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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 - 이화장·조양루·석양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6. 23:46

     
    1575년(선조 8년) 동서 분당이 일어났다.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니,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소윤(小尹)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됐다. 김효원은 기다렸다는 듯 퇴짜를 놓고 자기 쪽 사람인 이발을 밀어넣었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며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심의겸이 서쪽 정릉방에 살았던 관계로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김효원은 동쪽 낙산 밑 건천방(연지동이화동효제동원남동・인의동・연건동・종로5・6가)에 살았으므로 그들 일파는 동인으로 불려졌다.
     

     

    경복궁 건춘문 건너편의 사간원 터

     
    훗날 율곡 이이, 용재 성혼, 송강 정철, 초당 허엽,(허균의 아버지) 백사 이항복, 서애 유성룡,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충돌하는 그 동서대전(東西大戰)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김효원이 살던 곳이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필시 이화장 부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명한 이화장은 조선시대에는 신숙주의 집이 있던 곳으로, 중종 때는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살았고, 부근에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도 살았다.
     
    강세황은 경기도 안산에서 살다 한성판윤이 되며 이 동네로 이사왔으며, 석양루(夕陽樓) 부근 개울가 바위에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각자를 새겼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강세황의 암각문은 1960년대 초까지도 이화장 후원에 존재했으나 이승만 망명 후 일대가 주택가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이화장 담장 바위 / 강세황의 '紅泉翠壁'(홍천취벽)' 도 이와 같은 바위에 새겨졌을 것이다.
    강세황의 자화상

     
    신광한 집 앞에 있었다는 석양루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이 살았던 집이다. 인평대군은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서 그저 평범한 왕족이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인조)이 되며 졸지에 임금의 아들이 되었다. 그 밖에도 운이 좋은 편이어서 병자호란 후 첫째 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이 심양에서 7년간 쎄빠지게 고생한 반면, 인평대군은 1년 만에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왔다.
     
    둘째인 봉림대군이 인조에 이어 왕(효종)이 되자 이번에는 졸지에 임금의 동생이 되어 호사를 누렸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복형제인 까닭에 우애가 엄청 깊었다. 그래서 동촌(東村)에 이웃하며 살며 집도 마주 보게 지었는데, 동촌 봉림대군의 집은 아침 햇살이 잘 든다 하여 조양루(朝陽樓), 인평대군의 집은 석양이 아름답다 하여 석양루(夕陽樓)라 불렸다.
     
    <동국여지비고> 제택(第宅) 조를 보면 "인평대군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있다. 용흥궁과 마주하고 있으며 석양루라고 한다. 단청을 칠하고 담벽에 그림을 그려서 크고 아름답기가 장안에서 제일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으로 쓰인다"라고 되어 있다. 장생전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곽(棺槨)을 제조하는 곳으로 1865년(고종 2) 이곳으로 옮겨왔다. 조양루는 기실 효종의 잠저 어의궁(於義宮=용흥궁=조양루)에 있던 중층 누각의 이름이었으나 곧 당호(堂號)가 되었는데, 이는 석양루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기타 여기저기 소개되는 글들을 보면 형제는 의가 좋아 두 집 사이에 방울을 단 동아줄로 연결하여 흔들며 안부를 물었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두 사람의 집은 어머어마하게 컸을 듯하다. 지금의 지번으로 확인하자면 효제동 22번지의 어의궁 터와 이화동 27-2번지의 인평대군 집터는 약 1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국여지비고>에서 "크기가 장안 제일"이라고 언급돼 있고, 또 정조 때 제작된 <인평대군방 전도>에서도 어마어마한 규모가 확인되니 거짓은 아닌 듯하다.  
     
     

    인평대군방 전도
    봉림대군의 집 조양루에서 컸을 500년 된 은행나무 / 종로구 연지동 삼양사 마당에 위치한다.
    봉림대군이 살던 조양루
    옛 정신여고 뒤 회화나무
    이 회화나무 역시 조양루에 있었을 것이다. (높이 21m, 둘레 3.9m)
    인평대군의 집 석양루
    종로 EM활용센터로 쓰이는 인평대군 집터 / GPS를 찍고 가면 나오는 곳이다.
    예전에 있던 석양루터의 표석 / 종로 EM활용센터 옆 이화동주민센터 화단에 있던 석영루터 표석은 2015년경 철거됐다.


    효종은 즉위 후에도 석양루를 찾아 정을 나누었고,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역모의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은 의연히 동생을 감쌌다. 게다가 인평대군은 장사에도 재주가 있어 고기장수의 거간꾼으로 큰돈을 벌기까지 했으니 돈과 권력을 모두 향유한 최고의 인생을 누렸다. 그러나 하늘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1658년(효종 9) 인평대군은 백약(百藥)이 무효한 이름 모를 괴질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3개월쯤 후에 죽었다. 겨우 34살이었다. 
     
    인평대군의 병세가 심하다는 소식을 들은 효종은 1658년 6월 13일 석영루를 찾아갔으나 그가 문턱을 넘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효종은 상심한 나머지 석양루에 주저앉아 며칠을 떠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어의궁이라는 이름의 잠저가 된 조양루에 머물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마지못해 궁으로 돌아왔다. 효종은 이후 동생의 제사까지 직접 돌보려 했으나 이 역시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 의좋은 형제가 살던 어의궁과 석양루는 과거 표석이 서 있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즉 어의궁은 효제동 22-3 한빛웨딩홀 앞 길에 표석이 있었고, 석양루는 이화동 149-1 이화동주민센터 앞에 표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 표석들을 모두 없앤 이유를 모르겠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세월이 흘러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낙산에는 또 다른 상극의 거물 정객이 살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이승만이요, 다른 한 사람은 박헌영이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처음에는 마포대로 4길 122의 옛 안평대군 정자 담담정(淡淡亭) 자리에 지어진  마포장 등지에 세를 얻어 살다가 실업가 권영일 등의 독지가가 마련해 준 돈으로 이화동 1번지 옛 장생전 자리에 위치한 이화장(梨花莊)을 구입해 항구적인 거처를 마련했다.
     
    이화장은 전체가 사적 제49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첫 내각이 조각된 조각당(組閣堂)은 가히 역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서너 명이 들어가기도 비좁은 작은 방이라 의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알고보니 이 방에 국무위원들이 모였던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내각을 구상하고 발표한 장소였다. 그 외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및 사랑채, 1985년 이화장의 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 등이 있으나 현재는 전체가 공개되지 않는다.
     
     

    이화장 조각당
    본관
    본관 앞 이승만 동상
    입구의 사랑채
    이화장 내 암벽
    뒤에서 본 이화장
    낙산 오르는 길의 이승만 글씨 '경천애인'
    근방의 샘 천룡천

     
    박헌영은 전라도 함열 갑부 김해균이 제공한 혜화장(惠化莊)에서 살았다. 혜화장은 호남 만석군의 아들인 김해균의 경택(京宅, 지방 부자가 서울에 마련해 놓은 집)이었는데, 박헌영이 1945년부터 3년간 머물며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따라서 그 집 또한 역사적인 장소가 되겠지만, 어렵사리 아래 사진만 구했을 뿐 지번을 확인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집의 위치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이지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혜화장 사진
    비숫한 장소를 추적했으나 실패했다. / 낙산에서 내려본 모습
    낙산의 낙조
    낙산에서 본 서울의 이곳 저곳
    개와 함께 낙산 끝에 선 이 중절모의 사내는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건너는 우리 도시인의 모습일까?
    낙산의 소나무
    마로니에 공원의 '오우가'(五友歌) 시비
    고산 윤선도의 집터에 세워졌다. / 고산도 동촌에 살았는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글 선생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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