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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한 이재명, 정청래, 조국의 3호경식지경(三虎競食之境)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8. 8. 19:28
조선 24대 왕 헌종(1827~1849)의 출중한 외모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조선왕조 사상 가장 섹시한 왕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잘 생긴 외모였다. 그래서 궁중의 여인들은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았는데, 그 자신 또한 호색한으로서 여색을 밝혔던 바, 자신의 처첩 외에도 궁중의 웬만한 나인들은 죄 자빠뜨렸다. 당연히 정력제용 보약도 많이 처드셨는데, 현대의학자들은 그것을 요절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약물 과잉으로 인한 간염이나 간경변 합병증이 사인으로 짐작된다는 것이다. 그는 22세로 죽었다.

동구릉 경릉 / 헌종,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으로 조선왕릉 유일의 삼연릉이다. 헌종은 살아생전 그렇듯 호색한이었음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후사를 만들지 못했다. 어쩌면 무분별한 방사가 원인일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왕손이 생기지 않자 왕실에도 걱정이 깊어갔는데, 이에 현종의 조모 순원왕후는 덕흥부원군(선조의 아버지)의 종손인 경원군 이하전(1842~1862)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인손(仁孫)이라는 아명을 내렸다. 순조의 무덤 이름이 인릉(仁陵)이었던 바, 순조의 맥을 잇는 손자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었다.

헌인릉 인릉 
헌인릉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으로 참도에 신도와 어도의 구별이 없다. 헌종의 먼 친척인 이하전이 후계자가 된 것은 순조 이후 워낙 씨가 귀했던 탓에 헌종의 주변에서는 왕위를 이을 친족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하전은 헌종의 자리를 승계하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사실 대로 당대의 실세는 안동김문이었던 바, 안동김문에서 1786년(정조 10) 강화도에 유폐됐던 은언군(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의 손자 이원범을 데려 와 왕위에 올렸던 것이었다. 이 자가 바로 25대 왕 철종이다.
앞서 '역사는 흔적을 남기나 때로는 아예 사라지기도.... 부정선거론'에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까닭은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시전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은 죄였다. 같은 이유를 가진 김민석이 국무총리에 된 오늘날보다 훨씬 법과 도덕이 살아 숨 쉬는 시대로서, 때는 1771년(영조 47)이었다.그런데 이후 15년이 지나며 그의 손자 원범은 일자무식의 농사꾼이 되었던 바,(이원범은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농사꾼과 나무꾼으로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팍팍한 지경이었다. 따로 공부할 기회도 없었으니 당연히 일자무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되었다.
안동김문이 제 뜻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호구를 골라 임금 자리에 올린 것이었다. 조정에서 이원범을 내정하고 강화도에 그를 모시러 갔을 때, 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대문 밖에 있던 그의 형 이경응은 놀라 집 안으로 뛰어들다 댓돌에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강화행렬도 / 이원범을 데리러 온 관리들의 행렬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149x434cm의 12곡 병풍의 일부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이다. 
강화 용흥궁 / 철종이 살던 강화도 집이다. 
초가였던 곳이 잠저(潛邸)가 돼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궁(宮)의 명칭이 붙여졌다. 
"뭐? 강화도 촌놈이 내 신랑이 된다고?" / 철종 비 철인왕후는 안동김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다. 경원군 이하전은 이렇게 왕위를 놓쳤고 세상은 더욱 안동김문의 세상이 되었다. 보다 못한 이하전이 임금(철종) 앞에서 외쳤다.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안동김씨의 나라입니까?"
이하전은 평소 한 성깔하는, 옛날 표현으로는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선 후기 안동김문의 족벌 세도에 기죽지 않고 부당함을 외친 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치러야 했으니, 1862년 전(前) 오위장 김순성과 이긍선 등의 반역 일당에 의해 왕위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로써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끝내 사사되었다.
이하전의 무덤은 그의 조상 덕흥대원군의 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 덕릉마을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내란 수괴로 몰려 죽은 까닭에 묘표도 세우지 못하고 왕족임에도 그저 낮은 봉분만을 만들어야 했는데, 당시에 무서워서 차마 세우지 못하고 땅 속에 묻어두었던 묘표가 2007년 여름철 장마에 드러나며 무덤 30m 아래쯤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표는 그해 가을 후손들에 의해 무덤 옆에 세워졌던 바, 이에 대한 자세한 사연을 '경원군 이하전 무덤에 묘표가 두 개 있는 이유'에서 말한 바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의 이하전 묘 / 왼쪽에 세워진 것이 구 묘표이다. 지금 이재명과 좌빨들의 시퍼런 서슬이 당시를 회상케 하는데, 이하전 제거 후 천하의 권력을 김병국, 김병학, 김병기 삼경(三卿, 삼정승과 육조판서를 합쳐 이르는 말)이 다투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도 당시와 비슷하다. 어떤 책에선가 읽은 "수년간 국권을 장악하고 각각 권력을 키워 가다 보니 자연히 감정적인 충돌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고 처음의 도탑던 정은 온데간데 사라졌다"고 한 대목이 기억난다.
어제 8.15특사명단에 복역 중인 조국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위의 압력에 떠밀리며 결국 원치 않은 결정을 한 듯싶은데, 야당으로서는 뜻밖에도 이재명, 정청래, 조국이 다투게 될 '3호경식지경(三虎競食之境)'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이제 호랑이를 이용해 늑대를 잡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를 쓸 차례이나 스스로의 내분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야당이니 이 같은 호재를 활용할 턱이 없다.
결국 불쌍한 것은 민초들이니, 조선말 안동김문의 치세를 역사는 '민란의 시기'라고도 표현한다. 절대권력에 절대부패해진 세상에서 결국 민초들만 죽어났고, 참다못해 일어난 백성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 둘 힘없이 쓰러져가는 가운데 나라 또한 더불어 무력하게 망해버렸다.

순욱 / "서주에 여포가 들어와 이호경식지경이 되었습니다. 구호탄랑지계를 쓸 차례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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