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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돌궐인들은 일찌기 중국에 속아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2. 28. 23:09

     

    KBS '세계는 지금'은 내가 거의 유일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으로, 시간대가 토요일 저녁인지라 자주 빼 먹기도 하지만 본방을 사수하려 애쓰는 편이다. 어제는 치솟는 자국 물가로 인해 옆 나라인 그리스로 장을 보러 가는 이스탄불에 사는 튀르키예 국민들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게 봤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차로 4시간이나 걸리는 그리스 알렉산드로폴리스로 장을 보러 가는 것인데, 평균적으로 튀르키예 대비 3분의 1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이것을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튀르키예는 2022년부터 환율이 폭등하며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왔던 바, 리라화 환율이 반 토막 나고 물가상승률이 치솟으며 지금의 상황을 맞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실정(失政)이 빚은 비극인데, 오늘 보는 대한민국의 내일인 듯도 하다. 에르도안이 미국과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도 비슷한다. 누가 '형제의 나라' 아니랄까봐....  

     

     

    이스탄불 환전소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환율을 살펴보는 여성 / 연합뉴스 DB

     

    우리는 흔히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뿐 아니라 튀르키예에서도 그렇게 부르는데, 그 이유를 대개 튀르키예가 과거 한국전쟁 때 4차에 걸쳐 많은 병력을 파견한 것에서 찾는다. 잠시 회고하자면, 터키(당시의 국명)는 한국전에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 4천936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터키군은 최전선에서 용감히 싸워 미군 8사단과 함께 가장 먼저 북진해 청천강까지 이르렀으나 1950년 11월 27일, 기습 참전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터키 여단은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놀라운 분전으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미군 보병2사단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완강한 저항선을 구축하며 중공군 공격을 지연시켰던 바, 다른 유엔군 부대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군우리 전투'인데, 이쯤되면 혈맹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형제의 나라'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만일 그렇다면 미국·영국도 모두 '형제의 나라'라고 불러야 옳기 때문이다.

     

    한국과 튀르키예의 인연은 이보다 훨씬 더 올라가니 튀르키예 국민이 자신들의 조상의 나라라고 여기는 후돌궐(後突厥)국 4대 황제 빌게 카간(毗伽可汗, 재위 716~734)의 비문에는 돌궐이 "매크리(고구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돌궐(突厥)튀르키예가 한자로 음차된 것이고, 매크리(Möküli)는 '맥'(貊)이 돌궐어로 음차된 된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를 '맥족의 나라'라는 의미로서 매크리라 불렀다. 

     

     

    몽골역사박물관(호쇼차이담 박물관)의 빌게 카간 황제의 비문 / 사진 속의 러시아 학자가 가리키는 곳이 고구려와의 동맹 기록 부분이다.
    돌궐 -고구려 동맹 기록이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이 비석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68년이나 지난 735년 건립됐다. 그럼에도 황제 빌게 카간은 고구려 망국 후 돌궐로 대거 유입된 고구려 유민들에게 돌궐과 고구려가 전통적 맹방(盟邦)이었음을 천명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는 대대로 맹방이었던 듯, 2대 황제 카파간 카간(默啜可汗)은 고구려 유신(遺臣)인 고문간(高文簡)과 고공의(高拱毅)의 망명을 받아주고 고문간을 부마로 삼기까지 했다.

     

    또 고공의에게는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이란 직함을 내려 고구려 유민을 이끌게 하는데, 그 직함으로 볼 때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대수령이란 직함을 가진 사람으로는 고정부(高定傅)라는 이름도 보인다. 하지만 튀르키예가 이렇듯 돈독한 인연으로서 참전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인연을 따져 한국이 형제의 나라였다 말한다면 북한 역시 형제의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건 아니고, 터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건 오스만제국 이래로 러시아와는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한국 침략의 배후에 소련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쿠르드족을 주축으로 한 적극적인 파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7세기 전반의 동아시아 / 동돌궐은 고구려보다 앞선 630년에 당나라에 멸망했으나 후(後)돌궐이 일어났다.

     

    또한 2대 황제 카파간 카간(默啜可汗)의 조카이자 정복사업의 사령관이었던 퀼 테긴(闕特勤, 685~731)의 비석에는 돌궐국(제1 돌궐국) 황제의 장례식에 동쪽에 있는 배크리(Böküli)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 있다. 배크리는 매크리와 함께 돌궐인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이 역시 고구려인을 뜻하는 맥족(貊族)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것이 정설이다. 내용은 '572년 무칸카간(木杆可汗, 재위 555~572)이 사망하자 동쪽 해뜨는 곳에 있는 나라 배크리에서 사신이 와 조문하였다'는 것이 골자이다. 

     

    고구려와 돌궐은 초기에는 충돌이 잦았다. 돌궐의 초대황제 부민카간(土門可汗)은 건국 후 곧 고구려를 침공했던 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나오는 '양원왕 7년(551)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으나 백암성 전투에서 고흘 장군에게 패해 물러갔다'는 기사의 돌궐측 주인공이다. 부민카간은 고구려 침공에는 실패했지만 이듬해(552년) 북주(北周) 공략에는 성공해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 백성 6만 명을 포로로 끌고갔다. 

     

    돌궐은 제3대 무칸카간 때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던 바, 서쪽으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댔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굴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접경인 흥안령산맥까지 영토를 넓혔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누락돼 있으나) 무칸카간은 고구려에도 침공했다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평원왕은 무칸카간이 죽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이후로는 양국이 별 다른 충돌이 없었고, 이에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고구려는 577년 배산벌 전투에서 온달 장군이 북주의 무제(武帝)를 패퇴시킨다. (대신 남쪽의 방비가 약해져  신라 진흥왕의 침공을 허용해야 했다)

     

     

    퀼 테긴의 비석
    몽골역사박물관의 빌게 카간 비문과 퀼 테긴 비문(오른쪽)

     

    퀼 테긴 비문의 내용은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18년(607) 조에 나오는 "일찍이 수나라 양제(煬帝)가 계민(啓民, 계민가한)의 장막에 행차했을 때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는 기록과도 상통한다. 즉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양제는 혹시나 뒤통수를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뒷문 단속차 친히 돌궐의 수도 오르드 바르크를 방문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계민가한의 장막에는 자신보다 먼저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양제가 고구려 사신에게 "돌아가 네 왕에게 빨리 수나라에 입조(入朝)하여 조현(朝見)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수서(隋書)> 양제 본기(本紀) 대업(大業) 3년(607) 조에 실려 있다.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이미 친교를 맺은 것에 놀랐고, 까닭에 이처럼 화를 냈던 것이다. 이때가 고구려 영양왕(재위 590~618) 시절이다. 영양왕은 598년 양제의 부친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전력이 있었는데, 그는 통일제국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에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하고 북방의 강국인 돌궐과 선제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영양왕은 이와 같은 외교술 속에서 수양제가 감행한 세 차례 대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바, 무리한 외정(外征)으로 국력이 소진된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 고구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와 같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외교책을 썼던 바, 수나라의 배후국인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마찬가지로 수나라를 위협하기 위함이었다. 원교근공은 '먼 나라와 친교(親交)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으로 <사기(史記)/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유명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 오른쪽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이다.

     

    현재 이재명 정부의 외교술은 고구려 영양왕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명은 오히려 전통의 맹방인 미국과는 척을 지고, 중국과 친하겠다는 기괴한 포진을 펼치고 있는데, 전국시대 이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져 사용돼 온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기본 병법도 무시한, 나라마저 위태롭게 하는 바보천치와 같은 포석이 아닐 수 없다. 퀼 테긴의 비문에는 고구려와의 동맹 외에도 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중국인의 말은 시종 달콤하다. 한인(漢人)의 물건은 매우 아름답다. 달콤한 말과 아름다운 물건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민족들이 접근하게 만든다.  한 부락이 이렇게 하여 그들과 가까이 살게 되면 그들 한인은 곧 저의를 드러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을 발전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가 잘못을 범하면 한인들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니, 그들의 직계친족, 직계씨족, 나아가 부락까지 없앤다. 우리 돌궐인들은 일찌기 달콤한 말과 조건에 현혹되어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다."

     

     

    5세기 구축된 서울 용마산 고구려 제1보루
    용마산 제1보루 오르는 길
    제1보루에서 내려본 서울 풍경
    제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
    용마산 제2보루로 가는 길
    용마산 제1보루 안내문
    용마산 제2보루 오르는 길
    용마산 제2보루에서 바라본 용마산 정상
    용마산 제2보루 안내문
    발굴 후 매장된 제2보루의 유적 / 규모는 면적 739㎡, 둘레 79m, 장경 20m, 단경 8m이며 해발 230m 지점에 위치한다.
    제2보루에서 내려본 서울 풍경
    용마산정
    용마산정 아래의 기암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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