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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감사 민병석의 기막힌 변신과 이혜훈 장관후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1. 8. 20:47
얼마 전 강화 갑곶진의 전쟁박물관을 찾았다가 그 앞 비석군(群)에 놓인 선정비 가운데 친일파 민병석(閔丙奭)의 것이 두 개나 되는 데 놀랐다. 선정비나 송덕비 같은 것이 원래 의미를 따질 물건이 못되는지라 의당 간과했지만, 놈의 관복(官福)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놈은 지방관으로서는 요직인 종2품 강화유수에 이어, 종2품 진무사와 강화유수를 겸하는 자리에도 올라 연임(連任)을 하였던 모양이다.

전쟁박물관 앞 비석군 
강화유수 민병석 청덕애민선정비 
강화유수 겸 진무사 민병석 애민선정비 / 1889년 세워졌다.
민병석은 계속해서 관복이 좋았으니 이후 1889년부터 5년간 지방관의 꽃으로도 불리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암행어사 조병세의 탄핵을 받을 만큼 악정을 펼쳤다. 그만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대는 탐관오리였다는 것이지만 민왕후의 척족이었던지라 자리보존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운이 영원하지는 않았으니 평안감사 말년인 1894년 그만 청나라와 일본의 싸움인 청일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앞서 경기도 성환과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청일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바 있다. 잠시 부언하자면 1894년 7월 25일에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의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청군 1,100여 명을 익사시켰다. 이어 일본육군은 7월 30일에 성환·아산·공주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해 승리한 후, 평양으로 진격해 청군의 주력부대인 섭사성(聶士成) 군대와 9월 5일부터 9월 16일까지 평양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병력은 1만 2천 명, 일본군은 1만 7천 명이었다.

성환전투 장면 / 일본군이 자체 개발한 개인화기 무라타 소총을 갈겨대고 있다. 
을밀대와 현무문 / 일제가 1920년 발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 속의 사진으로, 청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청군 섭지초와 일본 오시마 요시마사 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에도 말했지만 평양전투에서는 아무 죄 없는 조선인 3만 명이 희생되었고, 나아가 개성에서는 조선군끼리 서로 총질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로 간의 반목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청군에 소속된 평안감사 휘하의 군인들과 일본군에 소속된 경군(京軍) 장용영 군인들이 전투에 내몰린 결과였다. 청군과 일본군은 이 조선군들을 총알받이로 앞장 세웠고, 살기 위한 본능으로 조선군끼리 싸우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때의 평안감사가 바로 민병석이었다. 청일전쟁에 앞서 조선정부를 굴복시킨 일본군은 (☞ '청일전쟁과 1894년의 마지막 한일전쟁')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친청파 민씨 척족인 민병석을 파직시키고 김만식을 대신 부임시켰다. 이 같은 전보 소식을 들은 민병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문을 받고 김만식에게 감사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청나라의 개가 되어 싸웠던 것이니 이 과정에서 죄 없는 조선인이 희생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그동안 신임 평안감사 김만식은 황해도 봉산 정방산성(正方山城)에 40일 동안 머물러야 했다. 민병석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성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벌어진 상황인데, 이에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은 청나라 감사, 김만식은 일본 감사"라고 불렀다. 수도 한성도 마찬가지였으니 조정도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미구에 미중전쟁이 벌어진다면 친미파와 친중파가 또 그렇게 될 터이다)

지금은 황해북도 사리원 시에 속한 정방산성의 남문
결국 평양전투에서도 일본군이 이겼고 김만식은 비로소 평양으로 들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참혹한 전투를 치른 평양성은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고, 각지에 즐비한 시체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 태웠는데, 열흘을 태웠어도 처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9월 17일에 청나라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의 대동구(大東溝)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며 천년 이상 간섭했던 중국 세력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그렇다면 민병석은 어찌 되었을까? 정계를 은퇴해 닉향했을까? 광화문 세종대로 앞에 세워진 기념비전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념비전 건립에 관해 적은 윤치호의 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9월 7일(음력 8월 6일), 일요일, 비 / 대황제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기념비가 서울에 세워질 예정이다. 이 일을 위해서 정부의 모든 관료들이 1개월분 녹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돈만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야 했고, 13개 도의 유지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함경남도는 2만 5,000냥, 즉 5천 달러를 내야 한다. 우리 구역인 덕원은 1,100냥을 내기로 되어 있다....."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御極四十年)를 기념해 1903년 지어진 이 기념비전은 각 도(道)와 군(郡)에 부과된 돈으로, 즉 팔도 백성들에게 나눠 부과된 돈으로 지어졌다. 즉 백성들의 고혈로 구축된 황제의 송덕기념비에 다름 아니었으니, 비문은 관료 중 가장 많은 돈을 낸 농상공부대신 민병석이 썼다.

광화문 비전 / 정식 명칭은 '서울 고종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전'이다. 
민병석이 쓴 대한제국황제 즉위사십년칭경기념비 / 민병석은 뛰어난 서예가로도 알려져 있다. 이미 몇 차례 말한 대로 고종은 매관매직과 수뢰를 즐긴 왕이었던 바, 민병석은 평안도에서 가렴주구한 돈으로 42세 때인 1900년에 대한제국 군부대신에 올랐고 이어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민병석의 약력을 다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민병석은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인물이나 기억해야 할 중요 민족반역자이다. 21세 때인 1879년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민병석은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장은규를 파견한 전력이 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육군대신에 올라 대한제국 군대를 무력화시켰고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 통감 부임에 적극 협조했다. 이완용·박제순·고영희·윤덕영·이병무·조종응·조민회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경술국적 8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였을 때는 궁내부대신으로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이완용과 함께 금척훈장을 받았으며 일제에게는 훈1등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합방 후에는 중추원 고문을 5차례 중임하고 애국금채회의 발기인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금전적 후원에 앞장섰으며 조선사편수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 고문 등을 지내며 민족정신 말살에도 앞장섰다. 친일파 중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친일한 놈은 드물다.

민병석(1858~1940) 민병석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재빨리 일본에 붙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나라까지 팔아먹었는데, 이재에도 밝아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관민 합작으로 출자해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의 초대 은행장을 역임했으며, 1920년에 해동은행 취체역(이사)이 되고, 1921년에 고려요업과 조선생명보험의 대표취체역(사장), 1923년에는 조선제사(製絲) 대표취체역을 맡았으며, 1924년에는 계림전기 창립위원장으로서 거액의 월급을 받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서울 보신각 옆 골목을 빠져나가 청계천 쪽으로 가다 보면 길가에 대한천일은행 본점 터 표석이 있고, "1899년에 창립된 민족계 근대은행으로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창립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였으며, 우리 고유의 회계법(會計法)인 송도사개치부법을 사용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일반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라고 긍정적으로만 쓰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본점 터 표석 
창립 무렵의 대한천일은행 본점 / 왼쪽으로 보신각이 보인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 시절의 민병석 / 유교 친일화를 위한 기구인 조선유도회 부회장과 한국사 왜곡을 위한 기구인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그 무렵의 보신각 
대한천일은행의 위치 
송도사개치부 
그 무렵의 대한천일은행 종로지점 건물 / 1909년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광통관'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공공건물로, 이 건물 1층에 대한천일은행 종로지점이 개설됐다. 왼쪽으로 대동생명과 한성은행 건물이 보인다. 
광통관은 지금도 우리은행 지점으로 사용된다. / 입구 문에 대한제국 이화문장이 새겨졌다. 
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건물 / 광통관은 1914년 화재로 일부 소실돼 1915년 복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외관이 바뀌었다.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앞의 '회동서관' 터 표석 
그 무렵의 회동서관 / 회동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사 겸 서점 중의 하나로서 대한제국기 최대의 서점이었으나 일본 서점과 언어말살책에 밀려 고전하다 1950년경 문을 닫았다. 당시의 서울 남대문로가 배경으로 깔린 노래 / 정혜린이 부른 '서울이여 안녕' 지금 한 명의 변절자가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국민의 힘 국회의원 등을 지내다 작년 12월 28일, 이재명 정부의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이혜훈이다. 이후 정치적 변절 및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철학과 부합하는지에 대해 여야 모두에서 비판이 제기되었고, 동시에 과거 보좌진에 대한 폭언 및 갑질 의혹, 불법 재산 증식 의혹, 영종도 땅 투기 의혹 등이 제기되며 많은 국민의 욕바지가 되고 있다.

이혜훈(1964~ ) 나는 그중 이혜훈이 자신의 보좌관을 시켜 제 집의 프린트기를 고치게 한 사적인 노동을 가장 문제 삼고 싶은데, (그전 강선우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나는 그 부분에서 가장 분개했다) 보좌관이 집에 갔을 때 그의 남편(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인 김 아무개)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그들 부부의 인간에 대한 무례가 쌍으로 드러났던 것이니, 오늘 어느 유튜브 방송에서의 "이런 사람(이혜훈)은 공산화가 되던 어떤 사회가 되던,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집안에 있는 만국기 중 해당 국가의 국기를 들고나가 흔들며 환영할 사람"이며, "그래서 한 자리 차지할 사람"이라는 말에 전격 공감이 됐다.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세상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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