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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 인흥군 묘에 신도비가 두 개 있는 이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18. 19:15

     

    인흥군(仁興君)의 묘는 포천 산정호수 가는 길에 있는 3.8선 휴게소의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다. 아래 사진은 포천시 김나경 시민기자가 찍은, 지금은 퇴색된 분단의 기억을 리얼하게 되살려주는 사진이다. 사진 속의 3.8정 카페 팔각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추억의 3.8선 휴게소' 붉은 간판은 사라졌다. 아무튼 인흥군의 묘찾기는 이곳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GPS에 걸어서 15분 안쪽 거리라고 돼 있음에도 찾기가 쉽지 않다. 

     
     

    포천시 영중면 3.8선 휴게소와 부근 모습

     

    예전에는 분명 호국로 국도변에 인흥군묘 묘역 표지판이 있었던 듯한데,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건아조경' 석물이 있는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정상적인 코스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묘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한글 표기가 있는 포천 인흥군 묘역과 노원구 하계동의 비석'에서 말한 대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조선시대 한글비석이 있는 곳으로써 알려져 있는 곳이나 친견하기는 힘들었다. 밭 한가운데 있는 데다 사방에 울타리가 쳐져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비석을 찍어봤다. 파종 전이라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데, 예전과 달리 기울어진 모양새다.

     

    오늘의 포스팅은 한글비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흥군 묘역에 있는 2개의 신도비에 관해서이다. 그전에 인흥군에 대해서 앞서의 설명을 조금 보완하자면, 

     

    흥군 이영(李瑛, 1604~1651)은 선조와 12번째 아들로 1623년 정빈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흥군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 1628년에 일어난 유효립의 난을 두루 겪은 파란만장의 삶을 산 인물이다. 유효립은 인조반정에 대한 반동으로 난을 일으켜 인흥군의 동복형 인성군을 왕으로 세우고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인물로서, 이로 인해 인흥군도 위기에 몰렸으나 인조의 적극적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흥군은 문과에 합격해 사간원 정언, 호조참의, 승정원승지 등을 지내고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며 효종의 북벌설, 척화파 인사의 관료 기용 등 청나라가 민감해하는 문제를 무마시켰다. 1651년(효종 2) 11월 졸한 후 포천에 묻혔으며, 효심 깊던 아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 묘역을 정성스레 꾸몄다. 그리고 당대의 명문장가 백현 이경석의 글을 받아 손수 신도비를 썼다. 이경석은 1639년 서울 송파의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이른바 삼전도 비문을 쓴 사람이다. 

     

     

    송파 롯데빌딩 옆의 대청황제공덕비
    전체 사진
    인흥군 묘역의 신도비 / '인흥군 효숙공 신도비명'(仁興君孝肅公神道碑銘)이란 전액을 비의 양 측면에 5자씩 나눠 새겼다.
    인흥군 신도비 부분 / 훼손이 덜 된 뒷면으로 낭선군 이우의 명필 해서(解書)가 유려하다.

     

    이우는 이 신도비를 1655년에 인흥군 무덤 옆에 세웠다. 그런데 1671년 이경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송시열의 문하가 몰려와 신도비의 비문을 마구 훼손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삼전도비를 쓴 이경석의 문장이라는 것이었다. 앞서 '이경석의 신도비를 지은 박세당과 석천동 수락폭포'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경석은 남들이 다 기피하는, 그러나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대청황제공덕비 저작의 악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이경석은 모두가 피해 가려고만 했던 동네의 더러운 똥을 손에 묻혀가며 치운 바른 사람이었다. 당시 예문관 부제학이었던 이경석은 비문 지은 일을 한탄하여 "글 쓰는 법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有悔學文字之語)"라고 했다. 그가 행여 부역을 했을 리는 만무할 터,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방에 관한 일을 무마하다 심양 감옥에 유폐됐던 전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향후 등용시키지 않겠다는 조선 조정의 약속 하에 풀려났다.  

     

    하지만 친명파 사대주의자 송시열은 그의 노고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욕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일에 대해서는 "졸렬한 그 자가 오랑캐 세력을 옹위하여 일신을 보전했던 바, 개도 그가 먹던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라는, 차마 혼자 해서도 아니 될 말을 좌중에 내뱉었고, 심양 감옥에 구금됐다 생환한 일에 대해서는 "그때 죽지 않고 돌아온 것도 삼전도비문을 잘 지은 공로 때문이다"라고 폄훼했다. 

     

    요즘 식대로 표현하자면 이건 아예 가짜 뉴스였지만, 송시열과 그 일당들은 이와 같은 가짜 뉴스를 흡사 요즘의 좌파들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퍼뜨렸다. 이경석은 이와 같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으나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현 성남시 분당구)으로 낙향하였는데, 2년 뒤인 1671년 고향 농가에서 문득 졸하였다.

     

     

    경기도 농가 이미지 사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16-18의 이경석 묘
    묘표 / 망자가 절대 원하지 않았을 '유명(有明)조선국 영의정 이경석의 묘'라 쓰여 있다. 유명조선국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란 뜻이다. 이미 명나라가 망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음에도....

     

    이우는 제 아버지의 신도비가 무뢰배에 의해 망가졌음에도 개 같은 자들의 퍼런 서슬에 이렇다 할 항의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송시열 문하들의 성화에 송시열의 글을 받아와 1682년 다시 새로운 신도비를 세워야 했다. 글씨는 마찬가지로 이우 본인이 썼다. 인흥군 묘에서 약 100m 지점 낚시터 부근에 있는 이 신도비는 귀부와 지붕돌을 갖춘 이른바 옥개귀부형 비석으로 정형적인 모양새이나 시절의 광기가 배어 있는 돌이다. 

     

     

    인흥군 묘
    인흥군 신도비 / 좌대 높이 75cm, 비신 높이 175cm, 너비 86cm, 두께 28cm.
    앞면
    비신의 훼손이 심해 반쯤을 시멘트로 입혔다. / 차도 없던 시절에 이곳까지 찾아와 난리를 핀 옛날 좌파들의 의지가 쩐다.
    뒷면
    송시열의 글을 받아 새로 만든 신도비 / 총높이 433cm로, 구 신도비의 두 배 정도 된다.
    지붕돌을 제외한 비신 높이 255cm, 너비 115m, 두께 50.8cm, 거북돌 길이 4m, 폭 2.5m.

     

    파괴는 옛 좌파들의 전유물만이 아니었으니 후대의 무뢰배들에 의해 낭선군 이우가 정성껏 가꾼 묘역이 또 한 번 훼손되었다. 그 흔적이 묘역 여기저기 남아 있는데, 우선 무덤 옆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문인석 2기가 자리를 이탈해 낚시터 부근에 서 있다. 그리고 그때 문인석을 쓰러뜨려 굴린 듯, 약한 부분인 머리 관모가 깨져 나갔고 1기는 얼굴 부분도 깨졌다. 이에 지금은 시멘트로 대충 보수되었던 바,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시멘트로 머리와 얼굴 부분이 엉터리로 보수된 문인석 / 뒤로 보이는 언덕이 인흥군의 무덤이다.
    왼쪽 문인석도 머리 부분이 엉터리로 보수됐다. / 뒤로 신·구 신도비가 보인다.
    무덤 옆에 있었을 배례석과 산신석도 낚시터 부근으로 옮겨졌다.
    유택의 영역을 나누던 계체석도 이렇게 쓰인다.
    낚시터 풍경

     

    당쟁의 아이콘 송시열은 결국 끝이 좋지 못하였다. 그는 1689년 숙종이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서인하고 희빈 장씨(장희빈)가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것에 반대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그해 6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가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제주시 오현단의 송시열 유허비
    서울의 송시열 흔적 / 명륜동 주택가 석벽에 '증주벽립'이라고 쓴 송시열의 졸필이 남아 있다. 중국의 증자와 주자의 뜻을 벽처럼 세워 그들처럼 살겠다는 꼴통 사대주의자의 각오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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