선사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선은 도선사라는 명칭부터 생소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도선사가 하는 일은 의외로 단순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이었다. 한자로는 '인도할 도(導)'에 '배 선(船)' 자를 쓴다. 

     

    도선사(導船士, pilot 혹은 maritime pilot)
    국가에서 인정하는 도선사 면허를 취득한 후 항만에서 선박을 원활하게 조종하여 항행 또는 접안 및 이안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가. 대한민국 항만에 입·출항하는 선박의 바닷길을 안내하고 접안 일을 돕는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배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니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흔히들 비행기의  이착륙보다 어려운 것이 배의 도선이라고 말한다. 항구의 경우는 공항과 달리 입항할 곳의 지형을 알지 못하므로 도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항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바다 밑 암초나 수심의 변화, 혹은 급격한 조류의 변화로부터 배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정박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도선법이 있어 총톤수 500톤 이상의 외국적 선박, 국제 항해에 취항하는 500톤 이상 국적선 선박, 2000톤 이상 국내 내항선은 강제도선을 하게 되어 있다. 즉 큰 배의 경우는 반드시 도선사가 승선해서 배를 이끌어야 된다는 국제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항공모함과 컨테이너선뿐 아니라 대형 어선과 크루즈선, 잠수함 등도 도선사가 승선해 배의 정박을 이끌어야 한다.  

     

     

    도선을 위해 배에 오르는 도선사

     

    도선사가 배에 오르면 배의 선장이나 함장은 거의가 깍듯한 거수경례로서 맞는다. 도선사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경력을 필요로 하는데, 까닭에 대부분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기도 하거니와 직업 자체에 대한 경외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입항이 완료되면 선장이나 함장은 도선사에게 '굿 잡(good job)'이라는 인사를 한다. 좋은 직업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도선을 잘해줘서 고맙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는데, 역시 경외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도선사는 '해기사의 꽃'으로 불리며 배를 타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 된 지 오래이다. 초 고연봉의 수입도 수입이지만 만족도와 자긍심도 높아  직업 만족도 순위에서도 1~2위를 다툰다. 본 적은 없지만 도선사의 차량에는 도선사임을 알리는 마크 혹은 깃발이 장착된다고 한다. 그만큼 명예롭다는 것이나, 반면 그만큼 기술력이 요구된다. 

     

    도선 시 도선사가 직접  타륜을 잡는 경우는 없다. 대신 항해사와 타수에게 이러저러한 지시를 내리며 필요할 경우 예인선(Tug)들에게 명령을 내려 도선할 배를 밀거나 당기게 만든다. 바로 여기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데, 큰 해양사고가 아니더라도 큰 배는 자중(自重)이 엄청나 부두 접안 시 사소한 접촉에도 선체가 크게 긁히거나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항만 시설에도 손상을 입히게 된다. (도선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액이 수천억에서 수조 원에 이른다고 함)  

     

    그렇다면 이와 같은 도선사는 누가 할 수 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다른 기술직 시험에 비해 어렵지 않아 뵈니, 총톤수 6000톤 이상 선박의 선장으로 3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일단 누구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부터 쉬운 조건이 아니니, 그런 배의 선장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소 10년 이상의 항해 경력을 필요로 한다. 3등 항해사부터 선장까지는 보통 15년이 소요된다.   

     

    시험은 1차 도선 수습생 전형시험(선박운용, 항로표지, 법규, 영어)과 면접을 봐야 하고, 여기에 합격하면 배정받은 도선구에서 6개월간 200척 이상의 도선 실습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마치면 2차시험 자격이 주어지는데, 과목은 실기 및 면접시험이다. 여기에 합격하면 도선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선사 수는 2023년 현재 259명이라 하며, 매년 10명 정도가 선발되는데 최근에는 20명 정도로 수가 늘었다고 한다. 또 경력에 따라  도선하는 배의 경중이 달라 1년차는 3만톤 이하, 2년차는 5만톤 이하, 3년차는 7만톤 이하 선박을 도선할 수 있다고 한다. 자격 조건에 경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연령대가 높은 편이지만 정년도 길어 68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는 일제강점기에 도선사가 된 유항렬(劉恒烈, 1900~1971)이다. 유항렬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25년에 도쿄상선학교(東京商船學校)를 졸업하고 선장으로 활동하며 도선사에 도전했다. 당시 도선사는 일본인에게도 꿈의 직업이었으니 조선인이 도선사가 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유항렬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응시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으니 업무 담당자는 지원서 용지도 내주지 않았다.  

     

    유항렬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독부 해사과를 찾아가 따졌다. 없는 자격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규정대로 적용해 달라는 주장이었는데, 당시 자격조건에는 조선인은 도선사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들어 있지 않았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설마 조선인이...? 하는 생각에 따로 금지조항이나 불이익 규정을 두지 않은 듯했다. 이에 그는 해사과장으로부터 응시자격을 인정받게 되었고 지원서를 얻어와 응시할 수 있었다.

     

    1937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물론 한국인 최초의 도선사였다. 이후 유항렬은 인천항 도선사가 되어 1970년 정년퇴임 때까지 도선사 임무를 수행했다. 

     

     

    도선사 시절의 유항렬
    당시 신문의 인천수선조합(仁川水先組合) 광고 / 수선(水先)은 도선(導船)의 일본식 표현으로, 3명의 인천항 도선사 중 유항렬 외 2명은 일본인이다.

     

    도선사로서의 그의 활동은 하나하나가 역사였으니 해방 후 조선에 들어온 미군함정을 도선하였고, 인천상륙작전 때는 인천에 들어온 유엔군 함정을 안전하게 이끌었으며, 1.4 후퇴 때는 인천항의 모든 배를 안전하게 출항시킨 후 대피했다. 1970년 11월 21일 마지막 도선을 마칠 때까지 그는 총 3천 여 척의 배를 도선했으며 2009년 '해기사 명예 전당' 헌정되었다. 유항렬은 정년퇴직 이듬해인 1971년 12월,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살던 내동 집은 일찍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4년 내항 입구에 그를 기린 '도선사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번 개방된 내항에 갔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사진을 올리려 한다.  

     

     

    인천 중구 개항로 45번길의 유항렬 주택 / 한국 사람이 지은 최초의 서구식 벽돌집으로 발코니를 남쪽이 아닌 바다 쪽인 서향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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