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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김구에 관한 전설과 진실 - 의정부 회룡사와 서울 경교장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3. 22. 23:11

     

    의정부(議政府)는 조선 개국 초 설치한 행정부의 최고 기관으로 1400년 이방원이 기존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목적은 왕권의 강화로서, 1405년(태종 5) 의정부 구성원을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관료로 확정했는데, 오늘날의 국무회의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경기 북부의 의정부시는 위 의정부와 한자까지 같은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와 호원동 전좌(殿坐) 마을에 머물 때 의정부 대신들이 찾아와 국정을 논의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좌마을의 이름 역시 그래서 생겨났다. 호원동 회룡사 입구 사거리 부근에 있는 '태조·태종의 상봉지' 표석에는 그와 같은 설명이 담겨 있다.  

     

     

    '태조·태종의 상봉지' 표석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대로 태조 이성계는 5자(子) 이방원이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제 형·동생들을 제거하고 왕이 되자 이에 빡쳐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칩거했다. 하지만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결국 한양 환궁길에 올랐고, 태종과 문무배관들이 이곳까지 나와 맞이하였던 것이 의정부시의 연원이다.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를 맞이한 장소는 여러 이설이 많으나 여기서는 위 표석의 내용을 좇았다) 

     

    의정부의 고찰 회룡사(回龍寺)도 그래서 생겨났다. 본래 신라 신문왕 1년(681) 의상대사가 법성사(法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고려 문종 24년(1070) 혜거국사가 중창한 절로 전해지나 조선초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회가(回駕, 가마가 돌아옴)를 기뻐해 회룡사로 개칭했다 한다. 

     

     

    회룡사 가는 길의 460년 된 회화나무
    회룡사 계곡의 회룡폭포
    회룡사 입구 / 회룡사는 6.25 때 전소된 후 재건됐다.

     

    회룡사에 얽힌 그 밖의 전설을 추리자면 이 절의 오층석탑에는 의상대사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하며 산등성이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한 이른바 무학굴이 있었다 하나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경내의 바위 동굴은 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진위를 떠나 우선 신비롭다.

     

    그런데 이 바위동굴에는 일경(日警)에게 쫓기던 백범 김구가 은거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훗날 백범이 써 주었다는 ' 石窟庵' '佛' '戊子仲秋遊此白凡金九'를 드는데, 그 글자가 바위동굴 입구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 무자(戊子)는 1948년이며 언론인 남상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 글자를 1949년 새겼다고 한다.

     

    하지만 위 글자에는 백범이 이 동굴에 숨어 있었다는 말은 없고 '1948년 중추절에 놀러 왔다'라고 만 되어 있다. 그래서 은거의 근거로써는 타당성이 부족해 보이는데, 굳이 해석하자면 '회룡사 동굴에 숨어 있던 일을 추억해 1948년 중추절에 놀러 왔다'라고 할 수는 있겠다.  

     

     

    백범이 은거했다는 석굴암
    각자(刻字)된 백범의 글씨
    '戊子仲秋遊此白凡金九'의 글귀
    석굴 안 석가모니불
    극락암 / 극락암 옆에 백범사(白凡祠)라는 김구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극락암 앞 석등
    석굴암 불이문 입구
    불이문 옆 김구 선생 필적 안내문 / 백범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 피신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하지만 은거가 쉬어 보이지 않는 환경이다. 백범이 이곳에 은거했다면 차라리 공주 마곡사 때처럼 승려로써 머물었다고 하면 이해가 미칠 듯하다.
    회룡사 경내의 5층 석탑 / 목조건축물을 모방해 지은 조선 전기의 이형 탑이다.
    회룡사 경내의 고려 팔각다층석탑의 잔흔

     

    백범의 불꽃같은 삶 때문인지 그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개중에는 자신이 만든 전설도 있으니 <백범일기>에는 그가 수배되고 투옥된 이유에 대해 을미사변 때 민왕후를 시해한 일본군 장교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앞서 '인천감리서를 탈출한 백범 김구, 그가 투옥된 진짜 이유는?'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수배되고 투옥된 이유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군 대위 스치다 조스케를 죽여서가 아니라 일본인 약장수 스치다 조스케의 살해 혐의였다. 죄목은 돈을 빼앗기 위한 강도살인으로, 그의 재판 기록에는 정치범의 혐의 따위는 없고 내내 '강도살인'으로만 일관되어 있다.

     

    백범이 사형 직전 고종 임금의 전화로 구명되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적이다. <백범일지>의 내용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범(후에 일본군 밀정으로 서술이 바뀜)을 죽인 죄로 사형이 확정된 백범은 교수형 직전 고종 임금의 전화로 구명되었다고 했는데,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인 1896년 7월이다. 그래서 그해  서울 덕수궁-인천 간 개통된 덕률풍(전화)이 없었다면 백범은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그 개통일이 사형 집행 사흘 전이었다는 극적인 에피소드도 함께 전달된다. 

     

    전화 개통이 며칠만 늦어졌다면 백범은 구명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자전기통신연구소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최초 전화 개통일은 1898년 1월이다. 백범이 인천감리서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 시절에는 전화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 날 아침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황성신문을 보니 인천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김구)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고 한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상충되니 황성신문이 창간된 때는 그보다 늦은 1898년 9월이다.

     

    백범의 일생이 헌신적 애국·독립운동으로 일관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까닭에 그는 민족지도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다만 해방 후 정치가로서의 궤적은 요즘의 위정자들과 별 다를 게 없었으니 당시의 미군정은 여러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백범 김구를 '블랙 타이거'라고 부르며 경계해 마지않았다.

     

    정치가 사이에서도 인망을 얻지 못했던 바, 백범 김구는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해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적 국회의원 198명 중에서 단지 13표 만을 획득, 180표를 획득한 이승만에 밀려 초대 대통령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2명 불참,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

     

     

    득표울 / 뉴스21 DB

     

    이렇듯 큰 표 차이가 났음에도 김구는 승복하지 않고 야당인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서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내각을 무던히도 괴롭히다 약 1년 후인 1949년 6월 26일 자신의 처소인 경교장에서 포병장교이자 CIC(미군 방첩대) 소속이던 안두희의 총격에 피살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영웅적 삶과 건국 혼란기의 비극적 죽음은 이후 좌파들에게 우파 이승만 대통령을 격하시키려는 대립군(對立君)과 같은 존재로써 포장되어 이용된 감이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신성불가침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해방 후 김일성과 대립노선을 걸은 관계로(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방북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요즘의 좌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듯하니, 그 또한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백범이 사망한 교장은 예전에는 고려병원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며 피격 현장마저 창고 같은 것으로 쓰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적(제465호)으로 지정되어 매우 잘 관리되고 있다. 

     

    경교장은 일제강점기 금광 갑부 최창학이 1938년 축점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서양주택으로 이후 최창학의 집으로 사용되다 1945년 백범이 중국에서 귀국하자 그의 숙소 겸 집무실로 제공됐다. 축첨(竹添)은 다케조에라는 일본 외교관의 이름이었으므로 백범은 집의 이름을 근방의 다리였던 경교(京橋)를 빌려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백범의 죽음에 대해서는 '광주 정율성 거리와 인천 백범김구 거리'에서 아는 바를 언급한 바 있다. 

     

     

    38선을 넘는 김구 / 왼쪽은 비서 선우진, 오른쪽은 아들 김신
    서대문 경교장 / 사적 제465호
    위: 갑부 최창학의 사저 및 임시정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될 때의 경교장(1938~1966) / 아래 : 고려병원이 신축되었을 때의 전경(1968년)
    임시정부 국무회의 전경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대책 마련을 위해 경교장에 모인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모습이 재현됐다.
    2층 응접실
    경교장 내부의 옛 벽 / 경교장은 백범 사후 64년만에 정비되어 민간에 개방됐다.
    백범이 피격된 2층 집무실
    백범의 침실에서 본 집무실 / 백범은 좌식책상 너머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안두희 소위를 맞이하다 피격되었다.
    경교장에 전시된 피뭍은 저고리와 바지 / 피격 당시 백범이 입었던 옷으로 탄흔이 남아 있다.
    영결식장의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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