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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거사 이규보의 인생과 요즘의 정치 판사들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3. 28. 23:22
<동명왕편> <백운소설>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한 마디로 평하자면 호탕한 성품의 명문장가이다. 이것은 그가 지은 글로도 증명된다. 이를 테면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지었다는 시(詩) 속의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몸
자잘한 세상살이 따지느니 그저 편안히 살다 가련다
生死猶未知
細事安足算
하는 마음 자세나
평소 구름과 물을 사랑했나니
전생에 혹시 승려였는지 모르겠도다
素習愛雲水
前身莫是僧
하는 평소의 언급이 그러하다. 그는 자신의 아호도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러하고 실은 권력에 아첨해 관로(官路)를 열어간 전형적인 해바리기성 관료라는 평도 적지 않은데, 아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자면 그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이규보는 1168년에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 황려현(黃驪縣)에서 태어났다. 황려현에 살 때 이규보는 별 볼 일 없는 평민 집안의 자식이었던 듯 보이니, 뛰어난 시작(詩作)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음에도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고려는 음서제도(요즘의 아빠 찬스)가 활성화돼 꼭 과거를 패스해야만 관직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벌이 일천했던 이규보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까닭에 그는 당대 문인들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에도 끼지 못했다. 위진(魏晉)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흉내내 오세재, 임춘, 이인로 등 7명의 문인이 만든 그 모임에서 좌장 격인 오세재는 이규보를 문재를 아껴 회원으로 추천했지만 패싱당했다. 집안도 돈도 관직도 없는 몸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세재가 죽고 나서 그 빈 자리에 충원될 기회가 왔으나 그것은 오히려 이규보가 찼다. 그는 자리에 불려졌으나 술에 잔뜩 취해 죽림고회를 모욕하는 시를 남기고 돌아왔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2014년 비신이 세워졌다. 예전 모습 고달사지 부감 / 지금은 황폐하지만 이규보가 살던 시기의 황려현 고달사는 은성함의 극치를 이루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경기역사문화원 사진)
지금은 좀 듣기 어려운, 하지만 어릴 적 부모 세대가 많이 썼던 말 중에 와이로라는 단어가 있었다. '뒷돈' 같은 개념의 그 말은 참으로 널리 쓰였고, 또한 모든 일에(특히 공무원에게는) 와이로를 써야 통한다는 것이 통념인 사회였던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어지간히 부패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물론 와이로 같은 것이 사라진 세상이 되었지만, 만연되지만 않았다 뿐 리스크에 대한 담보로 오히려 액수가 올라갔다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선진사회는 요원한 듯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로, 대법관 권순일이 만든 엉터리 법리는 다른 불의한 판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런 자는 처벌 받아야 함에도 위 보도 내용과 달리 권순일에 대한 조사는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와이로(わいろ)는 일본어로, 한자로는 회뢰(賄賂)다. 그러데 이 말은 어쩌면 고려어(語)로 이규보가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 한자로는 '개구리 와'(蛙) 자에 '이로울 이'(利), '해오라기 로'(鷺) 자를 쓴다. 문자 대로라면 "해오라기에게 이로운 개구리"라는 뜻이다. 원전은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으로, 해석하자면 "나는 (실력이) 있지만 개구리가 없어 인생의 통한이로다"라는 뜻이 되는데, 고려시대 여주 이규보의 집에 붙어 있었던 글이라고 한다. 뿌리가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의 어느 날, 길을 가던 나그네가 이규보의 집에 묶게 되었다. 이규보는 단칸방인 데다 비좁아 한 사람도 눕기 힘들다며 거절했지만 한데 잠을 잘 수 없었던 나그네는 거듭 청했고, 이에 이규보도 할 수 없이 들게 하였다. 아랫목을 내준 이규보는 아무 말 없이 윗목 호롱불 밑에서 그저 책만 읽었다. 그 수준이 꽤 높은 것을 안 나그네가 문득 눈을 떴는데, 집주인이 쓴 낙서 같은 종이가 붙어 있는 벽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속 글이 바로 "有我無蛙 人生之恨"이었다.
궁금했던 나그네는 무슨 뜻인가 물었고 이에 이규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옛적에 노래 잘하는 꾀꼬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꾀꼬리는 공교롭게 노래 못하는 까마귀와 한 동네에 살었는데, 문제는 그 까마귀가 꾀꼬리의 노래를 매우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3일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며 도발했습니다. 자기가 지면 승복하겠지만 꾀꼬리가 지면 다시는 노래를 하지 말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꾀꼬리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혹시라도 지면 큰일인지라 3일 동안 연습을 하며 실력을 더욱 갈고닦았습니다.
하지만 노래 못하는 까마귀는 무슨 배짱인지 노래 연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3일 동안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한 소쿠리 잡았습니다. 노래 심판을 맡을 해오라기에게 줄 뇌물이었습니다. 약속한 3일 후 둘은 해오라기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해오라기는 까마귀가 더 잘 했다는 판정을 내리고 날아갔습니다. 꾀꼬리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지만 판정은 판정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말을 마친 이규보는 자신이 그 꾀꼬리와 같은 신세인 듯해 이와 같은 글을 썼노라 덧붙였다. 나그네는 비로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밀려드는 연민에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지어냈다.
"나 역시 개구리가 없어 과거에 번번이 낙방을 한 몸이요.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아니 볼 수는 없는 일, 이번에도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중이라오."
"금시초문올시다. 올해 과거시험이 또 있습니까?"
"예. 임시 과거가 생겼소이다. 이를 알게 된 것도 기회이니 처사께서도 꼭 시험을 보시길 바라겠소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이규보는 그것을 정말로 기회라 생각해 개경으로 과거를 보러 왔다. 그리고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卷, 시험문제)을 보는 순간 소스라쳤다. 바로 제 방에 써 붙였던 "有我無蛙 人生之恨"로, 시권은 에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집에 묶었던 나그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던 바, 바로 잠행 나온 황제였던 것이다.
다른 응시생들은 그 뜻을 알 수 없을 터, 개발새발의 글을 써내었고, 장원은 당연히 이규보에게 돌아갔다. 그때가 22살인 1189년이었는데, 16살 때 과거에 첫 응시한 후 8년 만의 급제였다. 이후 '와이로(蛙利鷺)'라는 말이 생겼났고 '실권자에게 바치는 뇌물'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물론 이규보의 처지를 두둔해 쓰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말은 언제부턴가 이규보를 비난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던 바, 사정은 아래와 같다.
위의 전설 같은 얘기는 이규보의 과거 급제가 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급제를 했다고 해서 인생이 풀린 것도 아니었으니 그는 이후 10년 이상 벼슬을 얻지 못한 채 권지(勸知, 관직의 예비 후보자나 시보)로 떠돌았다. 당대의 무신란과 무신들의 극심한 부침 현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인사발령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는 이의민의 치세가 도래했으나 줄이 없던 그는 마찬가지로 자리를 얻지 못했다.
당시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자신의 문집에서 30대에 벌써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규보는 관직을 얻기 위해 때마침 일어난 경상도 지역의 민란인 김사미와 효심의 난에 '병마녹사 겸 수제'라는 직함의 임시 문관으로서 종군했으나 다만 그때뿐 난이 진압된 후에도 제수된 관직은 없었다. 말하자면 허직(虛職)으로서 고생만 즉사하게 한 것이었으니 아마도 그는 이 시기에 많은 것을 깨달았을 터이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3년 동안 권력을 누리던 이의민의 시대가 가고 최충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죽이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과 이지광을 "네 놈들이야말로 재앙의 씨앗이다"라며 가차 없이 처단했다. 때는 1196년 5월 15일로 최충헌의 시대가 개막한 날이었다. 더불어 이규보의 희망이 열린 날이기도 했으니 그로부터 3년 후인 1199년 최충헌을 국가의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지어 하급직인 전주목 서기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출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서, 죽기 살기로 권력자 최충헌을 빨아댔던 바, 1207년 드디어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는 직한림(直翰林)에 오를 수 있었다.(8품의 하급직) 출세의 방법을 터득한 듯, 이후로 그는 더욱 최충헌을 칭송해 마지 않았고, 마침내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의 눈에 들 수 있었으니 보문각대제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 · 태복소경(太僕少卿) · 장작감(將作監) ·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232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이규보는 최우를 따라 강화로 왔다. 그리고 문하성 고위관료로서 최우를 보필했는데, 이때가 이른바 대몽항쟁기였다. 역사는 최씨 정권의 40년 대몽항쟁 기간을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서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기실 강도(江都, 임시 수도 강화도)를 포함한 고려 전역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다름없는 지경이었다. 까닭에 백성들의 불만이 쇄도하였지만 이규보는 그저 최씨 정권만을 옹호하기 급급했으니, 아래의 시는 당시 그의 사고가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저 오랑캐(몽골)들이 완악하다지만 어찌 물을 뛰어 건널 수 있겠느냐.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그저 강 건너에서 진 치고 시위만 하는 게 아니겠느냐.
이런데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할 수 있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빠져 죽을 텐데 말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아, 그러니 동요하지 안심하고 단잠이나 즐기거라.
저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갈 것이며, 나라가 갑자기 어찌 될 일은 없을지니.몽골군이 끝내 건너지 못한 강화도 염해(鹽海) / 2002년 완공된 초지대교가 보인다.
이규보는 중간 중간 정치적 위기도 있었지만 최씨 정권 밑에서 외교를 전담하다 1241년(고종 28) 9월 강도에서 세상을 떴다. 그해 최씨 정권은 국가 주도로 그의 문집을 간행해 주었던 바, 관료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 얼마나 호사로운 대접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능력도 있었겠지만 열심히 권력자들을 빨아댄 결과일 터였다.
* 참고로 <직지심체요절>에 앞서는 최초의 금속활자본 <상정예문>은 이규보 개인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그 기록이 살려 있다. 그 책에 <상정예문> 가장본(家藏本) 50권을 주자(鑄字, 금속활자)로 28부를 찍어 여러 기관에 나눠 보존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시기는 고종 21년인 1234년에서 고종 28년인 1241년 사이의 어느 때이다.
* 따라서 학교 다닐 때 배운 1234년에 찍은 <상정고금예문>이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말은 인쇄 시기의 상한선에 맞춘 말이므로 사실 옳지 않다. 아울러 '고금(古今)의 예문을 모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책 이름 <상정고금예문>도 정식 명칭인 <상정예문>으로 불러야 옳다. 비슷한 시기인 1239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주자인시(鑄字印施)되었고, 현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이후 138년이 지난 1377년에 주자인시되었다.
동국이상국집 / 53권 13책의 시문집으로, 3권에 유명한 '동명왕편'이 실려 있다. 이규보의 묘지명 / 국립중앙박물관 이규보 묘의 원경 이규보 묘 아래의 주인 모를 고려시대 무덤 강화군 길상면의 이규보 묘 / 부인 진양진씨(晉陽晉氏)와의 합장 묘이다. 묘표 무덤 부근의 인상적인 석인상 무덤가에 재현된 이규보의 개경 별서 사가재( 四可齋) '사가재' 현판이 걸려 있다. / '사가재'란 네 가지가 있어 살기 좋다는 뜻으로 이규보의 글 有田可以耕而食(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可하고), 有桑可以蠶而衣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可하고), 有泉可飮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加하고), 有木可薪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하기에 加하다)에서 가져왔다. '사가재' 옆 이규보 신도비 사당인 유영각 유영각의 삼문 재실인 백운정사 무덤에서 바라보이는 길상면 까치골길의 고즈넉한 마을 마지막으로, 답답한 현실 정치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였던 사법부가 무너진 듯해 절망스럽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지금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법과 양심에 따라 법리대로 판결하는 재판관은 드무니, 대부분의 재판관들이 스스로의 독선에 지배당해 법리, 상식, 판례, 양형기준 등을 대놓고 무시하며 제멋대로 판시한다.
이유가 스스로의 정치성향 때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혹간은 돈에 지배당해 판결을 뒤엎는 자도 있는데, 그것이 오염된 후배 판사의 귀감으로 작용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을 돌게 만든다. 게다가 엊그제 판결에서는 객관적 법리는 아예 사장되고 오직 주관적 논리가 판결을 지배하였던 바, 이후 국민들은 관련 재판을 맡을 재판관들의 고향, 출신학교, 계파, 정치색을 찾아내기 바쁘다.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다. 정말이지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현대의 부정한 관료 권순일 /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건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할 사건이다. 좌파 정치가와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를 형성한 또 한 명의 부끄러운 인간 김명수 전 대법관 정치 판사이자 거짓말의 달인이었던 김명수 / 그는 지금의 법원에 좌편향 정치판사들을 대거 포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명수 대법원장 사건 초간단 정리 기사 / 연합뉴스 DB 회피 사유가 차고 넘침에도 회피하지 않은 자들 / 이들도 악의 전설이 되려고 하나? 더 강력한 방탄조끼를 입게 된 이재명 대표. 입이 찢어지려 한다. / 성창경 tv 컷 이런 식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 자가 나온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는 벌써 온 국민이 다 아는 유명 학교가 됐다. '전설 따라 삼백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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