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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장군 무덤과 곤지암 전설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4. 26. 23:52
임진왜란은 고니시 유키나가기 이끄는 1만8천7백 명의 왜군이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부산성을 침입함으로써 시작됐다. 개전 후 왜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두 차례의 전투를 치렀을 뿐 이후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조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조선측의 무방비에 대해서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와 같은 궁금증은 천험의 문경새재를 넘으며 더욱 증폭되었다.
요새인 문경새재를 만난 왜군이 극도로 긴장했을 것은 분명했다. 문경새재는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영남의 고개로서, 새(鳥)만이 쉽게 넘을 수 있는 험한 재(嶺)였기에 새재, 혹은 조령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새재에는 난공불락을 지향하는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바, 만일 조선군이 그 성벽에 의지해 저항한다면 진격은 크게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어지간한 피해 또한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문경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 해발 642m 문경새재 1, 2, 3, 관문의 위치 / 영남일보 DB
하지만 웬일인지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관문으로부터는 단 하나의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다. 아예 군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4월 28일(양력 6월 7일) 정오경 충청북도 충주 달천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조선군을 만났다. 그 수는 전체 8천 명 정도였고 그 앞으로 1천여 기의 기마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자랑 신립(申砬, 1546~1592)의 기병대로서, 그는 온성 부사 시절인 1583년 이 기병대를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한 바 있었다.
당시 신립은 조선의 국경 여진족 지배에 대한 불만으로써 난을 일으켜 쳐들어온 온 여진족 추장 니탕개(尼湯介)의 군대를 박살내고 ,두만강을 너머 그들의 근거지까지 소탕하고 개선하였던 바, 이후 조선 조정은 그를 크게 신임해 마지않았다. 이에 임진년 일본군의 침입에 있어서도 그를 삼도 도순변사에 임명해 외적을 막게 한 것인데, 그들 조선군의 포진을 바라보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왜장들의 표정이 묘했을 듯하다. 왜 새재와 같은 천험의 요새를 버리고 이 같은 허허벌판에 진을 쳤는가 하는 의아심이 아니 들 수 없었을 터....신립은 새재라는 천혜의 요새를 포기한 채 탐금대가 위치한 이곳 충주 달천벌에 배수(背水)의 진을 침으로써 패배를 자초했다. / 중부매일신문 사진
잘 알려진 대로 조선군은 이 싸움에서 불과 두 시간 만에 대패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 달천벌 전투는 왜군측에서 보자면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再版)이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1579년에 일본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여기서 최고의 기마군을 보유한 '다케다 가쓰요리'군은 조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이 기마군으로써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의 장수로서 군림했지만, 아들 가쓰요리는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신무기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최초의 조총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총
나기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는 평소 전법대로 기마대를 앞세워 돌진했으나, 그 기마병들은 철포(조총)를 맞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던 바, 나기시노 전투 이후 '무뎃뽀'(無鐵砲)라는 말이 생겨났다. 철포 없이 전장에 나서는 대책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이 전투에서 대충 쏘아도 달려드는 기마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 기마병들이 밀집상황인 까닭에 벌어진 전황이었다. 이것이 달천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던 것이니, 훈련된 기병으로 단숨에 적의 보병을 쓸어버리려던 신립의 작전은 여지없이 부서져버렸다.
나기시노 전투를 그린 그림 / 달려드는 다케다 기병에 발포하고 있다. 철포부대 주변에 포연이 가득하다.
전황을 지켜보던 신립은 부장 김여물(金汝物)에게 임금에게 위급을 고하는 장계를 지어 부하로 하여금 조정에 알리게 했다. 그리고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강가로 몰리게 되었고, 최후임을 직감한 신립은 달천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당시 나이 47세였다. 신립이 보낸 장계는 4월 29일 밤 창덕궁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미명(未明)의 새벽, 선조 임금은 일족 및 신하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이제는 왜군을 막을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인데, 일기는 왜 또 그렇게 험상궂은지 장대비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빗속에 몽진하는 선조 익금 이를 보고 분노하는 백성들
신립은 시신은 건져져 후일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번지에 묻혔다. 부인 전주최씨와의 합장묘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 숙종 29년(1703)에 세웠다. 그가 이곳에 묻힌 것은 신평신씨의 묘역이 있는 곳이기 때문으로 인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장손 신준(申埈, 1592~1658)과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종손 신완(申琓, 1646~1707)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신대리 평산신씨 묘역 신립의 묘 묘의 석물 묘표 무덤 뒤에서 본 풍경 신준과 신완의 묘역 신준의 묘와 장명등 신준 묘 문인석 신완과 부인 임천조씨의 합장묘 묘역 입구의 신완 신도비 묘역 입구의 느티나무와 신립 묘 안내문 묘역에서 걸어 20분 걸리는 지점에 곤지암(昆池庵)이라는 유명한 화강암 바위가 있다. 곤지암 지명이 유래된 바로 그 바위다. 곤지암은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개가 1m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데, 큰 바위 가운데 마치 바위를 뚫고 자란 듯한 향나무가 서 있다. 수령은 약 400년 정도라고 한다.
이 곤지암에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전한다. 하나는, 왜군에게 패해 자결한 신립장군의 시신을 경기도 광주 야산에서 장사 지내는 동안 갑자기 벼락이 내려쳐 바위가 둘로 갈라졌고 그 패인 땅에 연못이 생겼다는 버전이다.
다른 하나는 조금 더 상세해, 신립장군의 시신을 광주에서 장사 지낸 후 누구든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을 지나려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에 어떤 선비가 바위를 향해 '장군의 원통함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소리치자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를 둘로 쪼개었고, 이후 행인들의 통행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버전이다.
벼락이 떨어진 곳에 곤지(昆池)라는 연못이 생겼다는 것은 두 버전이 동일하다. 실제로 이곳에는 소하천인 노곡천과 연결되는 곤지라는 연못이 있어 그 물이 곤지암천과 경안천으로 흘러들었는데, 1970년대 도로정비 과정에서 복개되고 바위 상부만 남았다고 한다. 광주시에서 '곤지암 문화재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연못을 복원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변한 것은 없다.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 안내문 부근의 노곡천 노곡천과 곤지암천이 합류하는 곳 / 우측 지류가 노곡천이다. '전설 따라 삼백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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