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동양의 코리아라는 미지의 나라에서 영어와 근대교육을 가르칠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명문가의 자제 호머 헐버트는 주저 않고 이에 지원해 조선에 왔다. 그때 헐버트는 이 미개한 나라가 우수한 자체 문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던 바, 훗날 <스프링필드 유니언>이라는 잡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 한글을 발명한 우수한민족'이라며 한민족을 상찬했다.
그외에도 그는 여러 장소에서 '한글과 견줄 만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한글을 극찬했는데,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할 때 한문을 아예 폐기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도 했다. 더불어 조선인의 한글 경시 풍조를 지적하기도 했던 바, '배우기 시작한 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피력했다.
그러니 '세종대왕 때 한문을 아예 폐기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스스로도 힘든 주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다. 사실도 그러하였으니, 대표적으로 서울 만리동에 살던 최만리라는 관료의 반대를 들 수 있다. 그는 '대국 중국이 쓰는 문자인 한문을 버리고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은 여진이나 일본 같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에 극렬 반대하였던 바, 아예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해버리기까지 했다. 그 밖에도 쏟아지는 반대에 세종대왕도 결국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서울 종로구 당주동 주시경 마당의 헐버트 상 / 기둥에 '한글과 견줄만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쓰여 있다.
그럼에도 한글은 그 편리성에 일반백성들을 중심으로 크게 퍼졌으나 연산군 때 세게 철퇴를 맞고 말았다. 자신의 폭정을 비난하는 익명의 언문(한글) 투서에 빡친 연산군이 한글 사용을 일절 금했던 것인데, 그 탄압의 흔적이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산10-1 길에 있는 연산군 금표(禁票) 비석 속이 남아 있다. 비석에는 '금표 안으로 침범하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에 의거하여 참하겠노라'고 새겨져 있다. '기훼제서율'은 1504년 공표한 법률로서, 요지는 한글 사용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고양시 대자동 연산군금표비
이후 한글의 사용은 급격히 줄었다. 아무리 편리해도 목숨 걸고 한글을 쓸 사람은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조선의 효(孝)는 목숨보다 귀한 듯했으니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무덤의 묘표에는 '영비'(靈碑, 영험한 비석)이라는 제목 아래 '녕ᄒᆞᆫ비라거운사ᄅᆞᄆᆞᆫᄌᆡ화ᄅᆞᆯ니브리라 이ᄂᆞᆫ글모ᄅᆞᄂᆞᆫ사ᄅᆞᆷᄃᆞ려알위노라'라는 언문 글씨가 쓰여 있다. 해석하자면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므로 훼손하는 사람은 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알리노라'는 뜻이다.
노원구 하계동 한글비석로의 영비각석인상과 영비각비석 왼쪽 측면의 한글 글씨가 지금도 뚜렷하다 ./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적 표기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不忍碣'(불인갈)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새겨 경고했다.
爲父母立此 誰無父母 何忍毁之 石不忍犯 則墓不忍凌 明矣 萬世之下可知 免夫
해석하자면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손가, 그러니 어찌 차마 이것을 훼손시키겠는가. (부모가 있는 자) 차마 비석을 훼손하지 못할 것이며, 묘도 차마 훼철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도리는 결코 멸하지 않고 만세토록 알아들을 것이다' 쯤이 되겠다.
비석 오른쪽 측면의 글씨는 좀 마모됐다.
이 비석은 1536년 이윤탁이라는 사람의 묘 앞에 세워졌는데, 이윤탁은 그리 높은 관직을 지냈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년) 때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관청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부정자는 종9품으로 미관말직이다. 하지만 그의 후손은 망자의 지위고하와는 상관없이, 한글 사용의 위험성과도 상관없이, 망자와 부인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인 무덤 부근에 이와 같은 비를 세워 묘를 보호하고자 했다. 비를 세운 사람은 아들인 이문건(1494~1567)이다.
잘 단장된 이윤탁과 고령신씨 합장묘맞은편으로 서라벌고등학교가 보인다.
비석은 망자의 신분과 이름을 기록한 묘표로서 측면에 한글과 한문으로 위와 같은 경계의 글을 새겼다. 어쩌면 평범한 묘표에 불과한 비석으로, 한글을 새긴 이유도 한자를 모르는 일반 무지렁이 백성들을 계고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비석은 훗날, 명문(銘文) 30자의 한글로 인해 특별대접을 받게 되었던 바, 1974년 '한글고비'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가 되었다가 2007년 '이윤탁 한글영비'라는 이름으로 보물(제1524호) 지정되었다. 묘와 비석은 원래 지금의 태릉 자리에 있었으나 그곳에 문정왕후의 능묘가 마련되며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1989년 서라벌고등학교 앞쪽으로 왕복 6차선 도로가 나며 다시 위기에 처했으나 한글비석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부근의 묘는 모두 사라지거나 이장되었지만 이 무덤은 도로의 고질적 병목현상에도 불구하고 알박기처럼 보존됐는데, 한국도로공사가 문화재청과 성주이씨 문중의 양해를 얻어내 마침내 1998년 도로 바깥 15m 지점인 지금의 자리로 묘표와 함께 정중히 옮겨졌다. 정말로 영험한 비석이 아닐 수 없다.
앞면 / 근처 한글비석공원에 실물대로 재현된 영비다.뒷면 / 높이 143.5㎝, 폭 64.5㎝, 두께 19.3㎝이다.우측면좌측면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도 비슷한 성격의 비석이 있다. 인흥군 이영(李瑛, 1604~1651)의 무덤 부근에 세워진 비석이다. 인흥군은 선조와 12번째 아들로 1623년 정빈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흥군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 1628년에 일어난 유효립의 난을 두루 겪은 파란만장의 삶을 산 인물이다. 유효립은 인조반정에 대한 반동으로 난을 일으켜 인흥군의 동복형 인성군을 왕으로 세우고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인물로서, 이로 인해 인흥군도 위기에 몰렸으나 인조의 적극적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인흥군은 문과에 합격해 사간원 정언, 호조참의, 승정원승지 등을 지내고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다 1651년(효종 2년) 11월 죽은 뒤 포천에 묻혔으며, 효심 깊던 아들 낭선군 이우(李俁)가 묘역을 정성스레 꾸몄다. 그리하여 인흥군의 묘역은 다른 묘역과 달리 무질서의 질서가 느껴진다. 즉 일렬로 형성된 여타 대부분의 묘역과 다르게 일족의 무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언뜻 무질서하게 느껴지지만 가만히 보면 지형적 특성을 살린 나름대로의 질서가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우가 간행한 <정효공가승(靖孝公家乘)>, <백년록(百年錄)>, <잡저록(雜著錄)>에는 묘역의 조성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그가 묘역 조성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아래 사진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성종의 10남 이성군 이관( 李慣, 1489~1553) 묘역으로, 후손들의 관리가 잘 된 곳 중의 하나이다. 이성군 묘역을 비롯한 조선시대 문중 묘역은 대부분이 이처럼 ㅡ자로 형성돼 있는데 반면, 인흥군의 묘역은 ㄴ자 구조를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고양시 덕양구의 이성군 이관 묘역위에서 내려본 모습으로 일자 구획이 확연하다.이성군 이관 묘이성군 사당 장평사
아래 사진부터는 인흥군의 묘역으로, 우선 인흥군의 묘 뒤에서 보면 인흥군과 그의 아들 낭선군 이우, 손자 전평군 이곽의 묘역이 ㄴ자로 형성돼 있는 모습이 확연하다. 그것이 언뜻, 지금은 낚시터가 된 소택지를 피해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좀 더 살펴보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묘역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으니 낭선군과 전평군의 묘역 우측으로도 후손들의 무덤이 확장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즉 처음부터 종(從)이 아닌 부챗살 형의 횡(橫)으로 묘역을 설계한 것이다.
인흥군의 묘 뒤에서 본 묘역인흥군 묘낭선군 묘전평군 묘낭선군 묘역에서 본 인흥군 묘밑에서 본 전평군 묘역후손 묘역에서 본 낚시터
그 외에도 인흥군 묘역은 특이하기 그지없으니 묘표는 물론이요, 장명등, 혼유석, 고복석, 망주석 등에 글씨가 가득하다. 부모에 대한 깊은 사랑을 그렇게 글로 표현했던 것인데, 글씨까지 모두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 이우가 썼다. 낭선군 이우는 앞서 말한 의창군 이광과 더불어 명필로서 일세를 풍미했을 듯한데,(☞ '신품사현과 견줄만한 선조의 아들 의창군 이광') 이우의 글씨는 그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재평가되는 추세다.
인흥군의 묘는 묘표, 장명등뿐 아니라좌우 망주석에도 글씨가 빼곡하다. 이런 예는 매우 드물다.낭선군 묘 향로석의 '왕손지릉'(王孫之陵) 글씨 / 이우가 생전에 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 말하려는 인흥군의 한글 묘계비(墓界碑)는 묘에서 남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진입로 주변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붕돌이 구슬 모양으로 둥글게 장식된 비석은 비신이 150cm 정도로서,(151cm×40cm×40cm)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받침돌, 지붕돌과 달리 대리석이다. 비석은 지대석 위에 마련된 정사각형 받침돌(80cm×80cm×53cm) 위에 세워져 있고, 비면에는 '大明朝鱻國王子墓所永平治東梁文塔洞'(대명 조선국 왕자 묘소 영평 치동 양문 탑동)이라는 글이 4면에 나뉘어 새개져 있다. '영평현 치소의 동쪽 양문리 탑동에 조선국 왕자의 묘소가 위치한다'고 알려주는 내용인데, 비면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새긴 20자 5행 한글 글씨도 보인다. (鱻은 鮮과 同字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 비가 극히 녕검ᄒᆞ니 ᄉᆡᆼ심도 사람이 거오디말라. (이 비가 극히 녕검하니 성심도 사람이 거오디 말라) 현대 옛 우리말로 다시 풀어보면, '이 비가 극히 영묘한 위력이 있으니 어떠한 생각으로라도 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 말라' 는 뜻이다. 한마디로 '감히 건드릴 생각을 말지어다'라고 한문을 모르는 일반 무지렁이들을 상대로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 이 한글 글씨를 쓴 사람 역시 낭선군 이우로 보인다. 비석의 남면 하단에 '崇禎丙寅冬朗善君俁書丹'(숭정 병인 동 낭선군 우 서단)이라는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상의 글씨는 1686년(숙종 12) 겨울에 이우가 쓴 것이다.
인흥군 한글 묘계비 (포천시청 사진)한글 글씨 (포천시청 사진)지금은 경작지 가운데 있는데다 사방으로 울타리를 쳐 가까이 가 볼 수 없다. 2025년 봄 울타리 밖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과 달리 비문이 약간 기운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