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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전사(戰史)상 최악의 전투 하남 법화골 싸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1. 14. 10:15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는 말은 <손자병법> 모공(謨攻) 편에 나오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다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잘못 쓰인다. 이기는 것(勝)과 굴복시키는 것(屈)은 다르다. 이긴다는 것은 일단 싸움을 전제로 하기에, 원전(原典) 대로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다'고 표현해야 옳다. 손자(孫子)는 바로 그것을 모공(謨攻), 즉 '전략과 공격'의 최상의 전법으로 쳤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되는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싸우지도 않아도 될 싸움을 벌어 크게 패해 굴복하는 일'일 것일 터인데, 그 경우에 가장 부합되는 싸움이 아마도 병자호란 중 일어난 남한산성 법화골 전투가 아닐런가 한다. 당시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싸우지도 않아도 될 싸움을 벌였고, 크게 패했으며, 결국은 그로 인해 항복을 해야 했다. 그와 같은 엄청난 쪽팔림 때문인지 법화골 전투는 역사에서 감춰져 있다. 가르치지도 않는다.   

     

     

    남한산성 북문
    병자호란 당시 북문을 나선 조선군 300명은
    이 골짜기를 통과해 법화골로 갔다.
    그러나 적의 유인작전에 속은 조선군은 300명이 전원 전사하고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적은 단 두 명만 죽었다.

     

    전후 사정을 따지자면 병자호란 자체가 굴복시킬 수는 없을지언정 피할 수는 있는 전쟁이었다. 우리 조선 사신들이 심양에서 열린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에서 깽판만 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약술하자면, 17세기 초 만주의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아우르고 1616년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1세기 중원을 호령했던 여진족의 금(金)나라를 잇겠다는 것이었는데, 후금은 1620년 남만주 사르후에서 47만 대군의 조·명(朝·明)연합군을 격파하고 북방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조선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여 싸웠음에도 후금과는 척을 지지 않았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도원수 강홍립이 조선의 참전은 명나라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임을 밝히고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자 조선의 외교는 다시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사대주의로 돌아섰다. 조선의 외교 전선에 위험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대청국(大淸國)으로 바꾸었다. 대개 지명을 국명으로 사용한 기존의 중국 왕조와 달리 청(淸)은 추상명사로서, '대청국'의 만주어 발음 ' 다이칭 구룬'은 '전사(戰士)의 나라'를 의미한다. 더불어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하며, 이 '전사의 나라' 황제 즉위식에 주변의 나라들을 초청했는데, 그 위세에 눌린 조선 역시 사신을 보내 참석했다. 하지만 조선 사신은 홍타이지에게 절 하기를 거부했다. 조선은 오직 명나라만을 황제국으로 받들 뿐이므로 홍타이지, 너는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칼 / 국립고궁박물관 ·심양고궁박물관 교류 특별전
    홍타이지의 칼 / 국립고궁박물관 ·심양고궁박물관 교류 특별전

     

    조선 사신이 하례를 거부하자 청나라 관원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무릎을 꿇리었다. 이 과정에서 사신들은 구타를 당하고 옷이 찢기고 갓이 부서졌지만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나덕현과 이확, 이 두 명의 조선 사신들로 인해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은 엉망이 되었다. 청나라 관원들은 저 무례한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베야 한다고 했지만 타이지는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선물을 안기며 국서를 들려 보냈다. 아울러 조선 사신이 다치지 않게 친위 기병으로 하여금 국경까지 호위하게 했다. 

     

    타이지의 생각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있는 만큼 조선과는 척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를 정벌하고 나면 너희들도 별 수 없이 무릎을 꿇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조정은 끝내 호의적이지 않았으니, 황제를 참칭(僭稱)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아온 사신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들고일어났으며, 이들을 청(淸)에 파견한 영의정 김류(金瑬)에 대한 탄핵 논의까지 일었다.

     

    다행히 김류는 이조판서 김상헌의 도움으로 탄핵을 면했지만 사신들은 삭탈관직과 귀양을 피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이러했던 바, 홍타이지의 국서는 임금에게 올라가지도 못했다. 이쯤 되자 타이지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한 타이지는 1636년 음력 12월 8일, 압록강이 얼기 무섭게 5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선을 향해 치달았고, 선봉장 마부태의 군대는 12월 15일 서울 홍제원에 도달했다.

     

    심양에서 조선의 서울까지 불과 7일밖에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쏜살같은 질주였다. 실제로도 봉수(烽燧)보다도 빨랐으니, 인조 임금은 양화나루를 가로막은 마부태의 군대로 인해 강화도로 가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피신한 강화도는 남한산성보다도 먼저 함락돼 지옥도가 펼쳐졌던 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임금의 신세도 풍전등화였는데, 그 과정에서 영의정 김류는 되지도 않은 전력으로 청군을 공격하고 나섰던 바, 필패는 이미 싸우기도 전 정해진 일이었다. 

     

     

     

    남한산성 전승문(全勝門) / 남한산성 북문의 이름은 전승문이다. 이곳을 나가 벌어진 병자호란 때의 치욕에 대한 반어법으로 훗날 정조 임금이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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