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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중국 원정에서 연전연승한 최영 장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돌아온 이성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26. 22:05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와 거란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은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관해 논한 위의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옮긴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나, '이성계의 요동 정벌로 우리가 남만주의 주인이 되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회자되는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도 그런 아쉬움이 있던지 (혹은 정약용 개인의 역사 소양으로부터의 상상력인지) 그는 자신의 문집인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에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이상은 정약용이 전제로 한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은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된' 경우이고, 국초(國初)의 거란과의 싸움에서부터 여진, 몽골 등의 초강적과의 싸움 및 원·명 교체기의 홍건적과의 싸움까지 거의 500년간 전쟁에 전쟁을 겪으며 온 국민이 실전감각을 익힌 싸움꾼의 나라 고려의 경우는 달랐으리라는 판단이다.
말하자면 정약용은 조선과 같은 유약한 나라에서 살았기에 그와 같은 워딩이 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고려는 정약용의 생각과 달리 요동을 수복하여 차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요동 원정으로 힘을 과시하여 명나라의 동진(東進)을 막고 고려에의 간섭을 제어하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고려 사람들을 소개시키려는 부수적인 목적도 있었다.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원·명 교체기의 요동은 요동쳤다. 중원을 지배했던 원나라는 신흥국 명나라에 밀려 만주 북쪽 원래의 제 땅으로 올라가 북원(北元)이 되었고, 그 틈에 고려 공민왕이 군사를 파견해 무주공산이 된 요동을 점거한 것인데, 이 땅을 명나라 주원장이 넘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공민왕이 차지한 요동 땅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니,
그곳은 본래 고려 충선왕(1275~1325)이 원나라로부터 심양왕으로 봉해져 다스리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충선왕은 고려 왕과 심양왕(요동 왕)을 겸했던 것이다. 이는 충선왕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그가 볼모로 원나라에 있을 때 황족 회령왕이 원나라 황제(무종)로 등극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일에 대한 보답의 번봉(藩封)이었다. 그리고 원나라가 구획한 심양왕의 봉토(封土)는 오리지널 원나라 영토가 아니라 고려의 북쪽 영토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 봉토를 다스리는 자가 고려인인 데다 고려는 원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므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기 않았다. 또 사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심양왕의 자리는 고려인에게 세습되었으니 2대 심양왕(이때부터 이름이 심왕으로 바뀌었음)에는 충선왕의 조카인 왕고(王暠)가 올랐고, 다음부터는 고려 충목왕과 충정왕이 연이어 심왕을 겸했는데, 마지막엔 탈탈불화(재위 1354~1376)가 심왕으로 요동을 다스렸다. 지도를 보자면 아래와 같다.
원말(元末) 고려인이 다스렸던 요동 땅 탈탈불화는 몽골 이름이지만 고려 사람으로, 2대 심왕 왕고의 손자이다. 그 요동 땅의 일부가 쌍성총관부로서, 거긴 원래가 고려의 고유 영토였다. 그걸 무도한 고려 놈들이(조휘, 탁청 등) 원나라에 갖다 바치며 딸랑거린 적이 있다. 그 쌍성총관부를 포함한 요동 땅을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공민왕이 되찾아 왔는데,(역시 공민왕!!) 이때 활약한 사람이 최영, 이성계, 지용수,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왕인 우왕 때 명태조 주원장이 빡치는 소리를 했다.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선양·신주 등지의 군(軍)과 민(民)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
무슨 말인고 하니, 주원장은 옛 원나라가 다스리던 철령 이북 쌍성총관부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해 명나라 땅으로 삼고, 그 아래 개원·선양·신주의 땅까지 명나라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땅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다시 설명하자면 1258년(고종 45) 몽골의 침입 때 배신자 조휘(趙暉)와 탁청(卓淸)이 병마사 신집평을 죽인 후 철령 이북의 땅을 몽골에 들어 바치며 항복했고, 이에 몽골(원)이 그 땅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100년간을 다스렸던 것인데, 공민왕이 회복한 이곳을 주원장이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북부와 요동 개원 · 철령 · 선양의 위치 주원장을 이를 실행에 옮겼으니 홍무(洪武) 21년(1388년, 고려 우왕 14년) 은주(銀州)에 철령위를 설치했다. 즉 철령위의 위치는 은주가 되는데,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중국의 대표 인터넷 사전인 <백도백과>는 은주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 현종 개원 원년(713) 발해 대씨(大氏, 발해 태조 대조영)가 이 지역을 차지해서 부주(富州)로 삼았다. 부주는 거란 신책(新冊) 2년(917)에 요(遼) 태조가 이 땅에서 은를 제련했기 때문에 부주(富州)를 은주로 바꾸었는데, 강역의 대부분이 동경도(東京道) 요양부(遼陽府)에 속했다.
명나라 때 은주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가 명 홍무(洪武) 26년(1393)에 철령위를 심양과 개원(開原) 사이에 있던 옛 은주 땅으로 이주했다. (철령위의) 남부 강역은 요동도지휘사 철령위에 소속되었고, 서부는 요하의 부여위(扶餘衛)와 겹쳐서 속해 있었고, 북부는 삼만위(三萬衛)에 속했는데, 겸하여 한왕(韓王) 주송(朱松)을 철령, 개원에 봉했다.
요나라 지도상의 은주의 위치 <명사(明史) / 지리지>에서는 철령위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철령위는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했다. 홍무 26년(1393) 4월 옛 은주 땅으로 이전했는데, 곧 지금 다스리는 치소다. 철령은 서쪽으로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으로 범하(汎河)가 있고, 또 남쪽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흘려서 요하로 들어간다.
또 (철령) 남쪽에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1396) 이곳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설치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철령위 남쪽에 있는데, 범하성(汎河城)이라고도 부른다. 정통(正統) 4년(1439) 이곳에 범하천호소(汎河千戶所)를 설치했다. 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곧 옛 철령으로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년에 봉집보를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
심양시 남쪽 봉집보 유지 표석 봉집보의 위치 / 심양 아래 40리에 위치한다. 고려는 당연히 반발하였으니 우왕은 고려군을 북상시켜 압박을 가했고,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표문으로 철령 일대가 자국의 영토임을 천명했다.
"철령 이북을 살펴보자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가 본래 본국(고려)의 땅이었습니다. 철령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 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鐵嶺之地實其世守 乞仍舊便)
그러자 주원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칙유하노니 깨달아 본분을 지켜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도록 하라."(高麗舊以鴨綠江爲界 今飾辭鐵嶺 詐僞昭然 其以朕言諭之 俾安分 毋生釁端)
이렇게 되면 말로써, 혹은 글로써 할 지경은 넘은 것이었다. 주원장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던지, 아니면 무력충돌하여 철령의 땅을 되찾아 오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문하시중이자 팔도도통사였던 최영은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최영은 명나라 군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만만했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는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장사성(張士誠)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공민왕은 이에 응하여 유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정예군 2천 명을 파견했는데, 이때 유탁의 부장이었던 최영은 고우성 전투를 비롯한 스물여덟 번의 전투를 치러 스물여덟 번 승리했다. 최영 이후에도 원나라의 요청으로 귀국하지 않고 고려군을 이끌고 강소성과 안휘성 등 중원 여기저기를 누비며 홍건적과 싸웠는데, 이때도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홍건적들은 최영의 이름자에 추위에 탔고 원나라에서도 최영의 파이팅과 고려군의 전투력에 놀라 마지않았다. 이와 같은 최영인지라 홍건족의 홍건군으로부터 결성된 명나라의 군사들을 우습게 볼 만했도 했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 우왕은 한술 더 떠 즉시 출병을 결정했다. 이성계는 유명한 사불가지론(四不可之論)을 들어 원정에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88년(우왕 14년) 음력 4월, 팔도도통사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기병 2만 천명을 포함한 도합 5만 명의 요동원정군이 결성되었다.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와 지용수의 1, 2차 원정에 이은 3번째 요동원정군이자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였다. 우왕과 최영은 고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하지만 최영은 실제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우왕은 고령의 최영이 혹시라도 선봉에 섰다 어찌 될까, 그를 서경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선봉에 서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이번 원정을 승산 없다고 여겨 내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그는 우왕과 최영이 자신을 정적(政敵)으로 여겨 사지(死地)로 내몰고 있다고 판단한 듯했으니,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러 장맛비를 만나자 이를 구실로 회군을 감행했다.
그리고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회유해 우왕과 최영을 공격하고 나섰던 바, 철령위를 향해 나아갔던 5만 대군은 역(逆)으로 수도 개경을 향해 내달았다. 거의 모든 군사를 차출해 보낸 개경에 그들에 맞설 병력이 있을 리 없을 터, 5천 명의 도성방위군은 곧 와해되고 궁성으로 쿠데타 군이 밀려들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각, 우왕은 폐위돼 강화도로 귀양 가고, 최영은 붙잡혀 합포 등지에 유배됐다가 개경에서 처형되었다.
기수를 남으로 돌린 이성계 개경 도성을 공격하는 이성계 절망하는 최영 최영은 얼마나 원통했던지 죽음에 앞서 "내가 만일 평생 동안 조금이라도 헛된 욕심을 가졌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외쳤다. 그의 나이 70살인 1388년이었다. 그의 유언대로 최영 장군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렸는데, 400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풀이 나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고양시 대자동 최영 장군 묘 / 부인 문화류씨와의 합장묘이다. 1928년 건립된 묘비 묘표 뒷면 뒤에서 본 모습 / 앞쪽 무덤은 최영에게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가르친 아버지 최원직의 묘소다. 1970년에 건립된 묘비 이성계의 회군에 신이 난 사람은 누구보다 주원장이었다. 앞서 '주원장은 어떻게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나?'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과거 비렁뱅이 고아로 떠돌다 호구지책으로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절에 침입한 홍건적 무리를 따라 도적의 무리에 합류한 비천한 전력을 가진 자였다. 이후 그는 무리 중 두각을 나타내 점차 높을 자리에 오르더니 1368년 1월 4일 스스로 황제에 올라 대명(大明)이라 하는 한족의 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은 건국 이후 다른 군웅들을 소탕하고 또한 원제국의 번왕들을 공격하였으니 1381년(명 홍무 14년) 12월 백석강 전투에서 운남의 양왕을 패망시키며 한족에 의한 통일왕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는 고비 때마다 황각사 시절 배운 길흉의 점(占)을 보았던 바, 황각사를 침입한 홍건적 무리를 따라나섰던 것도 스스로 본 점괘에서 길(吉)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려군이 쳐들어온다고 할 때도 점을 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결과는 다음 같았다.
"고려의 원정군이 쳐들어온다고 했을 때 나는 목욕재계(齋戒)를 하고 친히 태묘(太廟)에 나가 사흘 동안이나 점을 쳤다. 흉(兇)한 점괘가 계속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마터면 요동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도 권지고려국사(이성계)가 군을 물려 돌아갔다."
주원장의 점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시추에이션이다. 이성계의 회군이 재삼 어처구니없게도 여겨진다. 또 한 가지 어처구니없는 점은 우리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철령위가 설치됐던 쌍성총관부를 강원도 철령 북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나무위키에서 말하는 쌍성총관부의 위치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케우치 히로시, 이마니시 류, 쓰다 소키치 등)이 강원도 북쪽의 높은 고개 철령에 기인해 만든 식민사학이다. 대제국 원나라가 이 작은 땅에 연연해 이곳을 자기의 영토에 귀속시키고 관리를 파견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우리나라가 사학자들이 계승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원나라 영토는 아래와 같다.
원조(元朝)의 영역 중국 학계에서도 '철령위는 최초에 압록강 동쪽에 개설했다가 (고려군의 북상에) 요동 봉집보로 옮겨 설치했다'(鐵嶺衛最初設在鴨綠江以東 改置遼東奉集堡)는 것까지는 보편적이고, 더 나아가 봉집보의 철령위가 다시 지금의 요녕성 철령시(테링시)로 옮겨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테링시의 이름은 그래서 유래되었다고도 말한다. (아래 지도)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우리나라는 요지부동이니 어찌 된 셈인지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기존의 주장대로 라면, 고려가 주원장이 설치한 철령위에 반발해 요동정벌군을 파견했다면 강원도 철령 위의 땅인 원산만 부근으로 갔어야지 왜 압록강을 향해 갔겠는가?
철령시의 위치 / 브레이크 뉴스 지도 심양 북쪽 73.6km 지점으로 옮겨간 철령위 / 1393년 1차 철령위 설치에 고려군이 항의해 북상하자 주원장은 심양과 개원 사이로 철령위를 옮겼다. 지금의 철령시(테링시)가 위치한 곳으로, 과거 이곳이 고려와 명나라의 국경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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