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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에서 맞아죽은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5. 23:56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구한말 4차에 걸쳐 내각을 이끌었던 총리 대신으로 역사 교과서에 등장한다. 김홍집의 자(字)는 경능(敬能), 호(號)는 도원(道園), 초명(初名)은 굉집(宏集)으로 1882년 미국과 수교할 때 부사(副使)로써 인천에 파견됐던 김굉집이 바로 그다. 본관은 경주, 계림군의 16세손으로 나의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아울러 내가 역사를 공부하며 만난 조선의 역대 관료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 경위는 아래와 같다.
김홍집(金弘集, 1842년~1896년 2월 11일)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도착한 1880년 7월 6일 도쿄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옆 탁자 위에 '수신사인'이라고 쓰인 수신사의 도장 함을 놓아 권위를 나타냈다. 김홍집의 거의 유일한 사진이다.
김홍집은 1842년 서울 안국방 경운동에서 개성 유수를 지냈던 김영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영작은 인원왕후(숙종의 계비)의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으로, 당대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박규수와의 친분이 주목된다. 여러 번 말했지만 박규수의 집은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바, 거주지가 지척이었던 두 사람이 자주 회동했을 것임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일강점기 관훈동 · 경운동 · 안국동 · 재동 지도 650년 된 헌법재판소 내 백송 / 박규수 집 사랑채 뒤뜰에 있었다는 바로 그 백송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바라보이는 백악산 / 당연히 박규수의 집에서 보였을 산이다. 헌법재판소 마당의 박규수 집터 표석 박규수의 편지 / 1849년 평안도 용강 현령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형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다. 용강과 한양의 온도 차이를 경도와 위도에 견주어 말하고 있어 선진과학 기술을 터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박규수가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박영효·박영교(박영효의 형)·홍영식·서광범의 사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까닭에 김영작과 박규수의 두터운 친분은 김영작의 아들 김홍집에게도 개화사상이 미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다만 급진적이지는 않았으니, 훗날의 사가(史家)들도 위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급진개혁파로, 김홍집은 온건개혁파로 분류한다.
안국동 사거리의 안동별궁 터 / 지금 공예박물관 들어선 안동별궁은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갑신정변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은 급진개혁파가 이곳에 불을 지르며 시작됐다. 안국동 사거리 풍경 김홍집의 집이 있던 서울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
그 온건함은 김홍집의 캐릭터이기도 했으니 당시 조선에 주재했던 열강의 외교관들은 예외 없이 그의 부드러운 성품과 젠틀한 매너를 칭송하였으며, 더불어 조선의 기둥이라 평가해 마지않았다. 그의 관료생활은 1867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던 바, 6조의 참의를 모두 거치며 미래의 영의정을 예약했다. 무탈했을 것 같은 그의 정치 인생은 1880년 7월 일본에 2차 수신사로 파견되며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지 유신으로써 일찌감치 개화한 일본은 조선에도 개화를 독려해, 자신들의 발전한 문물을 시찰할 이른바 수신사들을 초청했다. 그리하여 1876년 4월 김기수를 단장으로 하는 1차 수신사 73명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 서양식으로 변모한 일본의 과학과 문물에 애써 눈을 감았으니 약 두 달(4월 29일~5월 27일)간의 방일(訪日)이 전혀 무익했다.
김기수는 일본 측이 베푼 환영 무도회 행사에서 남녀가 엉겨 왈츠를 추는 광경에 기겁했고, 서양식 의학교 시찰에서 시신의 해부 광경에 재차 기겁한 후, 시찰 기간 내내 숙소에 틀어박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수신사 김기수가 쓴 기행문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의하면, 그가 본 개화는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으며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김기수에 대한 학습효과에 일본 조정에서는 다시 2차 수신사를 초청하며, 이번에는 개화에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자를 단장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선발된 사람이 바로 김홍집이었다. 그는 1880년 7월 6일부터 8월 말까지 약 2개월을 머물었는데, 이때 시찰과는 번외로 주일(駐日)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허루장)을 만났다. 그리고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 황쑨셴)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책이 조선의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김홍집이 방일 성과로써 임금 앞에 내민 <사의조선책략>은 '내가 생각하는 조선의 외교 방책'이란 뜻으로서, 곧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제목으로 필사되고 간행되었다. 내용은 역시 조선의 개화와 외교 다면화를 촉구한 것인데, 그중에는 조선의 국기(國旗) 제정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도 있었다. (그때까지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문제의 책 <조선책략>
문제가 된 것은 그 책에 실린 외교론으로 에센스는 "중국을 가까이하고, 일본 · 미국과 손을 잡아 조선 스스로 강해짐으로써 러시아를 막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기실 황준헌의 뜻이 아니라 청나라의 실력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리훙장)의 뜻이었다. 앞서도 몇 차례 말했지만 이홍장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860년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은 제국주의 러시아는 그 땅 가장 남쪽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건설했지만 그곳도 겨울에는 얼었다. 이에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더 남쪽으로 가기를 원했는데, 그곳에 조선이 있었다.
반면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기를 강력히 희망하였으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수교를 조선에 권했던 것이다. 즉 이홍장은 이른바 균세론(均勢論, POWER OF BALANCE)을 이용해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을 막으려 했던 바, 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여 나라를 지키라는 충고를 황준헌을 통해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홍장의 뜻은 조선 내에서 매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영남 유생들로 대표되는 위정척사파들이 이른바 영남 만인소를 올려 이 사문난적의 책을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라며 생난리를 피웠다. 우리 조선은 오로지 저 중국만을 상국(上國)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거늘,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같은 서양오랑캐와 친교를 맺으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두쪽 나도 결코 해서는 안 될 금수 같은 처신이라는 항의였다. 마치 요즘의 맹목적 친중국주의자와 같은 행동으로,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은 영남 만인소를 대표하여 서명하였고, 위정청사파의 거두 이항로의 제자인 홍재학은 관동 대표로 서울에 올라와 상소문을 올리고 광화문 앞에 퍼질러 앉아 항의했다.
중국보다 더 중화적인 한심한 사고를 가졌던 것이 당시의 유생이었다. 반면 김홍집은 일본에서 보고 느낀 점이 많았던 바, 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여 나라를 지키고 싶었고, 일본처럼 개화된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시행된 것이 1894년 7월 27일부터 1895년 7월 6일까지 일제를 등에 업고 실시한 김홍집 내각의 1, 2차 갑오개혁이었다. 이후 갑오개혁은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실시 항목을 보면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 모두 200여 가지나 되었다.
개혁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한 김홍집은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여 드디어 국왕과 왕세자의 머리도 깎게 만들았다. 즈음하여 그간의 음력을 폐하고 태양력을 도입,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정하였으며 이를 기념해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도 제정했다. 더불어 정부 주도의 강제 종두법을 시행하였으며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국가의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한 조치로서, 이상의 개혁은 그가 세운 군국기무처라는 막강한 기관에 의해 시행되었다.
조선의 피폐한 구습(舊襲)과 미개를 일거에 타파한 이 일련의 조치들은 조선의 앞날을 위한 길이었음에도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특히 오랜 구습에 젖은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악법이었다. 이를 테면 노비 해방과 같은 일은 그들의 경제력을 크게 제한하는 일이었고, 오랜 기간 수절을 미덕으로 여기던 사회에 있어 과부가 재혼한다는 것은 그간의 미풍양속을 망가뜨리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상투와 댕기머리를 자르라는 이른바 단발령(斷髮令)은 '목은 잘라도 머리칼은 못 자른다' 할 정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부국론(富國論)을 지향하는 개혁의 방향은 그간 개혁을 지원해 준 일본 측의 방향과는 달랐던 바, 일본의 불만을 불러왔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조선 공략에 고종과 민왕후(명성황후)가 넘어가며 왕실의 지원 역시 현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이 극점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일본은 목전으로 다가온 러일전쟁에 앞서 친러파 민왕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고 1895년 10월 8일 마침내 이를 시행에 옮겼다. 민왕후가 일본 군인들에게 시해된 이른바 을미사변이었다.을미사변의 현장 경복궁 건청궁 명성황후의 침전 건청궁 정시합 일본군인들은 명성황후의 침전인 이곳 정시합까지 난입해 난장판을 만들었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극비리에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에 성공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부탁해 러시아군인 4명으로 하여금 경무청 부관(副官) 안환(安桓)을 붙잡아오게 했다. 조선 경찰의 중견간부 안환은 러시아군인에 의해 불문곡직 끌려가 고종 앞에 서게 되었는데, 거기서 안환은 고종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다. 지금 당장 가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를 체포하고 곧바로 참수하라는 것이었다.당시의 러시아공사관 6.25 때 파괴되어 지금은 전망대만 남은 정동 러시아공사관 조선 경무청이 있던 광화문 교보빌딩 / 안환은 출근하자마자 이곳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피체되었다. 고종은 그 두 대신이 일본에 협조해 민왕후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니, 그렇게 여기게 된 배경에는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이 밀어붙인 개혁 드라이브 정책이 있었다. 이어 고종은 민왕후 시해에 직접 관여된 조희연, 장박,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영진 등도 즉시 목을 베 바치라(卽刻斬首來獻)는 명을 내렸다. 안환은 직속 부하 소흥문(蘇興文) 등을 데리고 김홍집을 체포하러 경복궁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이미 광화문 광장에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보부상들이 발 빠르게 집결해 있었다.
그들 보부상은 관(官)의 특전을 누려오던 어용상인들로 친러파 대신 박정양과 이윤용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불러 모은 사람들이었다. 그 무렵 김홍집은 국왕의 파천 소식을 듣고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주권국가에서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한 후 자신이 직접 가서 간(諫)한 다음 임금을 모셔오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내무부대신 유길준이 궐밖 모인 백성들의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전하며 피신할 것을 권했다.
"총리나리. 지금 아관으로 갈 때가 아닙니다. 궐밖 백성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먼저 피하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우선 제가 가서 일본공사관 군인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궐밖에서는 이미 김홍집을 죽이라는 친러군인들과 백성들의 고함이 섞여 들여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홍집은 담담히 답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차라리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됨은 떳떳하지 못하오."
이어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카와 함께 광화문을 나서려는데, 마침 들이닥친 안환의 무리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나오려는 순간, 광화문 앞에 운집해 있던 보부상을 비롯한 민중들이 김홍집을 향해 일제히 돌을 던졌다. 날아든 돌에 안환의 무리들도 맞았다. 그러자 안환을 비롯한 경찰들이 칼을 빼 민중들을 흐트려뜨렸는데, 그 칼이 다시 곧 김홍집을 향해 날아들었다. 즉참(卽斬)하라는 고종의 명령이 시행된 셈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김홍집은 단칼에 죽지 않았던 바, 부상을 당한 채 백성들에 의해 해태상 앞까지 끌려왔다. 백성들은 그에게 돌과 기와조각을 마구 던졌고, 피투성이 상태로서 해태상에 기대 돌을 맞던 김홍집이 어느 순간 주저 앉듯 쓰러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돌을 던졌고, 돌팔매가 그치자 누군가는 미동도 없는 그의 살을 베어 씹어먹었다. 공을 세우려는 것인지 앞서 말한 소흥문은 김홍집의 신낭(腎囊,고환)을 꺼내 칼로 베어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옛 광화문과 해태상 일국의 총리대신은 그렇게 죽었다. 때는 1896년 2월 11일 오전이었고, 향년 54세였다. 그리고 어제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30분경 헌법재판소에 판결에 의해 일국의 대통령이 죽었다. 그간 대한민국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추진하다 힘에 부쳐 쓰러진 대통령이 결국 정치적 죽음을 맞고 만 것이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이 무능한 임금의 명령에 의해 죽었다면 대통령 윤석열은 법과 원칙을 대놓고 무시한 여덟 명 재판관의 불의한 판결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 오후,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무도한 민중들이 광화문 광장 해태상 주위에 모여 환호하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화문 앞의 인파 부언하자면, 어제까지 정경부인이었던 김홍집의 부인은 하루아침에 관노비가 되어야 했던 바, 차라리 자진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뒤늦게 본 어린 아들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대들보에 목을 맸다. 김홍집의 유해는 훼손된 채 하룻밤을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보내졌는데, 경찰 간부인 경무사 안경수가 고종에게 고한 "외국인의 시선이 많은 곳이다. 그들이 야만이라 평할 것이다"라는 말에 시신은 가족들의 손에 인계됐고, 멀리 파주 임진강변에 암장되었다.
개혁세력이던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역시 광화문 광장에서 같은 꼴을 당해 죽었고, 도망갔던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용인에서 현지 백성들에게 붙들려 타살되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일본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했던 유길준은 결국 뜻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57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일본이 조선합병 후 수여한 남작의 작위는 끝까지 거부했다.
어윤중 미국 유학시절의 유길준 파주 문산읍의 김홍집 묘는 일제강점기 경주김씨 문중에 의해 단장되었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선조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김홍집은 일국의 영의정과 총리대신을 지냈음에도 그 묘는 김주신의 유택에 비해 형편없이 작다. 하지만 비록 그렇듯 보잘것없음에도 보존되고 있는 것이 천운이라 할 만큼 어지럽고 아픈 광란의 시절이었다. 그 광란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양시 대자동의 김홍집 무덤 / 상석과 장명등은 근자에 조성된 것이다. 묘표 김주신의 무덤 묘표 김주신 무덤의 석물 사당인 영사재(永思齋) 영사재는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을 기리기 위해 숙종 35년(1709) 건립한 건물로, 이후 퇴락한 것을 2014년 옛 부재를 사용해 재건했다. 재실 역시 재건되었으나 숙종조 당시의 옛 모습을 살렸다. 입구에 재건 당시 발견된 옛 상량문이 걸려 있다. 재실 옆에 있는 김주신의 신도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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