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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학아세의 전형 國家安康 君臣豊樂과 헌법재판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3. 23:26

     
    곡학아세(曲學阿世)는 '학문을 왜곡하여 권력과 인기에 영합하는 일'을 이르는 말로, 학문을 하는 자가 가장 경계하고 금기시해야 할 행동으로 꼽힌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릇된 행동으로 권력에 야합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학문을 하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으란 법은 없기 때문인데, 그중에서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 벌어진 호코지(方広寺)란 절의 범종에 새겨진 글씨를 잘못 해석한 일은 대표적 곡학아세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세력을 누르고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히데요시 파의 잔존 세력을 누르기 위한 작업을 획책한다. 그중에 교토 호코지 대불전 공사가 있었다. 1614년, 5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한 높이 49m, 전장 88m의 대불전은 사실은 히데요시 가문의 재정을 피폐시키기 위한 공사였던 것이다. 
     
    호코지 범종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이란 글씨가 문제 되었다. 문장의 뜻은 '국가가 평안 강녕하고 군신이 풍요와 즐거움을 누린다'는 매우 평범한 글귀였다. 그러나 이에야스 측은 그 문장에 음모론적 해석을 내렸으니,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家·康의 두 글자로 쪼갠 것은 이에야스를 죽이겠다는 뜻이고 君臣豊樂은 '즐겁게(樂) 도요토미(豊臣)가 임금(君)이 된다'는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 거꾸로 읽으면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아울러 '우복야원조신 가강공(右僕射源朝臣家康公)'이란 문구도 문제 삼았다. 이것은 우보쿠샤(右僕射, 이에야스의 관명)로 임명된 이에야스 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이었지만 당시의 어용학자들은 이를 '右僕이 源씨 신하 家康公을 쏜다(射)'고 해석하여 반란을 도모하려는 의미라고 보고했다. 이에야스 쪽에서는 옳다구나 싶어 글자를 새긴 승려를 문초하였다. 승려는 어용학자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적 해석은 부정했지만 도요토미가(家)의 부흥은 바랬다는 자의반 타의반의 말을 해야 했고, 도요토미가의 모반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마침내 이에야스는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던 바, 1614년 벌어진 오사카 겨울 전투와 1615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에도막부 시대를 연다.   

     

    교토 호코지 / 문제의 대불전은 지진, 벼락, 화재로 인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호코지 범종각

    호코지 범종의 문제 글귀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엊그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곡학아세가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온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자신들의 비리를 지적한 감사원을 대상으로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권한 쟁의 심판에서 "감사원의 중앙선관위에 대한 직무감찰은 위헌·위법이다"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문제 된 조항은 헌법 97조와 감사원법 24조이다. 헌법 97조는 '국가의 세입, 세출의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 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대한 감찰'을 하기 위해 대통령 소속하에 감사원을 두도록 돼 있는데, 직무감찰 범위를 세분해 적시한 감사원법 24조 3항에는 '이 공무원의 범위에서 국회·법원·헌법재판소 소속 공무원은 제외한다'고 명시하였다.
     
    쟁점은 위 헌법 97조의 '행정기관'에 선관위가 포함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헌재는 "헌법 97조의 감사원 감사대상인 행정기관에 선관위는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판결했다. "선관위에 대한 직무감사는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수행 권한을 침해한다"는 것으로,  근거로서 헌법이 선거 및 투표관리사무를 독립적 헌법기관인 선관위에 맡기고 있을 뿐 아니라 조직운용, 내부규율 등에 관한 사무도 독립적인 수행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뭔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감사원법에는 분명 '직무감찰의 범위에 국회·법원·헌법재판소 소속 공무원은 제외한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삼권분립의 정신과 취지를 존중한 듯하다) 하지만 그 범위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헌재는 "감사원법 24조에 감사원의 감사가 적용되지 않는 기관으로 국회·법원·헌법재판소를 정하고 있지만, 이는 '예시적·확인적' 규정이므로 비록 법 조문에 선관위가 적혀 있지 않더라도 헌법 해석상 감사가 적용되지 않는 기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왜 문제인가,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뉴 데일리의 일목요연한 설명문 기사

     
    아무튼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로써 우리나라 선관위는 불법을 저질러도 감사를 할 수 없는, 그리하여 아무리 죄가 위중하더라도 처벌을 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기관이 됐다. 부정 취업 등, 가뜩이나 부정과 비리의 온상으로 온 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고 있는 기관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알고도 아무런 제재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만 헌재는 선관위의 자정 노력을 강조했는데, 고양이는 생선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보다도 공허하다. 아무리 막가는 헌재라지만 이 같은 막장 판결에는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중앙선관위
    이제는 아무런 평가도 하기 싫은 헌법재판소
    그도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일까? 문형배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판결문만을 읽어내려갔다.

     
    '경종(警鐘)을 울리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중요한 문제를 알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급한 일이나 비상사태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종이나 사이렌 등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한 경종을 울릴 책임감이 있는 기관인 헌법재판소가 그 범종을 아예 돌 종(石鐘)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위급 상황에서도 종이 울릴 일이 없으니 개개인이 좀 더 주위를 살필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몰지각한 법관들에 의해 이렇듯 무력하게 무너져내리고 있는 즈음, 문득 안양박물관 뒤쪽에 있는 고려시대 석종 암각화가 떠올라 사진을 올려본다. 시의가 적절한 듯하기에..... 사진은 작년 여름에 찍은 것들이다.   
     

     

    안양시 석수동 산 32번의 마애종
    우리나라 유일의 암각(岩刻) 종으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
    안내문
    안양박물관의 탁본 / 마애상 종의 전체 높이는 126cm이며 그 옆에 서있는 승려상의 높이는 102cm이다. 고려시대 출토 인골을 기준으로 남자의 평균 신장을 추정한 결과는 166cm 정도이며, 이를 기준으로 종의 크기를 환산하면 대략 205cm정도가 된다.
    안양박물관의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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