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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의 아차산성 전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2. 23. 09:42
어릴 적 신기하게 생각했던 경주 원성왕릉 서역인 상은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앞서 I편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에서 온 장사꾼이다. 그 먼 곳에서 어떻게 신라 땅까지 올 수 있었을까, 언뜻 불가능하게도 여겨지지만, 소그디아(Sogdia)라는 나라에 대해 기술한 <신당서(新唐書)> '강전(康傳)'에는 "강국(康國, 소그디아) 남자는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 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쓰여 있다.

소그디아의 위치 
2017년 경주 월성 유적에서 발견된 소그디아인 토우 그들은 환금성이 있는 물건들을 들고 세계를 다녔으며, 동방에 없는 보석상감보검, 유리그릇, 유리구슬 등을 들고 신라 땅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무덤 속에서 고이 보존되었던 바, 1973년 경주 계림로 도로 공사 중 발견된 옛 무덤에서 나온 보검은 세계 유일의 보석 감장(嵌裝, 금판 위에 박은 보석을 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기법) 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칼로 인해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의 공사장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유물도 감장 보검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계림로 출토 보석감장보검 / 세계 유일의 감장보검으로 1조 달러의 가치가 매겨졌다. 
카자흐스탄 발견 유물과 계림로 보검의 손잡이 부분 
황남대총 출토 유리그릇 · 상감팔찌 · 은합 
서양인의 얼굴이 들어간 유리구슬 
당나라 시대, 등짐을 맨 소그디아 상인 피규어 / 2018 뉴욕 크리스티 경매소에 나온 유물로 소그드인의 손에 든 병이 신라 황남대총 출토 유리병과 유사하다. 
같은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카자흐스탄 박물관의 유리잔(왼쪽)과 황남대총 출토 유리잔(오른쪽) 한 마디로 그들은 고대 무역상이었으니, 마찬가지 형태의 서역인 상이 서 있는 경주 흥덕왕릉의 비편에서는 그들을 가리키는 '무역지인간(貿易之人間)'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문학에도 자취를 남겼으니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이란 한시(漢詩) 중에 소그드인을 가리키는 '속독'(粟特=Sogd)이라는 시가 있고, 그들이 추는 사자 춤을 표현한 '산예' (狻猊=사자)라는 시도 있다. 즉 그들 소그드인은 물건을 팔기 위한 이목 집중의 일환으로 시장 바닥에서 서역의 춤들을 선보였던 것이다. '속독'과 '산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속독
쑥대머리 파란 얼굴의 이상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난새춤을 추네.
북소리는 둥둥둥 바람은 살랑살랑
남으로 달리고 북으로 뛰며 그칠 줄을 모르네.
蓬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산예
사막을 멀리멀리 걸어걸어 만리 길을 오느라
털가죽 옷은 다 해지고 먼지만 부옇게 덮였지만,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치는 모습에 덕이 배어 있으니
이 힘찬 기운 백 가지 짐승 중 최고가 아니겠는가.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경주 흥덕왕릉의 서역인 상 
흥덕왕릉 비석편 / '무역지인간'(貿易之人間)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에 의거해 재현된 사자춤 그런데 그들 상인 중 에는 신라에 와서 직업이 바뀐 사람들도 있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등에 서 있는 서역인들이 바로 그들이니, 그들 소그디아 무역상들은 신라에 물건을 팔러 왔다가 그의 덩치와 힘을 높이 산 신라의 왕들에 의해 호위무사로 전업(轉業)을 한 케이스였다. 페르시아에서 들어와 유행한 폴로(격구) 경기의 프로 폴로선수가 된 사람도 있었고, 헌강왕 때의 처용처럼 관료로서 입신한 경우도 있었다.

원성왕릉 우측 무인상 
당나라 시대, 소그디아인 피규어와 매우 흡사하다. 
원성왕릉 좌측 무인상 
서역인 무인상은 오른쪽 신라 문인상에 비해 확실히 우람하다. 
경주 구정동 고분의 폴로 스틱을 든 서역인 상 /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였을 것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처용무'에서 사용되는 탈 역시 서역인의 형상이다. 
용강동 고분 출토 서역인 토용 / 머리에 복두를 쓰고 손에는 고위 문관만이 지닐 수 있는 홀을 들었다. 문관으로 입신한 서역인도 상당수였음이 짐작된다. 앞서 말한 대로 고구려 온달 장군도 소그디아인을 아버지로 둔 혼혈아였는데, 다만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이 아니라 용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군에서 힘이 좋은 코커서스 계통의 백인을 용병으로 고용한 경우는 흔히 있었던 듯보이니, 지안 각저총 씨름 그림, 무용총 수박희(맨손 겨루기) 그림, 안악3호분 수박희 그림 등에서는 고구려 사람과 겨루는 코 큰 서양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온달의 아버지는 일찍 전사를 한 듯하니 이후 온달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궁벽한 삶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각저총 씨름 그림 
지린성 지안시 우산하 고분군의 각저총 / 왼쪽이 무용총, 오른쪽이 각저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가난한 데다 보통 사람과 다른 특이한 외모로 인해 놀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容貌龍鍾可笑) 그럼에도 고구려 평원왕의 딸을 아내로 맞는 행운을 누린다. 사연은 이렇다.
고구려 평원왕의 딸은 어렸을 때 매우 잘 울었다. 왕은 잘 우는 공주를 놀리면서 "크면 너를 우스꽝스런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하였다. 공주가 성장하자 왕은 왕실 가문인 고(高)씨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면서 고씨에게 시집가기를 한사코 마다하고 마침내 온달의 아내가 되었다. (高句麗平原王之女 幼時好啼 王戱曰 以汝將歸愚溫達 及長欲下嫁于上部高氏 女以王不可食言 固辭終爲溫達之妻)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제 남편 온달을 훌륭한 장군으로 단련시키는 바, 577년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침입 때는 배산벌 싸움의 선봉에 서 뛰어난 용력으로 수십 명의 목을 베었고, 그 여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승리할 수 있었다.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북주와의 싸움은 훗날의 수·당과의 싸움과 달리 농성전을 펼치지 않고 야전(野戰)을 택했던 바, 아마도 일당백의 힘을 갖춘 선봉장 온달이 있어 가능했던 포진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온달은 비로소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을 받고 대형이라는 벼슬에 오르는데,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高)씨의 성과 승리를 뜻하는 승(勝)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은 듯하다. 온달은 이제 명실공히 고구려의 왕족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삼국사기/온달전>에 나오지 않고 <본기>에 실린 고구려 장군 고승이 영양왕 14년(603)에 북한산성을 공략하다 신라 진평왕의 군사에게 패했다는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온달전>에는 온달이 평원왕의 다음 왕인 영양왕에게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출정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고구려 전투의 기록이 영양왕 14년(603)의 북한산성(아차산성) 전투가 유일하며, 이때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군에 패했다고 기록돼 있는 바, 아차성(阿且城) 전투 중 유시(流矢)를 맞고 죽은 온달을 고승으로 추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할 것이다. 당시 고구려군은 아래와 같은 루트로 남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단 코스인 임진강 호로고루 성과 양주 대모산성을 잇는 루트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 호로고루성 / 평양성까지 150km, 아차산 시루봉 보루까지 52km이다. 
호로고루 성과 가까운 무등리 2보루에서 발견된 고구려 찰갑옷 / 1500년만에 발견된 고구려 장수의 갑옷으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진흥왕 북진 때의 일일 것이다. 
양주 대모산성 
대모산성 동문지 
대모산성과 가까운 태봉산 보루에서 발견된 고구려 찰갑 편 / 연합뉴스 DB 
다음으로는 서울 봉화산보루와 시루봉 보루를 점령하고 북한산성(아차산성)에 주둔 중인 신라군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봉화산 보루는 자취가 거의 사라졌다. 
아차산 시루봉 보루 사면과 2012년 복원시 재현된 고구려 목책 
아차산 시루봉 보루 
온달이 화살을 맞고 전사한 아차산성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석실고분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실의 쇠뇌 /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당나라 고종이 탐낸 신라의 천보노(千步弩: 1000보 떨어진 적을 쏠 수 있는 쇠뇌) 기록이 있다. 온달은 신라군이 아차산성 위에서 난사한 장거리 쇠뇌에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영천에서 최초로 발견된 쇠뇌 방아틀 뭉치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아단성(阿旦城)은 아차성(阿且城)으로 비정된다. 
구리시 광개토광장의 광개토대왕비 / 국내 복제비 중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AI로 재현한 만주 집안의 눈 덮힌 광개토대왕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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