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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祖)와 종(宗), 세조의 경우 & 오늘의 헌법재판소 앞 풍경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2. 22:06

     
    조선왕조 역대 임금 27명의  묘호(廟號)는 조(祖)와 종(宗)으로 분류된다. 즉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의 일곱 명은 조(祖)이고 나머지 스무 명은 종(宗)이다. 이와 같은 구분에 대한 정의를 일찍이 국가유산청 산하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내린 바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왕에 조(祖)를 붙입니다.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왕성하게 한 왕은 대개 종(宗)으로 부릅니다. 「예기」의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는 데 따른 것입니다. 
     
    조선의 27 왕 가운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 조자를 썼습니다. 죽어서 왕으로 대접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은 모두 종을 씁니다. 태조는 나라를 처음 세웠기 때문에 조가 붙습니다. 나머지 조 자 왕은 큰 국란을 극복했거나(선조, 인조), 반정을 통해 왕에 오른 경우(세조)입니다. 영조, 정조, 순조는 숨지고 바로 종을 썼지만 조 자로 바뀌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와 종을 나누는 기준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조와 종은 원래 격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가 종보다 나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이런 이름 바꾸기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살았을 때와 다르게 왕들에게 이런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 사당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기 위해 섭니다. 이런 이름을 묘호(廟號)라고 부릅니다.
     
    조와 종으로 죽은 왕을 부르는 것은 삼국시대 신라 무열왕이 사용했고, 고려 태조 왕건 이후 죽 쓰다가 원의 간섭으로 쓰지 못했습니다. 조선에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름법을 사용했습니다.

     
     

    태종(太宗) 무열왕릉 / 무열왕은 신라 임금 중 종(宗)의 묘호를 가진 유일한 자로서, 시호는 무열대왕이다.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여덟 글자가 뚜렷한 태종무열왕릉비 머릿돌 / 신라에서는 김춘추의 업적을 기려 '태종'이라는 묘효를 썼으나 당태종이 건방지다고 지랄하는 바람에 추후로는 묘호를 거의 쓰지 못했다.
    열조(烈祖) 원성왕릉 / 원성왕은 조(祖)의 묘호를 가진 신라의 유이(唯二)한 왕으로, 시호는 원성대왕이다.
    태조(太祖) 성한왕의 기록이 있는 흥덕왕릉비
    개성 공민왕과 노국공주릉 /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당당히 묘호를 사용했으나 공민왕을 비롯한 원나라 간섭기의 고려 왕들은 묘효가 없다.

     
    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설명을 따르자면 태조는 나라를 세운 왕이기에,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선조는 여진족 니탕개의 난과 임진왜란을, 인조는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을,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순조는 홍경래의 난을 겪었기에 묘호가 '조'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묘호에 '조'가 붙는 왕들이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여겨진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의 치세에 일어난 특별한 변란은 없는 듯하니,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 전쟁도 없었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란과 같은 변란도 없었다. 사실 무신란은 무신들이 일으킨 대규모 병란(兵亂)이 아니라 무신년(戊申年, 1728년)에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의 무리들이 한 번 꿈틀대본 것에 불과해 난(亂)이라고 부르기 무색한 구석이 있지만 어찌 됐든 무기를 들고 봉기했으니 병란으로 치부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정조의 치세에는 이렇다 할 병란이 없었다. 그래서 '조'가 된 것이 언뜻 이해가 안 가지만 할아버지 영조를 따라 '조'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영조나 정조는 본래 묘효가 영종, 정종이었다. 왕조실록 등에서도 내내 그렇게 쓰였으니 두 사람이 영조나 정조로 불려진 예는 한 번도 없다. 그러다 훗날 대한제국 시기 황제로 추존되며 영조와 정조로 격상되었다. 순조도 처음에는 순종이라는 묘호를 가졌었는데 철종 때 순조가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홍경래의 난이라는 대란(大亂)을 겪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원릉
    영종대왕 산릉도감 / 영조의 무덤 조성경위를 적은 산릉도감에도 영조는 영종으로 표기되었다.

     
    이때 영조의 경우는 앞서 말한 무신란이 준용되었을 것인데, 정조의 경우는 이렇다 할 변란이나 병란이 없었던 바, 2대 임금 정종(定宗)과 발음이 같다 하여 영조를 좇아 정조로 고쳐진 듯하다. 이것이 정확히는 대한제국 선포 2년 후인 1899년의 일인데, 이때 고종의 4대조 추숭에 따라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도 황제로 추존되었다. 


     

    개성에 있는 정종의 후릉 / 정종은 묘호를 받지 못하고 명 황제가 내린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로 대신했다.
    문조의 수릉 / 효명세자는 1834년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문조(文祖)로 추승되었다. 시호는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오늘 말하려는 세조의 경우도 꽤 애매한 경우다. 나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세조라는 묘호가 쓰여졌다 설명했지만, 사실 이것은 좀 이상하다. 그렇게 보면 묘호를 지은 당대의 사람들 역시 수양대군이 계유년(癸酉年, 1453년)에 변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음을 인정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실히 하자는 의미에서 찾아본 '나무위키'의 설명 역시 그러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은 잘못된 설명이니, 당대의 사람들이 세조에 대해 난(쿠데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사람으로 평가했을 리 만무하다.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당대 사람들은 계유정난을 쿠데타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으니, 이것은 계유정난의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政亂이 아니라 靖難이라 쓰기 때문이다. 변란을 바로 잡아 편안하게 했다는 뜻이다.
     
    당대 사람들은 변란의 장본인이 수양대군이 아니라 그 반대편인 김종서, 황보인의 무리라고 여겼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김종서,황보인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수양대군이 바로잡은 사건이 계유정난인 것이니, 위 '나무위키'를 비롯해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계유정난의 정의는 모두 잘못된 설명이라는 말이 된다. 

     

     

    세종시 장군면의 김종서 묘 / 김종서의 시신은 저자거리에 효수되고 옷과 신발을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다리 한짝이 묻혔다는 말도 있다.


    그 계유정난의 장소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서울 종로구 재동을 말함으로, 재론하자면, 피비린내 진동하던 서울 재동의 역사는 조선초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냈다. 이에 그는 한명회, 권람, 홍윤성, 양정 등의 심복들과 1453년 계유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의 권신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왕명을 빙자해 권신들을 입궐시켜 살해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살생부(殺生簿)로 여기 이름이 적힌 자는 다 죽었다. 일환으로써 한명회는 자객을 보내 재동과 그 인근에 살던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허후, 이우직 등의 문무대신을 살해했는데, 재동은 당시 살해된 자들이 흘린 피와 피비린내를 덮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재(灰)를 가지고 나와 뿌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 잿골, 즉 재동이 갑오개혁 이후 재동(齋洞)이라는 한자명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일이 내란으로 간주되어 탄핵소추되었고 그에 대한 판단이 내일 모레 나온다. 그래서 지금은 헌재 앞길이 완전히 차단돼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부근은 운집한 찬반 집회자들로 팽팽한 긴장감이 연출된다. 이와 같은 심장 쫄깃한 긴장감은 참으로 오랜만인데, 차제에 하고 싶은 말은 계유정난과 마찬가지로 내란 세력에 대한 인식이 어느샌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국회 소추인단이 내란죄를 슬며시 철회한 것이 결정적이다. 상황이 유리하다는 주관적 인식과, 인용을 빨리 이끌어내려는 생각에서 (이것이 일부 좌편향 헌재 재판관들의 권유인지, 소추인단의 판단인지는 아직 모르겠고, 앞으로도 밝혀질 것 같지 않지만) 심리에서 내란죄를 뺀 것 같은데, 만일 기각이나 각하가 나온다면 또한 이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소추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았으므로 유죄의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찍어 보내준 선고기일 통지문
    작년 12월 탄핵소추 무렵의 헌법재판소 앞
    1월 21일 윤대통령 1차 변론 때 차벽으로 차단된 헌재 앞길
    삼일대로로 밀린 탄핵 반대 시위대
    지난 주말 광화문 앞에 모인 탄핵 찬성 시위대
    지난 주말 이순신장군 동상 쪽의 탄핵 반대 시위대
    안국전철역 사거리 오늘 풍경
    재동초등학교 사거리 오늘 풍경
    안국빌딩 앞 탄핵 찬성 시위대
    천도교 수운회관 앞 탄핵 반대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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