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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는 억울한 판결을 받은걸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1. 22. 23:58
1589년(선조 22) 기축년(己丑年)에 일어난 기축옥사는 2년 여에 걸쳐 진행되며 1000여 명의 사람이 연루돼 목숨을 잃은 조선시대 최대의 정치 사건이다. 불쑥 디밀어 말하자면 재작년 12월 윤석열 계엄 선포로부터 사태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되치기 사건도 기축옥사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 바, 2년쯤에 걸쳐 진행되며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계엄은 청와대에서 시작돼 국회 앞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의 소란을 거쳐 단 하룻밤만에 해제되었지만 본진(本震)보다 강한 여진(餘震)이 계속되며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국회는 잠들지 않는다. / 그렇다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과천 중앙선관위 / 복마전 선관위는 국민 앞에 서버를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경복궁 사정전 / 기축옥사 정쟁의 현장이다.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그와 관련된 수많은 동인계(東人系)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주인공 정여립은 전주의 명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동래이며 증조부 정언신은 우의정을 지냈다. 그 외도 판서, 대사헌을 배출한 집안으로 아버지 정희중이 익산현감을 지낼 때 그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의 출생지는 전주성 동문 밖이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2)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분당 초기 힘의 우세를 보인 서인에 속했다. 선조 임금도 서인 편이어서 재위 16년인 1583년, 율곡 이이를 공격한 동인의 허봉·송응개·박근원을 모두 귀양 보내는 이른바 계미삼찬(癸未三竄, 계미년에 세 신하를 귀양 보냄)이 일어났다.
하지만 동인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으니 이발이 분전하며 서인의 거두 심의겸을 거꾸러뜨렸다. 심의겸은 명종 비(妃)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인순왕후는 뿌리가 약한 창빈 안씨(중종의 후궁)의 아들 하성군(선조)을 거두어 임금으로 만들어 주었던 바, 심의겸의 파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 8년(1575) 인순왕후가 사망하자 힘을 잃었다.

서울 정릉동 시립미술관 부근의 김장생 · 김집의 표석 / 심의겸의 집도 이 부근에 있었으며 경복궁의 서쪽에 산다고 해 서인으로 불렸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강릉 내 명종과 인순왕후릉
심의겸의 파직 사유는 '국정농단'이었다. 임금의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국정을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동인이 힘을 얻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홍문관 수찬 정여립이 대표적이었다. 정여립은 서인의 영수 율곡 이이가 아낀 인재였으나 이이가 사망하고 동인이 정권을 잡자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데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그리고 약 10년 후인 선조 22년인 1589년 10월 2일, 조정에 날아든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 한 통이 정국을 격랑으로 몰고 갔다. 장계의 내용인즉, 정여립이 고향 전주를 비롯해 김제·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역란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정여립이 실제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라고 떠들었다는 말도 사실인 양 떠돌았다.

전주성 동문 완동문(宛東門) / 명나라 완평성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1910년경 일제가 철거했다. 
완주군 '정여립 공원'의 정여립 상 / '천하는 공물'(天下公物)이라고 쓰여 있다. 
선조실록
선조는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해 사실을 확인토록 하였는데, 그러한 가운데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극심한 문초 끝에 길삼봉 등과의 공모를 자백했다. 그럼에도 함께 모의했다는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바, 실존 인물인지 어쩐 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길삼봉과 함께 주모자로 몰린 정여립은 전북 진안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몰려오자 죽도 천변산으로 들어가 자결을 했다.

금강의 비경 천반산과 죽도 / 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금강 본류와 만나 '내륙의 섬 죽도'를 만들었다. (중부매일 DB)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동인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던 이발 · 이길 · 김우옹 · 백유양 · 정언신 · 홍종록 · 정언지 · 정창연 · 최영경 · 정개청 등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관리뿐 아니라 평민, 노비도 걸리는 족족 처벌당했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끌려와 조사를 받았는데, 이 정체불명의 이 내란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1000명이 넘었다.
그들 동인 일파를 조사해 죽인 사람이 바로 서인 강경파 송강 정철(鄭澈)이었다. 선조에 의해 위관(委官, 국문 수사 책임자)에 임명된 정철은 정적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이길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아무런 물증도 없이 처단했는데, 참형을 당한 자, 교형을 당한 자, 고문으로 죽은 자, 불복하다가 매 맞아 죽은 자, 유배 가다 죽은 자, 유배지에서 죽은 자 등, 죽음의 형태도 다양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앞 정철 탄생지 표석 그 가운데는 진짜 억울하게 죽은 김빙(金憑)도 있었다. 김빙은 1580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까지 올랐는데 정여립과는 과거 서인 시절 사이가 좋았지만 그가 탈당하여 동인으로 간 후 관계를 끊었다. 따라서 김빙이 기축옥사에 연루될 일은 없었는데, 죽도에서 죽은 정여립의 시신이 경복궁으로 올라와 육시(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다시 목 베는 형벌)를 당할 때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김빙도 문무백관 속에 서서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서인의 입장에서 기뻤는지, 아니면 옛 친구로서의 안타까움이 있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때 겨울 찬바람에 눈물이 흘렀고, 때마침 이를 발견한 백유함(白惟咸)이 역적을 위해 울었다며 신고를 했다. 백유함은 오래전 파직되었다가 정철이 위관으로서 정권을 잡자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던 바, 어찌 됐든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터였다.
이에 김빙은 역적과의 공모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고신을 당하다 결국은 죽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가 본래부터 풍현증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풍현증은 오늘날의 안구건조증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구건조증이 없음에도 겨울철 찬바람이 불면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병증이라고 여길 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대중 앞에서는 가끔 민망할 때가 있다. 그래서 김빙의 죽음이 남달리 여겨진다.

참형이 있었던 연길당 앞 엊그제 징역 23년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전 국무총리 한덕수의 경우는 어떨까? 김빙만큼 억울한 경우일까? 정확히는 2026년 1월 2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이진관 판사는 12·3 비상계엄과 관련하여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77세로 고령인 피고인의 나이로 볼 때 징역 23년 형과 법정구속은 이례적으로 여겨진다.
구형량 15년보다 높아서가 아니다. 내가 이례적이라 하는 것은 10년도 아니고, 15년도, 20년도, 30년도 아닌, 23년이라서 이다. 모든 판결은 높으신 판사님의 주관적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니 일개 국민인 내가 왈가왈부할 것이 못된다고 여겨진다.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 하지만 77세에 23년을 더하면 100세가 된다는 산수 정도는 할 줄 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는 감방을 나올 수 없도록, 어쩌면 무기징역보다도 무거워 보이는 종신형을 선고한 판사의 고약한 의도만큼은 충분히 읽혀진다.
그 속내는 작년 10월 20일 이진관 판사가 조은석 특검에게 한덕수에 대해 내란 중요임무 종사죄를 병합해 공소장을 변경할 것을 권고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때 사실 섬찟했다. 한덕수에 대해 부화뇌동(내란 방조) 이상의 죄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죄를 적용해 중형을 처하겠다는 속내를 이미 내비친 것이었다. 검사의 구형보다 판사의 선고보다 형량이 높은 예는 종종 있다. 하지만 판사가 보다 높은 형량이 적용될 수 있도록 공소장을 변경하라고 한 경우는 난생처음 본다.
이렇듯 판사 잘못 만나 중형을 선고받은 한덕수이지만 그렇다고 김빙과 같은 억울함이나 동정심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업자득 같은 느낌이다. 작년 헌법재판소에서의 중요 증인이었던 한덕수 총리는 처음부터 공생(共生)의 생각은 없었고 저 혼자만 살고자 했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정당한 방법으로써 조건을 갖춰 법에 따라 진행했다'고 있는 그대로를 밝히지 않고, (그랬다면 대통령은 파면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오로지 제 살길만을 찾아, '나는 애오라지 탄핵에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강압에 의해 계엄에 참여하게 됐다'는 식으로 일관함으로써 대통령 파면의 정당성을 제공했다.
계엄 후 그는 한동훈과 함께 공동정권을 꾸리겠다는 '배운 사람' 답지 않은 초헌법적인 발상으로 세인들을 아연케 했는데, 이것은 그저 한동훈의 꾐에 넘어가서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하룻밤만에 국민의힘 당원이 되어 모사꾼들의 들러리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꽃가마를 타려다가 낙마하며 혼란을 제공한 일, 이후로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전혀 밀지 않고 다른 데 가 있었던 일은 적어도 보수 우파들에게는 용서받기 힘들다. 그러다가 결국은 정권을 빼앗기고 특검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제 살길만을 찾아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발언을 했지만 결국은 징역 23년이라는 중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그에 앞선 2026년 1월 13일,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 출입 차단 등 내란 가담 혐의로 기소된 조지호 전 경찰청장도 제 살길만을 좇는 비겁한 발언을 했지만 징역 20년이라는 중형을 구형당했다. 이번에 국민들은 좌파들이 늙었다거나 아프다거나 협조적이라고 해서 결코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전 대통령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죽이려들 것인즉 윤석열 전 대통령도 나를 죽여 타인을 살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로써 의연하게 재판에 임했으면 좋겠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어서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각오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 장군은 그 '사즉생(死卽生)'을 <난중일기>에 새기며 사지(死地)에서 조국과 스스로를 구하겠노라 다짐했다. 이순신 장군은 그와 같은 각오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싸웠고 마침내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냈다. 그는 마지막 노량전투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던졌지만 그로 인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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