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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인천측후소와 기상캐스터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1. 16. 00:06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상관측은 1883년 9월 1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3년 6월 16일 인천해관(세관)이 창설되고 총세무사인 독일인 묄렌도로프의 지시에 의해 세관에서의 기상관측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개항장인 부산·원산·인천 항구에서 안전하고 원활한 배의 운항을 위해 각 항구의 세관에서 일기를 살핀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첫 기상관측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기상관측은 1904년 부산·목포·인천·원산 및 용암포에 측후소가 설치되며 이루어졌다. 측후소의 업무는 일반적 기상관측업무 외에도 지상·고층·해상·항공·농업·위성·레이더 등의 특수 기상관측과 지진관측이 포함되나, 초기에는 일기·습도·풍향·풍속·기압과 같은 일반적 관측만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 진다. 아래 사진은 인천에 세워졌던 측후소의 모습이다.
당시 전국에 세워졌던 측후소는 다가온 러일전쟁에 대비해 일제가 설치한 것으로, 압록강 용암포에 특별히 기상관측소를 마련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인천에는 1904년 4월 6일 일본중앙기상대 산하 조선관측소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흔히 위 사진 속의 측후소라고 여겨지지만, 그곳이 아닌 현 중구청 뒤쪽 송학동 골목에 있던 스이쯔(水津)여관 내에 있었다. 스이쯔여관 내 조선관측소는 1904년 3월 5일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발효시킨 대한제국칙령 제60호에 근거한 것으로 부산·목포·원산·용암포의 측후소도 이에 근거해 세워졌다.
스이쯔여관은 일본인 스이쯔(水津淸三)가 세운 여관으로 수월루(水月樓)라고도 불려졌다. 위치는 현 중구청 부근, 최초의 일본인 민단사무소(중구 관동 1가 14번지) 후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887년 일본인 리키다로가 대불호텔을 신축하기 전부터 있던 2층 목조 여관이었다. 철거 시기는 정확지 않으나 대불호텔과 더불어 쇠퇴했다는 것을 보면 스이쯔여관 역시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며 역할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이나 스이쯔여관이 쇠퇴한 이유는 1900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부터 여행객이 서울로 직행한 까닭이었다. 즉 인천항에 내린 여행객들이 예전처럼 호텔이나 여관에 묶을 필요가 없어진 것인데, 그래도 스이쯔여관은 이토 히로부미의 단골 여관이었다는 아사오카(淺岡)여관과 함께 오래 존속됐다고 한다. 대불호텔의 고객이 주로 서양인들이었던 것과 달리 스이쯔여관과 아사오카여관은 주고객이 일본인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공무(公務)로 오는 일본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말한 대로 스이쯔여관은 일본인이 주고객이었다. 따라서 인천측후소도 편리성을 도모해 스이쯔여관 내에 두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호텔 내에 임시공관이나 임시사무소를 설치하는 현재의 사례와 다르지 않은 경우로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명칭도 '일본중앙기상대 제3 임시관측소'였다.
스이쯔여관 내 관측소는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인천측후소 신축 청사가 완료되자 이전했다. 신축된 측후소는 목조 2층 69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 근대과학과 관측장비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관측이 이루어졌다. 이후 1907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인천측후소는 통감부관측소 관제의 제정에 따라 통감부관측소로 명명되었고, 다른 관측소는 그 예하의 지소로 편입되었다. 이에 인천측후소는 명실공히 조선 최고 측후소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니 경성, 평양, 대구, 부산의 관측소도 그 '지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인천의 통감부관측소는 조선 내의 경성, 평양, 대구, 부산, 목포, 강릉, 용암포, 원산, 성진, 웅기, 중강진 등 13개 관측 지소를 관할했음은 물론,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한 후로는 대련 관측소를 비롯한 만주 전역과 천진, 청도, 제남 관측소까지 통괄하였다. 또 일본중앙기상대,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 정보를 교환했다. 1933년 1월 12일 중강진 지소가 측정하여 인천관측소에 통보한 영하 43.6도는 우리나라에서 기록된 가장 추운 기온이다.
인천측후소의 위상은 한일합병 후에도 변함없었다. 1910년 10월 합병 후 전국에는 지방측후소 13곳, 간이기상관측소 또는 우량관측소 약 300곳이 생겼지만 이들의 기상관측사업은 총독부 직할의 인천측후소가 총괄했고 이때부터는 총독부관측소로 불렸다. 총독부관측소는 지자기관측, 상층기류관측도 하였으며 일기예보, 폭풍경보, 기상전보 등도 발령했는데, 일기예보의 경우는 일기 별로 색깔을 달리 한 깃발을 월미도에 게양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총독부에서는 1929년 1월 기존 관측소 옆에 다시 새로운 청사를 건립했다. 아울러 천문대 시설도 마련하였으니 1929년 9월 적도의(赤道儀)라고 부르는 구경 15㎝ 초점거리 225㎝의 배율의 굴절 천체망원경을 설치하여 천문관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망원경에 의한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천문관측의 시작인데, 1939년에 관측한 혜성에 관한 자료를 비롯한 다양한 천문관측의 기록이 전해진다. (이상의 기록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때의 폭격으로 건물과 함께 다량 소실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8월 인천측후소는 국립중앙관상대가 되었다. 하지만 1953년 11월 국립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됨에 따라 다시 인천측후소가 되었고, 1992년 3월 국립중앙관상대 예하 지방기상청 인천기상대로 개칭됐다. 이는 사실상의 격하이나 그간 인천측후소가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특히 바다와 하늘을 아우르는 기상 측후 활동을 해왔다는 데, 그간의 업적이 더욱 부각된다.
즈음하여 국립중앙관상대도 국립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뀌었는데, 이 무렵 들은 김동완 통보관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지금은 아름다운 여성 기상캐스터들이 일기예보를 하지만 당시 김동완 씨가 중앙관상대 통보관으로 방송 일기예보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는 수영비행장(현 김해국제공항)측후소에서 근무하다 중앙관상대 공채에 뽑혀 통보관이 되었는데, 아직 지방에 있던 그의 부인이 앞으로의 운을 물어보려 점집에 갔다가 용한(?) 점쟁이를 만나 벌어진 실화다.점쟁이 : 남편은 뭐 하시는 분입니까?
김동완의 아내 : 중앙관상대에 있습니다.
점쟁이 : (갸우뚱거리며) 남편 이름이 뭐라고?
김동완의 아내 : 김동완....
점쟁이 : (버럭대며) 어때 대고 거짓말이야! 내, 중앙(서울)에 있는 유명한 관상쟁이들은 다 아는데, 그런 이름은 못 들었어!
기상통보관도 요즘은 기상캐스터로 이름이 바뀌었고 넷플렉스 드라마 '글로리'로 인해 새삼 주목을 받는 직업이 되었다. 문동은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박연진이 기상캐스터로 나오기 때문이다. 10년 이상 실제 KBS 기상캐스터를 지냈던 오수진은 인천 출신이다. 일기예보가가 끝나면 늘 싱그런 미소를 머금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분인데 요즘 얼굴이 안 보여 물어보니 지난 9월 28일 퇴사했다고 한다.
그는 결혼 전에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심장 이식을 받았다. 2주 안에 공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뇌사자의 심장을 공여받아 새 삶을 얻었다. 이후로는 건강한 삶을 영위했으나 최근 다시 안 좋아져 치료를 위해 퇴사했다는 후문이다. 부디 조속히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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