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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조선 최초 기독교인 오다 쥬리아의 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7. 6. 16:09

     
    조선 최초의 기독교인은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5)을 지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천주교는 그를 창립성조(創立聖祖)로 인정해 받들고 있으며, 그가 살았다는 서울 청계천 옛 수표교 근방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이 세워졌다. 
     
     

    청계천 전태일기념관 앞의 한국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

     
    하지만 보다 정확성을 기하자면 그의 6대조 할아버지 이경상(李慶相)을 들어야 될지도 모른다. 이경상은 1638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붙잡혀 간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를 보필하던 사람으로, 당시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교화될 때 더불어 기독교에 물든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기독교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귀국할 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역시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현세자는 귀국할 때 과거 북경에서 자신을 보필했던 중국인 궁녀와 환관 등과 함께 들어왔는데, 그들이 평소 자기 손가락으로 이마와 가슴을 찌르는 해괴한 짓을 하고 십자가에 매단 벌거숭이 남자 상(像)을 경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그들은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고 예수의 십자가를 모셨던 것이다. 이에 주변사람들이 그것을 주술적 행위로 여겨 서양잡귀가 붙었다고 경원시했는데, 이들 중국인들은 인조에 의해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세자빈 또한 사사되자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자 이경상은 곧바로  고향인 포천으로 가 은거했다. 인조는 제 아들 소현세자를 임금의 자리를 빼앗을 정적(政敵)으로 여겨 죽였던 바, 한양에서 얼쩡대다가는 자신 역시 위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그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죽을 때 한 가지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궤짝을 개봉하면 멸문(滅門)의 화를 당할 것인즉 때가 올 때까지 절대 개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비보(秘寶)처럼 전해지던 그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후손 이벽에 의해 열렸다. 그는 상자 안에 있던 한문본 서학서적을 탐독하고 교화되었고, 다시 친척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과 정약용 형제를 교화시킴으로써 조선에 천주교 바람을 몰고오게 된다. 이벽은 남양주 마현(馬峴)에 살던 정약현(정약용의 맏형)의 누이와 혼인하였던 바, 정약용의 큰 자형이 되었는데, 이승훈 역시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함으로써 모두 가까운 친인척 관계가 형성됐다.
     
     

    정약용 형제가 살던 마재 풍경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처음 접한 것은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서 큰형수(큰형 정약현의 처)의 상을 치르고 돌아가던  두미협(현 남양주 팔당 부근) 배 위에서였다. 그는 이때  이벽으로부터 종형인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는데, 훗날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우리 형제는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당시의 경이로움은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서 끝없는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다." (惝怳驚疑 若河漢之無極)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 교리를 처음 들었던 팔당 두미협

     
    이상을 보더라도 이벽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듯하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벽에 거의 200년을 앞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오다 쥬리아로,(쥬리아는 세례명 율리아의 일본식 발음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침공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데려간 조선인 고아 소녀이다. 고니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쟁 중 고아가 된 이 아이를 데려가 양녀로 삼았고, 그녀는 천주교를 신봉했던 고니시 가문의 영향으로써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한국에 최초로 상륙한 서양인 신부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의해 온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이다. 그는 1594년 12월, 종군신부 자격으로 경상남도 곰내(웅천)에 상륙해 고니시의 부하들과 함께 미사를 가졌는데, 창원시에는 이것을 기려 2015년 세스페데스 공원을 건립했다. 공원이 개장될 때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인사가 대거 참석해 뻑적지근한 행사를 가졌던 것이 기억난다.(그것이 축하할 일인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창원시의 세스페데스 공원 사진


    세스페데스가 데려갔는지, 그와 동행했던 일본인 천주교도 후칸이 데려갔는지, 아니면 고니시가 직접 데려갔는지 기록은 분분하지만 그 전쟁고아가 일본으로 가 기독교도가 된 것은 명확한 사실로서, 이후 모두가 가톨릭으로 귀화한 고니시 가문에서 자랐고 1596년 예수회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율리아(쥬리아)라는 세례명을 얻는데, 상당한 미인이었다는 후문이며, 이것이 도쿠가와 막부의 기독교 탄압 때 감형 사유로써 작용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훗날 절대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첩이 되기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한 스토리와 함께 창작된 스토리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린 뒤 오다 쥬리아에게 신앙을 버리고 나의 소실이 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쥬리아는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불편하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하는데, 이 내용은 2018년 발간된 <조선인 성녀 줄리아>라는 소설에도 나온다. 1973년 개봉됐던 <쥬리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상이 주된 스토리다. 
     
     

    신숙과 허장강이 주연한 '쥬리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훗날 생애에 관한 첨삭은 있었지만 오다 쥬리아는 일본 기독교도 사이에서는 성녀(聖女)로 추앙되고 있고, 유배지였던 고즈시마 섬에는 기념비와 십자가도 세워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 2023년 4월, 일본에서 오다 쥬리아의 편지가 발견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편지에는 "1593년 13세였던 자신이 한성에서 11살짜리 동생, 몸종과 함께 왜군에 붙잡혔다"고 쓰여 있었으며, 이후 그렇게 헤어진 남동생과의 극적인 상봉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다 쥬리아는 당시 시즈오카 슨푸성(駿府城)에 살았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 헤어진 남동생에 대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였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용모의 '운나키'라는 조선인 사내가 죠슈번(현 야마구치현)에 하기(萩) 모리 가문의 휘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편지는 그 운나키에게 쓴 것으로, "만일 당신이 내 동생이 맞다면 에도의 스푼성으로 와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실려 있다.
     
     

    시즈오카 슨푸성

     
    다행히도 그 사내는 남동생이 맞았으며 남매는 타국 땅에서 극적인 상봉을 이루었다. 동생 운나키는 또 이에야스도 만나 고소데(小袖, 일본 전통 의상에서 소맷부리가 좁은 옷)와 칼·말 등을 하사받은 뒤 하기로 돌아갔는데, 소문을 들은 죠슈의 번주(蕃主) 모리로부터 무라타(村田)라는 성과 생산량 쌀 200석 규모의 수확을 내는 봉토를 하사받는다. 이후 그는 무라타 야스마사(村田安政)라는 사무라이로서 무라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쥬리아의 편지는 무라타 가문의 후손인 무라타 노리오가 2021년 12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박물관에 이를 기증하며 세상에 나왔고, 박물관은 전문가의 조사와 연구를 거쳐 2023년 언론에 공개했다.
     
     

    쥬리아가 1609년 8월 19일 남동생에게 보낸 친필 편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사했다는 고소데
    하기박물관에 전시된 편지와 안내문
    쥬리아의 유배지 고즈시마섬 아리마 전망대에 한국교계에서 세운 십자가 / 가톨릭평화신문 사진

     
    당시 일본에서는 배교하지 않은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처형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오다 쥬리아는 감형되어 1612년 3월 이즈(伊豆)제도의 오시마(大島) 섬으로 유배를 갔는데, 이곳에서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아 다시 니시마(新島)를 거쳐 최남단 고즈시마(神津島)로 옮겨졌고, 39년 뒤인 1651년 사망했다. 고즈시마에서는 매월 5월 오다 쥬리아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는데, 그밖에도 소설·연극·영화·만화로 재생산되는 강력한 문화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오다 쥬리아가 사라졌다. 하지만 과거에는 있었으니 1972년 일본 고즈시마에 있는 쥬리아 묘지의 묘토(墓土) 일부를 국내로 들여와 서울 양화진에 있는 절두산성당 마당에 묘지를 조성했던 적이 있다. 묘비에는 '성녀 오다아(吳多雅) 줄리아의 묘'라고 새겨졌으며 생애가 기록되었다. 김대건 신부 동상 바로 왼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묘와 묘비가 사라졌다. 대략 2007년 전후로서, 성당 측에는 이에 대해서 초지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분명 제 마당의 묘가 없어졌음에도.  
     
     

    절두산성당의 김대건 신부 동상 / 오다아 줄리아의 묘는 왼쪽 솔숲에 있었다.

     
    그 사정이 못내 궁금해 절두산성당을 다니는 사람에게 부탁해 물어보게 하였는데, 그 역시 마찬가지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대신 그는 박순집의 묘는 고향인 인천 갑곶 순교성지로 옮겨졌다고 가르쳐 주었다. 박순집은 나이 17세 때 새남터 형장에서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목격했으며, 이후 병인박해 때 처형당한 수많은 천주교도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옮겨 매장시킨, 성웅(聖雄)으로 불려지는 인물이다. 그래서 1961년 8월 절두산성당에 이장되어 묘와 묘비가 조성됐다.
     
    그런데 얼마 전, 절두산성당에 가보니 (지금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되었다) 박순집의 묘는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사정인즉 인천 갑곶 순교성지에 또 하나의 묘가 마련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겠는데, 알아보니 그의 묘는 인천가톨릭대학 내에도 있었다. 
     
     

    병인박해 형장에 건립된 절두산성당 / 당시 잠두봉 꼭대기 형장에서 참수된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 이후 잠두봉은 절두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절두산성당 내의 가톨릭 순교성지 표석
    절두산성당 내 박순집 묘 안내표지
    박순집 베두로 묘
    박순집 베두로 공적비

     
    이후 제삼자를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오다 쥴리아의 묘를 없앤 것은 알려진 것과 달리 그녀가 '최초의 조선인 여성 가톨릭 신자'라는 명확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서양선교사들의 기록이 그러하기에 이에 근거해 묘를 조성했다는 처음의 말과는 달리.... 하지만 신자도 아닌 내가 그것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고, 다만 "그렇다면 조선 최초의 여신도는 누구였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었다. 
     
    아무래도 강완숙 골롬바(1760~1801)가 아닐까 싶다. 강완숙은 1795년 1월 4일 서울에 도착한 첫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1752~1801)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이다. 주문모 신부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조선 천주교가 북경 파리 외방전도회에 지도할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써 오게 된 중국인 신부로서, 가회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1795년 4월 5일 부활절 날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다. 강완숙의 집은  최인길의 집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던 바, 자연스럽게 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최인길의 잡자리에 건립된 가회동성당

     
    주문모는 서울과 지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포교에 힘썼으나 과거 천주교도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후 그는 강완숙의 도움으로 그녀의 북촌 집 광에 숨어 있다가 황해도 황주로 피신했다. 황해도 해안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포교했던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이때 자신만 살기 위해 도망가는 것은 도리가 아님을 깨닫고 서울로 돌아와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했으며,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때 그를 도왔던 역관 최인길과 강완숙 등도 함께 순교했다.  

     

    2013년 옛 성당 자리에 한옥 양옥 컬래버레이션으로 신축된 가회동성당
    역관 최인길의 집이 이러했을까?
    가회동성당은 건축문화대상, 올해의 한옥상, 서울시 건축대상 등 굵직한 건축상 6개를 휩쓴 '명품성당'이다. 하지만 관람에는 제한이 있어,
    '북촌 최고의 뷰'라고 불리는 옥상은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 이외는 개방되지 않는다.
    하긴 개방되면 관람객이 미어터질 것이니 현명한 방법인 듯도 하다. 옥상 사진은 가회동성당 누리집 자료사진에서 가져왔다.
    내부 사진 역시 가회동성당 누리집 자료사진에서 가져왔다. / 가회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미사가 올려진 역관 최인길의 집자리에 지어진 역사적 건축물이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있는 강완숙 골롬바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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