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 경기도 양평에서는 이제껏 총 8곳에서 고인돌 무리가 발견됐다. 옛날옛적부터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겠는데, 그 바람에 고인돌이 훼손되기도 했다. 후대 사람들의 인구증가로써 선대의 자취인 고인돌에 대한 훼손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이중 대표적인 예가 양평군 개군면 고인돌 무리로, 남한강 줄기 동쪽 강변을 따라 20 여기 이상이 산재했던 고인돌들은 양덕리 소공원으로 옮겨진 몇 기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소재불명이다.
그 외 양서면 양수리 고인돌을 비롯해 향토유적 제32호로 지정된 대석리 7번지의 고인돌 무리, 강상면 병산리 578-1, 강하면 전수리 1118, 양서면 대심리 263-1, 서종면 수능리 158-3, 개군면 앙덕리 31-9, 양평읍 회현리 71 등의 고인돌은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양수리 고인돌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 동석마을에서 두물머리마을에 이르는 길가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산재돼 있다. 이 중 5기가 팔당댐 공사로 인해 1972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물머리 인근의 고인돌(일명 두물머리 고인돌)과 양수파출소 앞 고인돌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양수파출소 앞 고인돌이 친숙한 이유는 아무래도 대로변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자리하기 때문일 텐데, 아쉽게도 원형은 상실했다. 이 고인돌은 굄돌 2개에 덮개돌을 얹은 전형적인 북방식(탁자식) 고인돌로서 2.7x1.1x0.9m의 덮개돌과 1.5x0.9x0.45m의 굄돌을 갖췄으나 나머지 1개는 유실된 상태이다.
출토 유물도 북방식 민무늬토기편으로, 청동기시대 표지유물과 일치한다. 고조선의 양식의 무문토기편이라는 말도 있다. 만일 그것이 고조선의 것이라면 양평은 필시 고조선의 남쪽 국경 부락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두물머리 인근에 있는 일명 두물머리 고인돌은 위치 자체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할뿐더러 바로 인근에 400년 이상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물과 더불어 기막힌 풍광을 이루는 까닭에 더없는 앙상블의 장소가 됐다. 게다가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 혹은 유명 CF의 배경으로도 알려져 있고 접근성도 뛰어나 안 와 본 사람보다는 와 본 사람이 많을 듯 여겨진다.
두물머리 고인돌이 주목 받는 이유는 이와 같은 위치도 위치거니와 돌에 깊게 새겨진 성혈(星穴)이 이채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풍수학자는 이곳에 오면 강력한 에너지의 파장을 느낀다고도 하는데,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신비로움을 느끼기는 충분하다. 이 고인돌은 일찍이 사라 넬슨이 B.C 2325년의 것으로 추정한 이래 그쯤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 (☞ '암사동 신석기 유적을 세계에 알린 사라 넬슨')
이 사라 넬슨 교수의 추정은 놀라울 정도이니 최근 양평군이 고인돌사랑회에 의뢰하여 측정한 결과,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에서는 3,900±200B.P가 나왔으며, MASCA 계산법으로는 4,140±240B.P의 수치가 나왔다. 시료는 덮개돌 밑 아래 잔돌로 얕게 이루어진(약 15cm 정도)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이 쓰였다고 하는 바, 비교적 명확한 측정 결과로 여겨진다. (그래서 지금은 B.C 2665~ 2140년의 것으로 보는 편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두물머리 고인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 중의 하나라는 또 다른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다만 두물머리 고인돌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느티나무 당굿* 제단으로 사용되기 위해 옮겨진 적이 있는지라 위치 교란에 대한 유감이 남는다. (느티나무 아래 있던 이 고인돌은 2004년 새 제단이 마련됨에 따라 2005년 두물머리 강변으로 옮겨져 벤치로 사용되다 다시 처음의 위치 비슷한 곳으로 옮겨졌다)
* 양수리 양서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9월 2일 느티나무를 모시는 당제를 올린다. 두물머리 큰 느티나무는 '도당할매', 그 옆의 다른 느티나무는 '도당할배'라 부르는데,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느티나무도 '도당할배'라 불려지는 바, '도당할매'는 일부이처(一夫二妻)가 아닌 일처이부(一妻二夫)의 우먼파워를 지닌 셈이다.
말한 대로 두물머리 고인돌 덮개돌에는 신비로운 성혈이 새겨져 있으며 모두 22개소에 이른다. 이중 5개는 매우 뚜렷해 지름이 10cm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이 뚜렷한 성혈은 북두칠성 별자리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다른 대안을 찾아서가 아니라 구멍이 2개 모자라서이다. 북두칠성이 7개의 큰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인지라....
앞서 '인류 최초의 천문기록,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말했거니와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은 청원 아득이마을 고인돌, 전남 화순 절산리 고인돌, 경남 고성 송학동 고인돌, 경남 함안 동촌리 고인돌, 경북 영일 칠포리 고인돌, 대구시 동내동 고인돌 등을 비롯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중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성혈은 예외 없이 7개이다. 두물머리 고인돌의 성혈이 무엇인지 천문학회 차원의 고찰이 있었으면 한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 정선과 충청도 단양에서 올리온 배가 이곳을 경유해 한양의 마포나루 등으로 나아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인 만큼 한강의 모든 배들이 모두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된 것이니 은성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두물머리 나루터는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도 은성함을 이었다.
하지만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더불어 일대가 상수원 보호구역과 그린밸트 등으로 묶이며 영화는 저물고 나루터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은 이곳에 겸재 정선의 그림 '독백탄(獨栢灘)'을 새겨 옛날을 그리게 만들었으나 정선의 '독백탄'은 실은 지금의 팔당 물안개공원 부근에서 그린 것이라 두물머리에서는 비슷한 풍경조차 찾을 수 없다.
아무튼 이곳에는 정선의 '독백탄' 속 돛단배를 한 장인의 손을 빌려 재현해 놨었는데, 장마철이어서인지 배가 보이지 않는다. 전시된 또 다른 그림, 이건필의 '두강승유도(斗江勝遊圖)'가 두물머리의 예전 그 시절과 가까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