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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개방된 인천 내항과 백범 강제노역의 자취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23. 23:39
단언컨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었을 때의 모습을 지금 찾기는 불가능하다. 우선은 간척으로 바닷가 쪽 지형이 모두 바뀌었고 그 위에 인천항이 건설되며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까닭에 굳이 당시의 흔적을 찾겠다 하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부근의 ‘기념탑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는 길이 유일하다. 교회 안의 바위는 인천 교회사를 연구하던 박철호 목사가 2008년 발견한 바위로, 옛 제물포항에 존재하던 것이다. (☞ '알렌보다 먼저 상륙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 바위가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돌을 옮겨온 것이 아니라 그 돌이 있는 곳에 교회를 지었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지금의 바다로부터 한참 안쪽인 이곳이 항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구에 어떤 시설물이 있던 것은 아니니 1900년까지도 제물포항에는 작은 거룻배만 정박할 수 있었다. 항구로서의 축항(築港)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당시 축항시설이라곤 긴 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만든 잔교(棧橋)와 바닷가에 돌출해 쌓은 둑과 같은 돌제(突堤)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 잔교와 돌제를 통해 거룻배를 탔고 다시 바다 가운데의 큰 배로 옮겨 탔다. 인천에 상륙하려는 사람은 그 반대로 움직였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도 있었다.
* 인천항 최초의 잔교는 개항 이듬해인 1884년 9월부터 다음 해 8월까지 1년 여에 걸쳐 위에서 말한 기념탑교회 앞에서부터 해망산 파라다이스 호텔 아래까지 조성됐다. 공사비는 인천 상인연합이 공동으로 출자했다.이와 같은 불편은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인천항 축항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음에도 워낙에 열악한 조건의 환경이었기에 시설이 쉽지 않았던 것이니 특히 10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는 시설공사에 대한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막이 독을 만드는 축항공사가 선결되어야 했지만 어마어마한 공사비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유(有)관심 속에 계속 뒤로 미루어졌다.
반면 부산항은 일층 바빠졌다. 인천항은 접안이 불편했고, 게다가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는 큰 배의 경우 만조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되는 어처구니없는 수고가 뒤따랐다. 이에 조선으로 들어오려는 배들은 부산항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산항은 공사가 쉬운 환경 덕에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의 축항공사가 이루어져 명실공히 조선 제1항구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자 인천의 일본거류민을 중심으로 인천항의 축항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이 일어났던 바, 1908년 인천축항기성회를 조직해 으쌰으쌰 해댔다. 그럼에도 조선정부와 통감부는 예상되는 막대한 건설비용에 공사를 꺼렸는데 한일합방이 기정사실화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마침내 인천항 축항을 결정하였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여러 가지로 비용이 소요되는 조선 합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합병을 서두르는 군부에 반대해, 해도 천천히 하자는 지공책을 내세웠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1911년 6월 11일 드디어 인천항 축항공사의 첫 삽을 떴다. 데라우치는 우리에게는 수탈자로서 악명 높은 존재이나 그 역시 통념과 달리 조선을 부유하게 만들려는 노력에 매진한 사람으로 일본 본토의 세금 1/3을 가져다 조선에 써 오히려 본토에서의 원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물론 당시 일본은 조선의 영구 지배를 획책하고 있었으니 자기네 땅으로 생각하고 투자한 것이다)
앞서 여러 번 언급한 <백범일지>에도 그 일이 실려 있다. 즉 백범 김구가 죄수로서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되었을 때, "불과 반나절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됐다. 그러나 면할 도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했다"고 언급했던 바로 그 공사였다. (김구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감옥소에서 인천감옥소로 이감된 그는 이후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 8월 가석방되었다)
1918년 10월 27일 드디어 시설 축항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자못 획기적이었으니 이른바 이중갑문식 독이었다. 지금의 내항 1부두 일대에 지어진 이중갑문식 독은 2개의 독게이트와 그 사이에 선박을 수용하는 갑실을 가지는 형식으로서 유럽의 항구나 운하에서 많이 채용되는 방법이나 동양에서는 인천항이 최초였다. 이와 같은 인천 갑문 독은 통과에 30여 분이 소요되기는 했지만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으며 거룻배를 이용함이 직접 육지로 하역함으로써 하역 수수료도 절반으로 줄게 되었다.
이후 인천항으로의 물동량이 크게 증가했고, 이에 일제는 인천 북항 쪽에 두 번째 갑문 독을 계획했으나 태평양전쟁과 패망으로 결국 착수되지 못했다. 대신 1974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잇는 현대식 갑문이 신설되면서 현재의 내항 전체에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항은 인천을 국제항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발목이 잡고 있다. 인천 내항의 경우 3만 톤까지의 배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 내항은 지금은 신항과 북항 등에 밀려 쇠락 중이다. 이에 인천시와 해양수산부는 인천 내항의 부활을 위한 항만 재개발사업을 진행 중인데, 이름하여 ' 제물포 르네상스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써 지난 14일 내항 1부두와 8부가 개방되었다. 그동안 '국가 보안 시설'로 규정돼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했던 지역으로 축항이 완성된 1918년부터 치자면 105년만의 개방이다. (1·8부두 42만9천㎡ 중 일부 구간인 6만5천547㎡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곳은 앞서 말한 김구 선생 강제 노역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모저모 볼 것이 있을 듯해 한번 다녀와봤는데, 아직은 '제물포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될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인천시는 이곳에 2028년까지 30억 원을 투입해 이벤트광장과 축구장, 농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순환산책로, 시민편의시설 등을 설치할 계획이라는데 도식적이긴 해도 고층주상복합건물 계획이 없다는 것 자체로서 기쁘기 한량없다.'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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