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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법화골 전투와 내란 프레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1. 16. 22:59
법화골 전투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14일째 되는 1637년 음력 12월 28일 벌어졌다. 청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기는 했으되 아직은 여력이 있던 때였으며, 성 내에서는 주화론과 주전론이 치열이 맞붙고 있으되 여전히 항전 의지가 팽배하던 때였다. 아울러 마냥 농성만 지속할 수 없었고 이쪽에서도 공격이든 뭐든 해 살길을 찾아야 할 때였다. 마침 날씨도 좀 풀린 듯해 운신하기 적당한 날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임금을 이곳 남한산성으로 데려온 책임감 때문일까, 영의정 김류(金瑬)는 청군(淸軍)과 한판 붙고 싶은 눈치였다. 강행하였다면 보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강화도로 갈 수도 있었으나 자신이 우겨 임금을 이곳으로 데려온 만큼 살길을 열어야 할 책무도 있었다. 김류는 술사(術士)에게 오늘의 운세를 물었다. 머무르는 것이 좋겠는가, 싸우는 것이 좋겠는가 물은 것이었다. 술사는 "오늘은 화(和)·전(戰)이 모두 길하다"고 애매하게 답하였다. 혹시 패전을 하더라도 책임을 면하겠다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는데, 김류 역시 그런 자세였다.
"화·전이 모두 길하다 하니, 오랑캐와의 화의는 계속 진행하되 한편으로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소."
그 말에 병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이 불만을 표했다.
"싸우겠다면 싸우고 화의하겠다면 화의하는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전을 동시에 할 수 있소이까? 마치 노래와 울음을 동시에 터뜨리라는 것과 같지 않소이까?"
나만갑은 김류와의 앙숙인 사람으로, 과거 김류의 아들인 공조참의 김경징이 군관을 장살(杖殺)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처벌에 동조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인조는 잘못을 훈계하는 선에서 넘어가려 했으나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정엽(鄭曄)이 한사코 죄를 물었고, 정엽의 제자이자 사위였던 나만갑이 동조했다. 이에 나만갑에 원한을 품었던 김류는 훗날 붕당 결성의 죄를 물어 나만갑을 파직시켰다. 그런데 고향 용인에서 전쟁의 소식을 들은 나만갑은 임금을 모시겠다며 홀로 말을 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왔고, 이후 공조참의와 병조참지를 역임했다.
※ 나만갑(1592~1642)은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인물은 아니나 <병자록(丙子錄)>의 저자로써 그의 유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가 남한산성 피신 중에 쓴 일기형식의 <병자록>은 병자호란에 관한 사실성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병자록>에는 인조 14년(1636) 12월 12일부터 이듬해 2월 8일까지의 호란에 관한 참상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구리시 사노동 두레물골의 나만갑 선생 신도비와 묘소 
신도비 / 총높이 355㎝, 비신의 높이 242㎝, 너비 104㎝, 두께 29㎝로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비문 /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비각 옆 신도비는 아들 나성두의 것이다. 
나주 나씨 종중 묘 표시석 
나만갑의 묘 
묘표 / 부인 초계 정씨와의 합장묘이다. 
안내문 
후경 
마을 입구 표석
김류는 나만갑의 말에 찔리는 것이 있는지 급히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각 성문을 지키는 장수들을 불러 "북문 아래의 적진은 어설픈 듯하다. 정병을 내어 이를 무찌르도록 하라"는 영을 내렸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잘못된 계책임을 지적했으나 김류는 말을 듣지 않고 직접 포수(砲手) 3백여 명을 이끌어 북문을 나섰다. 약 1시간쯤 지나 법화골 마을 어귀에 이르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기병 십여 기가 보였다. 이에 김류가 발포를 명령했으나 사거리가 미치지 못한 듯 쓰러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고골 저수지 쪽으로 말을 달려 달아났다.

군사들이 나선 남한산성 북문 
성 안에서 본 남한산성 북문 
김류(1571-1648)의 초상 

그러자 김류가 내려가 좇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산을 내려가려 들지 않았다. 혹시 복병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고, 기마병인 청군이 말을 돌려 역습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류는 부장(副將)인 유호(柳瑚)에게 내려가지 않는 자를 참하라 했고, 유호가 몇 명의 병사를 죽이고 나서야 병사들은 우르르 내려가 적들이 버리고 간 말들을 취했다. 청군이 통상 여분으로 끌고 다니는 말들이었다.
이렇듯 흩어진 말들을 붙잡느라 조선군의 대오가 흐트러졌을 때 갑자기 저들의 목책 뒤에서 청병(淸兵)들이 나타나 활과 총을 쏘아댔다. 말들이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조선군도 놀라 응사했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쓰러지는 조선군이 부지기수였다. 우리 군사들은 우선 은폐·엄폐할 곳이 없는 한데서 적들을 맞을 데다 우마를 빼앗느라 대오마저 헝클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곧 화약과 탄환까지 떨어져 무방비 상태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딱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골짜기에서는 적의 총시를 맞아 쓰러지며 외치는 비명 소리와 탄약(탄환과 화약)을 달라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우리 군사들의 탄약이 일찍 떨어진 이유는 김류가 화약과 탄환을 아껴 써야 한다며 애초부터 적게 공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군에 어느 정도의 탄약이 지급됐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로부터 7일 후 벌어진 쌍령전투에서 경상도 근왕병(경상도에서 차출된 병사들)에게 지급된 정도의 탄약이 주어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쌍령전투는 1637년 음력 1월 3일,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올라 온 경상도 근왕군과 청군 사이어서 벌어진 전투로서, 이때 포수에게는 총탄 10발 정도를 쏠 수 있는 각 2냥씩의 화약이 주어졌는데, 청군의 기병대가 다가오자 겁에 질린 포수들이 난사하면서 배당된 탄약이 순식간에 떨어져버렸다. 뒤이어 청나라의 기마대가 덮치자 속수무책으로 박살나 버린 것이니 무려 사망자는 1만 명, 부상당한 자는 8천 명이 발생하는 사상 최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법화골 전투에서도 거의 같은 상황이 마치 쌍령 전투의 서막처럼 펼쳐졌던 것이다.


영화 ' 남한산성'에서의 법화골전투 장면 문관 허완이 지휘한 쌍령전투 / 무능한 자가 군통수권자가 되었을 때 II
쌍령전투는 병자호란 중에 일어난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로서, 밀리터리 덕후들이 임진왜란 중의 칠천량 해전, 6.25전쟁 중의 현리전투와 더불어 한국 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3대 패전으로 꼽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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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골에서의 아비규환은 앞서 도망 갔던 청군 기병이 돌아오면서 더욱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조선군은 채 한 시진(두 시간)도 못돼 별장 신성립(申誠立)·지학해(池學海)·이원길(李元吉)을 비롯한 300명 전원이 죽었다. 반면 청나라의 군사는 겨우 두 명만 죽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패전의 원인 제공자 김류는 산을 내려가지 않았고, 자신을 지키던 부장 유호가 있어 그와 함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유호의 목숨은 다만 거기까지였으니 유호는 위험에 처한 군을 퇴군시키지 않았다는 죄로써 참수되었다.
유호의 죄를 물은 자는 김류였다. 이에 사람들은 김류의 배은망덕과 유호의 죽음을 통탄해마지 않았는데, 김류는 더 나아가 아군이 위급한 상황임에도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북성장(北城將) 원두표를 참수하려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패전을 전가하려는 이 같은 수작은 더이상 통하지 않았으니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나서 "수장이 저질러 놓고 부장에게 죄를 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꾸짖으며 원두표를 보호했다.
이로써 원두표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원두표의 중군(中軍)은 심한 벌을 받았던 바, 김류는 행궁(行宮) 왕의 처소에 나가 엎드려 패전의 죄를 청하고 돌아와서는 분풀이를 하듯 원두표 휘하의 장수를 매질해 거의 죽게 만들었다. 군의 사기는 당연히 떨어졌으니 이후로 조선군은 적이 공격해와도 느릿느릿 움직였는데, 추위를 막기 위해 방한용으로 지급됐던 가마니떼기마저 말 먹이가 부족하다며 거둬간 후로는 거의 모든 병사가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법화골 전투 한 달 후인 1937년 1월 30일 인조 임금은 결국 성을 나가 송파 삼전나루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화 <남한산성> 중의 삼궤구고두례 / 홍타이지는 자신의 황제 즉위식에서 조선사신에게서 받지 못한 절을 조선의 임금에게 받았다.
송파구 오금동에 위치한 오금공원은 근방의 올림픽공원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동네 소공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오금공원에는 병자호란과 관계된 두 개의 구조물이 있다. 하나는 서쪽 출입구 인공폭포 암벽 위의 충민정(忠愍亭)이다. 충민은 임경업 장군의 시호로, 전쟁 후 간신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지켰던 임경업 장군을 소환해 내란 프레임을 씌워 죽여버렸다. 그래야 자신이 잡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 '한국 전사(戰史)상 최악의 전투 하남 법화골 싸움'에서 말했듯, 조선조정의 처사해 분기탱천한 홍타이지는 군사를 몰아 불과 열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 선봉장 마부태의 군대를 비롯한 청군은 백마산성 등의 북방 성을 밟고 온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시한 채 지나치는 사상 유래 없는 전술을 구사했다. 빨리 한양으로 가 임금만 잡으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는데, 이는 뒤의 적을 그냥 두고 온 관계로 자칫 앞뒤로 포위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홍타이지의 이 전략은 그대로 적중해 승리를 거두었다. 임경업은 당시 제 눈 앞을 그냥 지나쳐가는 수많은 적의 무리를 보고도 의주부윤으로서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지켜야 하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죄가 되었고, 이후 간신 김자점이 좌의정 심기원을 역모죄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임경업에게 그와 공모했다는 내란 프레임을 씌워졌다. 굳이 누구라도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작금의 난무하는 내란 프레임 속에 희생된 대한민국의 장군들이 떠오른다.
병자호란과 관련된 또 하나의 유적은 '오금동'이라는 이름 자체이다. 오금공원에 세워진 유래비에는 오금동에 대해 '오동나무와 거문고'를 뜻하는 한자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하러 가는 길에 이 지역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며 "아, 오금이 저리구나" 말해서 오금동이 되었다는 설, 모두를 써 놓았다.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오동나무가 많고 거문고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살아 '오동나무 오(梧)'와 '거문고 금(琴)'을 합쳐 오금동(梧琴洞)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오금이 저려 오금동이 되었다는 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충민정 / 임경업 장군의 시호로써 정자의 이름을 삼았다는 송파구청장의 설명 표석이 곁에 있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명기 되지 않았다. 
충민정에서 내려 본 송파경찰서 앞 사거리 
오금역 2번출구에서 보이는 충민정 오래전 병자호란을 주제로 쓴 김훈의 작품 <남한산성>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황동혁 감독이 블록버스터 사극 영화 <남한산성>을 만들었다. 소설과 영화는 병자호란의 발발부터 삼전도 굴욕을 맞이하기까지 47일간 벌어진 남한산성 안에서의 일들을 다뤘는데, 읽고 보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던 작품이었으나, 영화를 본 중국인들의 평가는 한결 같아 기억에 남아 있다. 평은 대개 아래의 3개로 귀결됐다.
一个厚脸皮的小国家屈服于我们的国家!和你最喜欢的人。
건방진 소국이 우리 대국에게 굴복했다!
朝鲜自大而昏迷,终于向中国投降了。
거만하고 주제도 모르던 조선이 마침내 중국에게 항복했도다.
朝鲜是一个忠实的仆人国家。清朝是一个坏国家。
조선은 충직한 신하의 나라였음. 청나라는 나쁜 야만의 나라임.사정이 이러한 데도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밖으로는 늘 사대하고, 안으로는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목숨 걸고 싸운다. 그리고 그 대가리에는 언제나 무능하고 야비한 지도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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